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64화>
64. 어딨어? 성물?
싸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무리됐다.
도문탁이 죽자 남은 장로들도 힘을 못 썼다. 몇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이미 농락당했단 사실에 분노한 무인들로부터 처참하게 참살당했다.
싸움이 끝나고 난 뒤 지하광장에는 허무함이 맴돌았다.
“허…….”
“그 짓을 하면서 왔는데 그게 다 가짜였다니.”
“그럼 이것들도 다 만들어 놓은 거란 말인가?”
“그 미로까지?”
중인들은 수군대며 광장 곳곳을 쑤시고 만지고 건드렸다.
애석하게도 특별한 기관진식이나 무언가 나타나진 않았다.
혈사문이 제물을 올려놓을 제단만이 광장에 덩그러니 있었다.
‘전진성단…….’
천무백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다고?’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전진교는 강호 문파라기보단 종교집단이었지. 그들은 종남산뿐 아니라 강호 곳곳에 성단을 만들었었고, 전진교의 성물을 보관했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정말로 이 광장에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중인들은 하나둘씩 광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광장은 출구로 나가는 통로가 바로 있었다. 아마 이쪽으로 혈사문 장로들이 드나든 듯했다.
“이거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겁니까?”
능허의 물음에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털린 것일지도 모르지.”
“이미 털렸다고요? 혈사문 얘네들이요?”
“얘네들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냥 미로만 있는 이곳을 그럴듯하게 적혈검귀 무덤, 귀총이라고 꾸며댄 거겠지.”
“허. 그럼 이미 진즉 털렸다는 건데.”
“누가 기관진식을 발동 안 시켰으면 진작 미로는 금방 풀었을 거다.”
“으흠.”
천무백의 말에 능허는 애써 헛기침했다.
미로가 복잡하긴 했지만, 애당초 능허가 기관진식을 건들지 않았다면 시간이 걸리긴 해도 미로를 빠져나갔으리라.
그러면 바로 여기 제단이 놓여 있는 지하광장이 나온다.
생각보다 되게 쉬운 구조였다. 한마디로 누군가 여길 발견했다면, 이미 진작 안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나갈 만했다.
“소협.”
천무백은 시선을 돌려 청현진인을 바라봤다.
“네, 진인.”
“고맙습니다. 덕택에 이 함정에서 목숨을 구명할 수 있었습니다.”
청현진인은 포권을 취하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가 숙이자 뒤에 있던 국보와 화산 제자들도 일제히 허릴 숙였다.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소림에서도 그랬듯이요.”
해야 할 일.
그랬다.
‘내걸 건드리는 데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소림에서야 청성표국에 억울한 누명을 씌웠으니 싸웠다.
여기에서도 혈사문이 전진성단의 성물을 가져갔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했고, 또 앞을 막고 있으니 싸웠다.
천무백은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다.
물론 나쁜 짓을 일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이익과 영역을 침범하는 걸 그저 자비롭게 넘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응당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고.
그 사이에서 소림이 구명 받은 것이고, 여기에 모인 무인들도 구명 받은 것일 뿐이다.
특별한 건 없다.
하나 청현진인은 좀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감명받은 얼굴이었다.
“과연…… 소협은 정녕 검협이란 말이 어울리시는군요.”
“과찬입니다.”
청현진인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과한 욕심이었나 봅니다. 혈귀곡이란 대적이 나타났는데, 그저 비급에 눈이 멀어 욕심을 부리고, 결국 얻은 건 없고 자칫하면 여기서 화산의 제자들을 잃을 뻔했지요. 화산은 이만 화산으로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혈귀곡 추적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청현진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화산으로 같이 가시겠습니까?”
천무백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몇 가지 있어서요. 화산은 늦지 않게 방문하겠습니다.”
천무백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청명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백이 청면진인의 뒤를 흘깃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 있소? 그…… 매화일검.”
“국보라고 합니다, 소협.”
“천무백이오.”
국보가 잠시 망설이다 포권을 취했다.
“이번 일로 제가 정저지와(井底之蛙)였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소협, 소협께서 하시는 협객행에 저 역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혈귀곡이란 악적들을 추적할 때 본도도 곁에서 같이 싸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자신을 쳐다보는 국보의 시선이 뜨거웠지만 천무백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화산마저 지하 광장을 빠져나가자 정말 더는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긴 중인들도 거의 모두 사라졌다.
“와. 진짜 아무것도 없었네요. 결국엔. 진짜.”
능허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뭐, 강호에 돌아다니는 장보도 중 백중 구십구는 다 가짜지만…….”
하기야, 전진교가 멸문된 지 얼마나 됐고.
그사이 성물이 무사하다는 보장이 있겠는가.
천무백은 애써 미련을 털어 냈다.
‘어쩌면 여동빈이 이곳을 만든 게 아니라, 여동빈을 기리기 위한 성단일지도 모르지.’
여동빈은 전진교를 세운 왕중양의 스승으로, 중원에서 팔선(八仙)중 하나로 꼽힌다.
천무백의 계획과는 다르게 여기는 그저 어쩌면 그를 기리는 제단일 뿐일지도 모른다.
“능허야.”
“네.”
“오랜만에 수련이나 한번 봐주마.”
“……이야기가 왜 갑자기 그렇게 됩니까?”
“아까 혈사문 애들이랑 싸울 때 너만 은근슬쩍 빠져있는 거 다 봤다.”
“와. 무슨 뒤에도 눈이 달렸습니까.”
“한번 그냥 찔러봤는데 진짜네?”
“…….”
“보아하니 네가 실력 부족하단 핑계로 슬슬 빼는 거 같은데. 오늘부터 특별 수련시켜 주마.”
“특별 말입니까? 그냥 일반 수련은 없습니까?”
“없어.”
“후. 이렇게 화를 풀려고 날 데리고 다니는구나.”
* * *
“어이, 여 씨. 또 동굴에 처박혀서 도나 닦고 있어?”
“검왕께서 여기는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은, 강호에서 하도 안 보여서 뒈졌나 싶어 왔지.”
천무백이 퉁명스럽게 팔짱을 꼈다.
그의 친우이자 맞수인 여동빈이 자애롭게 웃으며 가부좌를 튼 채 반겼다.
‘거 참. 기운은 또 깊어졌네.’
아주 혼자 영약을 국 말아 드시나.
천무백은 여동빈의 얼굴을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꾸준히 내공수련과 무공 수련을 거듭하는 본인도 머리칼에 흰머리가 늘고 노화가 진행되고 있건만, 여동빈은 여전히 검은 머리에 얼굴에 광택이 돌았다.
“강호에서 칼질 안 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 하니 아주 얼굴이 번지르르하구나.”
“무위자연 속에서 도를 찾는 것이다.”
“도는 무슨, 앉아서 참선하는 것으로 검도(劍道)에 이른다고?”
여동빈은 말갛게 웃었다.
천무백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등에 메었던 검을 뽑았다.
강호에서 모든 이가 두려워한다는 검왕의 대검이었다.
“뭐 됐고, 한판 붙자.”
여동빈은 고개를 저었다.
“너의 검에 살기가 가득하다. 불가.”
“걱정하지 마, 그래도 친우라고 하나 있는 놈 죽이진 않을 테니까.”
“아니, 그 살기는 내가 아니라 너한테 향할 거다.”
“도 닦는 도인 아니랄까 봐. 무슨 개소리야.”
하여간. 제 스승한테 꼭 이상한 것만 배웠어요.
하긴, 스승이 신선인데 제자도 평범한 놈은 아니겠지.
“검을 계속 휘두르는 목적이 무엇이냐?”
“그야…….”
천무백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르겠네. 처음엔 짐승이나 화적들한테 살기 위해서 검을 잡았는데…… 어느 순간부턴 손에서 안 떨어지더라고.”
“…….”
여동빈이 한층 깊어진 눈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검의 끝을 보기 위함이냐?”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비록 여기서 도나 닦고 있지만.
천무백은 뒤에 놓여 있는 여동빈의 검을 바라봤다.
소문대로 신선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만한 검객이 있나 싶었을 정도로 대단한 검사가 바로 여동빈 아니었던가.
“맞다.”
“그렇게 말하면서 검 안 잡은 지 얼마나 됐냐?”
“손에서 검을 놓는다고 해도, 검을 잊어버리지는 않는 법이다.”
당연한 말이다.
하나 천무백은 퉁명하게 대꾸하지 않았다.
분명 거듭된 전생을 생각하면 여동빈보다 더없이 오래 산 자신이었지만, 간혹 여동빈이 이리 말할 때마다 절로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검을 손에서 놓는 것. 이것이 내가 검도에 이르는 방법이다.”
“웃기는 소리.”
천무백이 코웃음 쳤다.
“검은 피를 머금어야 벼려지고 날카로워진다. 검은 투쟁 속에서 발전하는 법이다.”
천무백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것만큼은 변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무수히 많은 전생 동안 겪고 느낀 바였다.
칼 한 자루 품에 안고 강호 풍파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천무백은 숱한 전생을 거듭하고, 이번 삶에선 검왕이 되었다.
아마 더 몇 번의 삶을 지나면 검신이 되고, 그러면 검의 끝에 이르겠지.
“이것이 내 검도(劍道)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여동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게 네 검도지. 그걸 포기하지 않으면 넌 언젠가 검의 끝에 이를 거다.”
“그거 퍽이나 고마운 말이군.”
“하지만 친우여. 검극에 이르는 목적은 같아도 방식은 다 다른 법이다.”
“그래, 네가 하는 방식도 옳다는 거겠지? 뭐, 그렇겠지. 내 눈에는 영 아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게, 강하기는 더럽게 강하단 말이야.
“옳고 그른 게 어디 있겠나.”
여동빈은 가부좌를 풀고 천천히 검을 집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끝에 이르는 것이겠지.”
“글쎄. 그 믿음이 수백 년간 계속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천무백이 씁쓸하게 말하자 여동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흔들릴 수 있지. 근데, 그게 뭐가 문제겠는가?”
“응?”
“흔들리면, 잠깐 딴생각 좀 하고 머리 식히고 돌아오면 될 일.”
“검을 손에서 놓으라고?”
“굳이 놓진 않아도. 좀 딴생각해 보라는 거다.”
“딴생각?”
“너의 검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검도를 구경하듯이 한번 관심있게 봐.”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을 잡은 이라면 누구나 검극에 도달하기를 원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검도를 따르지. 혹시 아는가? 네녀석이 미처 몰랐던 새로운 검도가 있을지?”
천무백은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스스로 검도를 걷는다고 여길 때부터였을까.
그는 자신만의 방식을 옮다 여겼다.
아니, 실제로도 옳았다. 수백년간의 전생을 거듭하며 그는 발전하고 검의 끝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천무백은 자신의 길이 확실하고 더없이 옳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위안을 얻었다.
“그래. 까짓것 나중에 정 아니다 싶으면, 새로운 검도를 한번 찾아보지 뭐.”
굳이 이 방식이 아니어도,
다른 방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게 적잖이 안심됐다.
하니.
“그건 그렇고, 한판 붙자, 여 씨.”
수백 번의 전생 동안 천무백이 인정한 유일한 호적수, 여동빈은 말갛게 웃었다.
* * *
“…….”
썅.
천무백은 눈을 뜨자마자 절로 욕지기가 치솟았다.
“전생을 꿈으로 꾼 건 오랜만인데.”
그것도 하필이면 여동빈과 함께했던 검왕 때의 꿈이라니.
“허 참.”
천무백은 허탈한 목소리로 다시 침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전생을 거듭하다 보면, 매번 그 삶에서의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고 그게 곧 미련으로 남는다.
하여 천무백은 새 삶을 시작할 때마다 최대한 이전 삶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미련 한 가닥이 어느 순간 심마를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한데.
“왜 여동빈이 나오냐.”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거, 꿈에 나올 거면 뭐라도 좀 주지 그랬냐.
전진성단에선 얻은 게 하나도 없는데.
“…….”
그때였다.
천무백은 별안간 우뚝 멈춰섰다.
한참 두 눈을 감고 있던 천무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능허야!”
“……아. 왜 자는 사람을”
“일어나라.”
“오늘 저녁까지 특훈으로 제 신체가 조져져서 일어날 힘도 없습니다.”
“가자! 장보도 찾으러!”
“그게 또 뭔 개소립니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천무백의 말에 능허는 한참 멍하니 쳐다보다가 겨우 중얼거렸다.
“하…… 아닌 척하면서 미련 참 많이 남았었나 보네. 이럴 때 보면 완전 애야.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