<검신재생 65화>
65. 이미 있었다.
“그림 말입니까?”
“네. 그림 좀 그려 달라는데요.”
“천 공자가 그런 부탁을 했다고요?”
“네.”
“그러니까 그걸 왜…….”
“그 양반 원래 그림 좋아하기로 유명했었는데, 기벽이 도졌나 보죠 뭐.”
능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청현진인은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천 공자가 무언가를 찾았는가?’
새벽 동이 트자마자 화산으로 가려고 움직이던 청현진인을 찾아온 능허였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림을 요구했다.
정확히는 미로에 그려졌던 문양과도 같은 그림을 기억나는 대로 그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알겠소.”
“아, 진인뿐 아니라 가능하면 다른 화산 제자분들도…….”
“천 공자의 부탁이라면 응당 들어줘야지. 나도 그려 드리겠습니다.”
국보도 순순히 나섰다.
그런 국보를 흘깃 바라본 청현진인은 내심 흡족했다.
귀총을 빠져나온 이후 국보는 소림에서 있었던 일을 자주 물어봤고, 특히 천무백에게 대해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다.
그건 시기나 질투가 아니었고 어느 정도 공경과 경외감이 담긴 질문들이었다.
‘좋은 일이지.’
단순한 질투나 시기는 사람을 성장시킬 동력이 되지만, 그게 심해지면 무학에서는 심마로 다가온다.
하나 그걸 목표로 삼으면, 더 큰 성장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천무백은 화산 안에만 있어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약간은 오만하던 국보의 변화를 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게 모르게 화산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좋게 바꿨으니, 그깟 그림쯤이야. 도와줘야지.’
청현진인은 기억에 남은 미로에 새겨진 그림을 그려 줬다.
* * *
천무백은 다시금 지하광장에 들어왔다.
소문을 듣고 혹시 뭔가 없나 싶어 구경하던 이들이 한두 명 기웃거렸으나, 지금은 모두 떠나 조용했다.
‘어째서 미로를 만들었지?’
천무백은 제단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미로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희미하게 지워져 있는 이름은 분명 전진성단이다.
성단이란 함은 신자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어야 하는 곳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찾아와 신을 기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곳은 미로를 헤맨 뒤에야 찾아올 수 있었다.
‘왜?’
어째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을 미로를 헤매야 찾을 수 있게 해 놨을까?
“주군, 그림 가져왔습니다.”
그때 능허가 다가왔다.
천무백이 고개를 휙 돌렸다. 강렬한 눈빛에 귀찮은 기색 가득하던 능허는 흠칫하고 멈췄다.
“능허야.”
“네, 네?”
“성물이란 게 뭐겠냐?”
“성물이요? 뭔 개소리…… 으음. 글쎄요?”
능허는 팔짱을 끼며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천무백의 눈빛을 보건데 대충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음, 뭐, 가장 중요한 거겠죠? 그 종교에서 신성시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거?”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소중한 것.”
천무백이 천천히 웅얼거렸다.
이곳에 성물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면.
“이곳에 왔던 이들은 모두 무림인.”
그럴 수밖에 없다.
숨겨진 장소, 미로, 이런 곳에 어떤 일반인이 들어설 수 있을까.
모두 무공을 익혀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무림인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이지?”
“그야 뭐 절세의 비급이겠죠.”
“절세의 비급이 소중한 이유는 무인으로서 완성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겠지.”
무인들은 누구나 절세의 비급을 갈구한다.
더 강한 무공 비급은, 본인의 무학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니까.
“무학의 더 높은 경지, 무학의 완성을 이뤄내려면 단순한 수련을 넘어 지독한 고난을 헤쳐 나가야지.”
“지독한 고난?”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분노하며, 때로는 좌절하는.”
능허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마치 미로 같네요.”
보다 더 높은 경지.
때로는 길을 잃고, 무작정 벽을 부수며 분노하고, 도저히 길을 찾지 못해 멈춰 설 때도 있다.
하나 거기까지 가길 위해선 미로와 같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
마치 무학을 익히는 것처럼.
“하지만 고난을 헤쳐 나갈 땐 늘 열쇠가 있는 법이다.”
“열쇠요?”
“스승의 지도나 이미 앞서나간 선배들의 조언, 그리고 때론 영약일 수도 있지.”
“하면 미로에서는……”
능허는 저도 모르게 품에서 보자기를 꺼냈다.
청현진인을 비롯해 화산 무인들이 그려 준 자신들이 기억하는 미로에서의 그림이었다.
천무백은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딱딱한 바닥에 칼을 쭉쭉 그었다.
딱딱한 돌로 이뤄진 바닥에 순식간에 선과 형이 생겨났다.
능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네가 가지고 온 화산의 그림들이다.”
“맞습니다.”
끼기기긱.
천무백은 이어 더 그렸다.
“그리고 이건 무성적마의 것.”
“무성적마한테까지 가서 그림 그려 달라고 했습니까?”
“그려 주던데.”
“순순히요?”
“좀 때렸지.”
“이야. 노인 공경은 정말 강호 최고시네.”
천무백은 무시하며 이번에는 능허가 기억하는 그림을 바닥에 새겼다.
“어라?”
능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그들이 갇힌 미로는 똑같다. 그러면 봤던 미로에서의 그림도 다 같기 마련이다.
한데…….
“묘하게 다르네.”
조금씩 다른 구석이 보였다.
물론 사람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그 기억 그대로 그릴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모든 그림을 한데 두고 비교해 보니 확연히 다른 점이 눈에 밟혔다.
“그림은 미로를 풀 열쇠였다.”
“그 말은 곧……. 길이란 말씀이시죠.”
능허가 상황을 정리했다.
“무림인들이 원하는 더 높은 경지, 무학의 완성을 보기 위해 미로라는 고난을 헤쳐 나가고, 그 고난을 벗어날 길이 바로 이 그림들이라는 얘깁니까?”
“그래.”
성물은 중요한 물건이다.
이 성단은 신도들을 위한 성단이 아니다.
무림인들을 위한 성단이다.
성단을 찾아온 무림인에겐 성물이란 비급, 또는 무학의 완성이다.
천무백에게는 바로 검의 끝.
검극이다.
‘검극에 이르기 위한 고난이 미로로 형상화되고, 그 미로를 빠져나가기 위해선 그림들이 열쇠였다.’
능허가 말했다.
“어, 그러면 그 미로가 휙휙 다시 구조가 바뀌는 건 뭡니까? 그 이상한 원뿔을 뽑으면 그렇게 됐잖습니까.”
“그걸 뽑은 이유가 뭐냐?”
“눈에 띄니까 건들었죠.”
“눈에 띄니까…….”
“그냥 복잡한 미로인데, 아무것도 없는데, 딱 그것만 나와 있으니까. 뭔가 싶어서 건드렸죠.”
그래, 그렇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로, 똑같은 그림이 계속 반복되는 미로,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도중에 눈에 밟히는 무언가. 지루함 속에서 그 특별한 걸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쵸? 그러니까. 내가 괜히 뽑은 게 아니라니까.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랬대.”
천무백은 원뿔 모양의 구조물을 떠올렸다.
평평한 미로의 벽에 툭 튀어나온 그건 사실 무시하고 지나치기란 어렵다.
설령 무시하더라도 머릿속에 계속 잔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미로를 헤메다 보면 그런 감정은 더 심해지리라.
“무학의 완성과 경지를 높이는 건 더없이 고난스럽고 지루한 일이다. 원뿔을 뽑았을 때 어땠지?”
“미로가 다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림도 바뀌었죠.”
“그림이 바뀌었다. 즉, 길이 바뀌었다.”
천무백의 머릿속이 점점 밝아졌다.
“변심(變心)이다.”
한 우물만 파는 건 생각보다 무지막지하게 힘든 일이다.
“지루한 고난 속에서 무학의 완성에 이르지 못해, 결국 변심해서 다른 길을 찾게 된다.”
무학의 완성을 위해 가는 길.
스스로가 확신이 없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고, 계속해서 길은 바뀐다.
그럴수록 미로를 빠져나가는 건 더 어려워진다.
한번 흔들린 마음은 미로가 반각마다 계속 바뀌는 것처럼 길을 계속 잃게 된다.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하여 천무백은 어떤 행동을 했는가?
“원뿔을 다 뽑아버려서 아예 미로를 무너뜨려 버렸죠.”
“그래.”
“그래서 다 뒈질 뻔했긴 했지만.”
“…….”
“아마 다리 한두 개 뿌려진 놈들 좀 있을걸요?”
원뿔을 다 뽑았다.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발버둥 친 것이었다.
하여 이어진 상황은 무엇이었는가?
미로가 완전히 무너졌다.
“길을 잃다 못해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떨어진 지하광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로를 헤맸지만 결국 얻은 건 없다.
“이상한 일이로구나.”
천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미로가 무너지고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또 헤맸다고 해도,
무학의 경지를 높이지는 못하는 것일 뿐 아예 아무것도 안 남고 사라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동빈아, 무슨 생각을 했더냐.’
천무백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천무백이 생각한 무학과는 너무 달랐던 탓이다.
길을 잃고 헤맨다고 해도, 설령 다른 길을 찾고자 노력하다가 제 길을 잃는다고 해도.
한번 검을 잡은 이상.
한번 무학에 발을 들인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는 없다.
덩그러니 지하광장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얻는 게 없을 수는 없다.
‘깨달음은 남는 법이니까.’
그것이 후회라고 해도, 깨달음은 남는 법이다.
무학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능허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쩝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혈사문 애들이 가져간 건가. 다 죽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능허는 피곤하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바닥에 천무백이 새긴 그림들을 보며 문득 말했다.
“근데 이것들 정확히 뭘 그린 겁니까?”
능허의 물음에 천무백의 몸이 순간 멈춰 섰다.
선과 형(形).
기하학적인 그림과 문양.
천무백은 처음에 단지 미로를 푸는 열쇠로만 생각했다.
가령 스승의 지도라든지, 앞서 나간 선배들의 조언이라든지.
또는 영약의 도움이라든지.
무학에서 정진해 나가며 얻는 수많은 조력들 말이다.
천무백 역시 지금 이 길에 이르기까지 숱한 경험과 조언, 그리고 영약으로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의미로 남기에는 너무 다양했고 많았다.
천무백은 잠시 그림들을 보며 침묵했다.
‘여동빈이 생각하는 무학의 끝. 거기에 이르는 고난을 미로로 표현했고, 하면 길은 무엇인가?’
천무백은 여동빈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깐이마나 그가 되었다.
‘내가 그와 다른 것. 여기선 내 생각이 아니라 그 녀석처럼 생각해야 한다. 나와 놈의 차이점…….’
상징적인 걸 좋아하는 놈이긴 했다. 도사였으니까.
하나 그래도 무학에 있어서만큼은 천무백과 때론 서로 각을 세울 정도로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했다.
그리고 천무백과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초식…….’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천무백의 눈이 바닥에 새겨진 그림을 빠르게 훑었다.
선과 형이 춤을 췄다.
스릉.
천무백이 검을 뽑았다.
‘나는 초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여동빈은 늘 초식을 지켜야 한다고 했었지.’
여동빈은 초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었다.
숱한 전생의 경험 덕분에 초식을 벗어나 그저 감각으로만으로도 무공을 익히고 쓸 수 있는 천무백은 초식에 얽메이지 않았다.
모든 무공에서 초식을 벗어나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고 여겼다.
각자의 초식은 다르고, 각자의 검은 다르다고 여겼다.
반면 여동빈은 달랐다.
그는 정진을 위해선 정해진 규칙과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믿었다.
일반적인 무인들은 초식을 알아야 흔들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것이 여동빈과 천무백의 가장 큰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천무백이 홀린 듯이 검을 들었다.
그의 검이 바닥에 새겨진 선을 그렸다.
선이 곧 형이 되었다.
형(形)은 곧 검이 되었다.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있었군.”
여동빈이 검선(劍仙)으로 불리게 됐던 가장 큰 이유.
천무백의 칼끝에서 천둔검법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