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63화>
63. 다 계획이었다.
“…….”
도문탁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귀청에 쿵쿵대는 심장 박동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양손에 칼을 늘어뜨린 채 오연히 서 있는 천무백의 모습은 그야말로 야차 같았다.
아니, 귀신 같았다.
‘피를 온몸을 적신 채 미친 듯이 검을 쓰던 괴물.’
그 한 명에게 당해 혈사문은 400년간 사실상 강호에서 없는 문파로 존재해왔다.
치명적인 피해가 아니라 거의 멸문에 이르렀으니까.
단 한 명에게 말이다.
도문탁은 혈사문주로서 그때 혈사문이 남긴 기록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봤다.
‘지독한 공포만이 기록되어 있었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적에 대한 무기력함과 두려움이 기록에 남겨 있었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혈사문은 강호를 시끄럽게 할 정도로 큰 세력을 자랑했다.
강호공적으로 몰렸지만, 오히려 공격해오는 무림인들을 흡정마공의 제물로 삼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그런 혈사문이 멸문된 건 딱 한명.
적혈검귀였다.
도문탁은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지금 적혈검귀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400년 전에 후인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적혈검귀다.
그의 무공은 모두 실전됐다.
한데 눈앞에 천무백은 문헌 속 적혈검귀와 똑 닮았다.
‘아니다. 내가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뿐!’
콰직!
도문탁은 입술을 깨물어 피를 냈다.
싸움의 절반은 기세 싸움이란 말이 있다. 도문탁은 순순히 인정했다.
방금 완전히 기세에 밀렸다.
때문에 적혈검귀의 망령을 본 게 아니겠는가.
스릉!
도문탁은 도를 꽉 쥐었다.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상대는 천룡검협. 단순한 후기지수가 아니라 현 강호에서 최소한 장로, 어쩌면 구대문파의 대장로급으로 생각해야 한다.’
당장 저기 광륜멸겁진에 갇혀 있는 화산 수호검 상대로도 질 것 같진 않은데, 눈앞의 천무백은 다르다.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
도문탁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모두 전력을 다해 저놈을 잡는다.”
이미 두 명이 죽었다.
남은 이는 셋.
하나 이전과는 다르다.
“제물로 삼지 않는다. 무조건 죽인다.”
도문탁의 선언에 장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그들은 손속에 어느 정도 선을 두었다.
천룡검협은 분명 흡정마공의 제물로 삼기에 너무도 욕심나는 이였으니까.
하나 그들은 이제 흡정마공은 생각도 못 했다.
단번에 오장로와 칠장로가 참살당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수없이 사선을 넘고, 수도 없이 핏물로 씻어온 그들의 직감이 경고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고.
숨 막힐 듯한 살기가 천무백에게 쏟아졌다.
다 대 일의 싸움.
천무백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혈사문주는 만만히 봐선 안 되는 놈인데.’
천무백은 결국 여기서 가진 내력을 모두 쏟아부어야 함을 느꼈다.
적어도 옆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하려면 귀곡광애를 펼쳐야 하고, 그리하면 상당한 내력 소모는 불가피했다. 그런 와중에 공세를 펼쳐야 하니 천무백은 단단히 작심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진성단인 이곳엔 자연기가 넘쳐흐른다는 사실.
경천혼공은 외부의 기를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에 그건 천무백에게 큰 이점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저벅, 저벅.
“내가 한 놈은 맡겠습니다!”
천무백의 오연한 시선이 돌아갔다.
국보.
매화일검이 결연한 얼굴로 검을 잡고 서 있었다. 천무백이 무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허명에 불과하나 본도는 매화일검이오.”
비단 곁에 서는 건 국보뿐이 아니었다.
광륜멸겁진을 끝내 파훼한 이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마음 같아선 본도가 저 우두머리를 상대 하고 싶지만, 내 실력으론 부족할 것 같소. 하지만 나머지는 화산 수호검의 칼에 죽을 것이오.”
청현진인이 한 발짝 걸어 나왔다.
청현진인 뿐 아니었다.
“흥. 감히 가짜 장보도를 꾸며 종남을 속인 죄는 용서할 수 없지.”
종남풍검은 순수하게 농락당했단 사실에 분노하며 검을 꺼냈다.
종남과 화산, 두 집단이 검을 꺼내 든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일변했다.
청현진인은 종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도무림에서도 서로 대적하고 칼을 맞대고 신경전을 펼치지만,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족속이 나타나면 힘을 합치는 법이지요. 정도무림이 정마대전 당시 살아남은 이유도 그것이고, 승리한 것도 그것이오.”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현듯 40년 전, 전생이 생각났다.
가장 강력한 세를 자랑하던 마교에 비해, 중원 역사상 가장 약한 세대였던 정도무림은 순식간에 밀렸다.
비록 호사가들은 대전에서 정도무림이 승리한 이유로 창천검신의 존재를 꼽았지만.
어찌 사람 하나가 강호 전체를 바꾸겠는가.
‘서로 갈등하고 싸우긴 하지만, 결국 중요한 순간에 힘을 합치니, 이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겠지.’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정마대전 이래 현저하게 부족해진 수준이었지만.
‘정도무림은 바뀌지 않았어.’
천무백은 그것이, 퍽 유쾌했다.
‘내가 천마와 싸웠던 게, 그저 의미 없는 짓은 아니었구나.’
강호라 이런 게 아니겠는가.
천무백은 웃었다.
* * *
나머지 장로 셋은 화산과 종남을 상대로 생사를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도문탁은 침음을 삼켰다.
‘끝났군.’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
섬서 무인들을 흡정마공의 제물로 삼겠단 계획도.
혈귀곡과 대등한 동맹 관계로 발전하겠다는 목표도.
모두 다 허사로 돌아갔다.
아니, 이제는 생존을 걱정할 때다.
이미 오장로와 칠장로가 죽었다. 그전에는 하남성에서 장로 두 명이 죽었다.
혈사문의 전력 절반이 사라진 거나 다름없다.
여기 남은 이들이 전부다.
가짜 장보도에 농락당했단 사실, 흡정마공의 한낱 제물로 바쳐질 뻔했단 사실에 화산과 종남은 매섭게 몰아쳤다.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일이 어찌 이리되었단 말인가…….’
도문탁은 이를 악물고 벌게진 눈으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천무백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해? 안 덤벼?”
도문탁의 도에서 도풍(刀風)이 쏟아졌다.
* * *
천무백의 눈은 깊게 가라앉았다.
쩌저저정!
손목을 타고 전해져오는 도풍의 위력은 과연 심상치 않았다.
‘이 정도 수준이면…… 혈사문이 왜 부활을 외쳤는지 알만하군.’
솔직히 말해 섬서 무인들을 제물로 바치겠단 계획을 깨달았을 때, 천무백의 생각은 하나였다.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어?’
어떤 무인들이 올 줄 알고?
그들이 순순히 제압당할지 어떻게 알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야 내공을 억제하는 광륜멸겁진의 존재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천무백은 광륜멸겁진은 일종의 안전한 패라고 여겼다.
‘자신 있었다는 거겠지, 이놈.’
쏟아지는 도풍을 천무백이 양손에 든 검으로 번갈아 갈라버렸다.
동시에 천무백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도문탁에게 돌진했다.
순식간의 삼장 거리를 한 번의 도약에 좁혔다.
콰드드득!
도문탁의 도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고, 천무백의 쌍검이 서로 교차하며 얽혀들었다.
찰나의 순간 천무백은 도문탁의 눈을 봤다. 도문탁도 천무백의 눈을 봤다.
그랬다. 천무백은 광륜멸겁진이 없어도, 혈사문이 이 미친 계획을 시도했으리라고 확신했다.
왜냐면 도문탁 이놈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이 상황에서도 단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싸움에 앞서 두려움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눈빛에 두려움이 없다는 건.
정말로 자신이 질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도문탁은 진심으로 자신이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끄응.’
천무백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어지간히도 흡정마공을 써왔군!’
한 번의 공방이 오갈 때마다 천무백은 검신을 타고 전해지는 무지막지한 내력에 혀를 찼다.
얼마 전 약선으로부터 대환단 다섯 개를 제조한 영약을 복용한 천무백이다.
더는 내공의 총량은 부족하지 않았다.
한데도 도문탁의 압도적인 내력에 한 걸음씩 뒤로 밀렸다.
콰드득! 채채채챙!
두 개의 검과 하나의 도가 서로 불똥을 튀기며 미친 듯이 얽히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정중앙에서 싸우던 둘은 어느새 수십 번의 공방을 나누며 외곽까지 이동했다.
알게 모르게 천무백이 조금씩 밀려난 결과였다.
그 상황에 도문탁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애송이! 아무리 현란한 기교와 정교한 초식이 있다고 한들, 결국 무공이란 내공의 힘이다!”
아무리 정교한 초식, 현란한 기교, 고명한 무공이라해도.
결국, 강호에서의 싸움은 내공의 싸움이다.
그게 혈사문의 생각이었다.
괜히 흡정마공이란 괴악한 무공이 나타난 게 아니었다.
도문탁은 흡정마공으로 거듭 벽을 깨고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하여 그는 내공을 신봉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천무백도 그의 말에 적잖이 동의했다.
무인들이 영약에 목을 매달고, 더 강력한 내공심법을 원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내공이다.
하나 천무백은 또 다르게 생각했다.
“네놈의 내공과 내 내공을 비교하기엔 어처구니가 없지.”
천무백의 눈이 순간 새하얗게 빛났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이끄는 대로, 엄청난 반사신경과 타고난 무예로 싸우는 것이 고수라고.
하나 천무백은 달랐다.
“머리는 뒀다 뭐해?”
“……뭐?”
모든 게 계획이었다.
쩌저저정!
“……!”
희열을 느끼던 도문탁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렸다.
일전엔 천무백이 한 걸음씩 밀려났다면, 이번엔 도문탁이 밀려났다.
그제야 도문탁은 깨달았다. 천무백이 제대로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왜? 내가 더 내공이 많아 보여?”
“그…… 그럴 수는 없다! 지금껏 내가 흡정마공을 써 온 절정고수들이 얼마나 되는데…… 그럴 수는!”
천무백은 도문탁의 당혹스러움을 이해했다.
실제로 내공의 총량은 도문탁이 압도적이었다. 약선의 영약으로도 도문탁이 흡정마공으로 흡수해 온 양을 따라가지 못했다.
하나 무지막지하게 내공을 쏟아버리는 것과 필요한 지점과 정확한 시기에 집중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천무백은 기다렸다.
머릿속에, 그리고 손끝에 상대의 도법이 익숙해질 때까지.
그리고 상대가 어느 순간에 내공을 쓰고, 언제 회수하는지.
수십 번의 공방 끝에 천무백은 완전하게 도문탁의 도법을 파악했다.
상대의 무공을 알게 되면 자연 파훼법을 알게 된다.
쩌저적! 쩌적!
도와 칼이 부딪칠 때마다 도문탁은 실감했다.
자신의 도법에서 힘이 약해지는 순간 상대의 내공은 더욱 커졌고, 도법에서 힘이 강해지면, 상대는 그저 공격을 흘려보냈다.
자신의 평생 무공이 샅샅이 익혔단 사실에 도문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너 원래 혈사문 후인이 아니구나?”
“……!”
“대마나찰의 수뢰도법이라…… 마교에서 왔구나.”
도문탁은 그야말로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걸, 내 모든 걸 알고 있다!’
원래부터 알았는가?
아니다.
그랬으면 초반에 자신이 승세를 잡지 못 했으리라.
그러면?
‘고작 반각도 안 되는 짧은 공방에서 내 무공을 전부 파악했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그게……?
천무백은 도문탁의 눈에 떠오른 혼란을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도문탁의 실력은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했지만.
‘글쎄.’
존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선 무인의 향기보단 그저 괴물의 추잡한 냄새만 났으니까.
서걱!
천무백의 쌍검이 도문탁의 목을 교차로 베었다.
섬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다시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 혈사문 치고는 너무 허무한 최후였다.
하나 천무백은 가장 어울리는 최후라 생각했다.
저런 놈에겐 장엄한 최후도, 멋진 마지막도 없어야 했다.
“혈사문은 끝났다.”
천무백이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