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62화>
62. 적혈검귀가 만든 무덤.
미약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광장은 정적에 잠겼다.
싸움을 지켜보던 중인들 모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나마 천무백의 무위를 알고 있는 청현진인만이 이해하고 있었을 뿐, 그도 입을 못 여는 건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귀면수라였다. 귀면수라!’
납득하되 완전히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청현진인은 천무백의 수준을 자신과 비등하다고 여겼다.
일전 소림에서 천무백이 그들의 목숨을 구해 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뒤늦게 알려진 것에 따르면 혜량대사와 무소선사, 그리고 본인까지 산공독에 중독되어 제대로 싸울 수 없던 상황였다는 사실.
만일 셋 모두 정상적인 몸 상태라면, 당시 습격해 온 혈귀곡의 간부들을 이겨냈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여 청현진인은 천무백의 수준을 자신과 엇비슷하리라 여겼다.
오히려 강호 경험까지 생각하면, 그 차이로 자신이 이기리라 여겼다.
한데…….
‘정작 우물 안 개구리는 나였군.’
비단 청현진인 뿐 아니라 좌중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축에 속하는 국보는 귀면수라의 이름은 잘 몰랐지만, 그래도 조금 전 보여 준 천무백의 무위를 똑똑히 봤다.
‘나는 할 수 있는가?’
스스로 물어도 답은 명백했다.
불가능.
자신은 저렇게 싸울 수 없다.
이긴다는 건 둘째치고도, 버티는 것이 한계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맥이 탁하고 풀리는 기분이었다.
‘국보야, 국보야. 너는 매화일검이란 허명에 취해 있었구나.’
그저 기회가 오지 않았다고 여겼다.
자신의 이름을 날릴 기회가.
그래서 천룡검협을 얕잡아 보기도 했고, 시기하기도 했다. 자신이 만일 그때 소림에 있었다면, 능히 천룡검협의 별호를 자신이 얻었으리라 은근히 자신했다.
하나 국보는 바닥에 피칠갑이 되어 쓰러진 시신을 보고 통렬하게 반성했다.
‘나와는 다른 수준이다.’
마음이 쓰라렸다.
고통스러웠다.
화산 내에서 최고의 기재라 칭송받으며 온갖 기대를 받던 그가 아닌가.
국보는 늘 앞서 있었고, 승자였다.
그런 그에게 자신보다 더 대단하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건 큰 고통이었다.
하나 국보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부족하면 보고 배우면 될 일. 화산의 매화는 향기를 잃지 않는 법이니.’
검집을 움켜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광륜멸겁진에 갇힌 이들에게 경악과 경외에 찬 시선을 받았다면, 반대편에선 전혀 다른 시선이 향했다.
찌릿.
“뭐 해? 눈빛으로 싸워?”
경계, 경악, 지독한 적개심.
천무백에게 쏟아지는 시선이었다.
‘뭐, 오랜만이군.’
천무백은 언제나 다수를 상대로 싸워왔고, 그들은 하나같이 저런 시선을 보냈었다.
천무백은 이 시선을 즐겼다.
‘역시. 나는 이런 게 맞나 봐.’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요런 거.
천무백은 불현듯 다시금 여동빈을 떠올렸다.
원래 도인이었던 그는 개인적인 수련과 참선을 중요시했다.
천무백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하여 비무에서는 서로가 엇비슷했지만, 막상 실전처럼 겨룰 땐 늘 천무백이 한 발짝 앞서가곤 했다.
그런데도 여동빈은 자신만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천무백도 마찬가지다.
‘너는 너 방법대로 검극에 이르러 우화등선했겠지.’
하면 그 방식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나 천무백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여기.
여동빈이 만든 전진성단에서 천무백은 결심했다.
‘나만의 방식대로, 검극을 향한다.’
천무백이 검을 다시금 곧추세웠다.
그의 시선이 닿자 혈사문의 남은 장로들은 모두 움찔거렸다.
채채챙.
장로들은 각자의 병기를 꺼냈다.
천무백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 이는 모두 다섯명.
천무백의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이미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천무백은 겉보기와는 달리 지극히 냉철했다.
적들까지의 거리와 보폭을 계산했고, 행동반경을 예상했다.
상대의 병기를 보고 공격방식을 유추했고, 누가 더 강하고 누가 방어적이고, 누가 공격적인지 예측했다.
그 모든 요소를 머릿속에서 분석하고 또 계산하여 최고의 효율을 짜냈다.
그리고 그 효율대로, 모두 죽인다.
“아, 잠깐. 너희들이 혈사문의 전부냐?”
“…….”
“혹시 어디 더 숨어 있는 놈들 없지? 있으면 미리 말해.”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언의 긍정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천무백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지. 찾아서 죽이면 되니까.”
“……!”
천무백의 시선이 장로들 중 가장 늙은 노인에게 향했다.
“안 그래? 혈사문주?”
“……어찌.”
“뭘 어찌 알아. 우리 사이에. 딱 보니까 각이 나오는데.”
천무백이 빙글빙글 웃었다.
‘으음!’
혈사문주 도문탁은 침음을 삼켰다.
저 웃음을 보니 절로 가슴이 싸늘해졌다. 사실 천무백을 처음 봤을 때부터 도문탁은 께름칙함을 느꼈다.
그의 감각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냈다.
귀면수라가 나설 때 만류하려다 말았다. 귀면수라라면 충분히 맞상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설령 상대가 안 된다고 해도 저리 무참하게 죽을 줄은 몰랐다.
‘절대로 애송이가 아니다.’
왜 혈귀곡의 그 대단한 놈들이 소림에서 도주했는지 일견 이해가 갔다.
‘소림의 방장이고, 나한각주고, 화산 수호검이고 뭐고 간에. 결국, 저 천룡검협 때문에 혈귀곡의 작전이 실패한 거군.’
소림에서 사건은 도문탁도 잘 알았다.
당시 습격에 참여한 무인들 중 절반은 혈사문 소속이었으니까.
그 사건에서 도문탁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혈귀곡이 시키는 대로 그저 방패막이가 될 거란 걸 직감했다.
하여 생각해 낸 게 바로 지금의 일이다.
섬서 무인들의 내공과 정기를 흡정마공으로 흡수한 후, 혈귀곡과 대등한 동맹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혈사문이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한데.
‘자칫하면 여기가 무덤이 될 지도 모르겠군.’
적혈검귀의 무덤이라고 가짜 소문을 냈건만.
어쩌면 여기가 혈사문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
그 사실에 도문탁은 쓰게 웃으며 일갈했다.
“모두 저놈을 합공한다.”
“……!”
“여기가 벼랑 끝이라 생각하고 싸우도록.”
장로들은 침묵했다.
“어차피 우리는 무림공적이나 다름없는데, 합공에 무슨 망설임이 있겠나?”
도문탁의 자조어린 목소리에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이 하는 행동은 천인공노할 짓인데, 고작 약관도 안 된 후기지수를 합공한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자. 결정했으면, 한꺼번에 덤벼. 그래야 한꺼번에 죽이니까.”
도문탁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스러웠지만, 그는 참았다.
혈사문이 적혈검귀에게 멸문당하고 어연 400년.
그들은 지금이 기회라 여겼다. 모든 정도 무림의 세가 약해진 지금.
그들의 대업을 이룰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그러니 앞을 막는 천룡검협은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쾅!
다섯 명이 일시에 천무백에게 달려들었다.
새하얀 미소가 어둠 속에서 번졌다.
* * *
“젠장! 우리 일단 휴전합시다!”
국보가 갑작스레 소리쳤다.
이미 천무백과 혈사문의 싸움은 시작됐다.
광륜멸겁진에 갇힌 이상 내공을 쓸 수 없다.
국보는 그걸 지켜만 봐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천무백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싹 사라졌다.
아니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그것들 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혈사문이다.
역병을 퍼뜨리고, 무인들을 그저 흡정마공의 제물로 쓰려는 악독한 놈들이 아닌가.
적어도 의와 협을 안다면 지금 천무백 홀로 싸우게 둬선 안된다.
국보의 외침에 청현진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현 장로. 우리는 같은 정파인이니 서로 견제를 하는 건 이 상황을 타개한 후에 합시다.”
“……종남은 그 뜻에 따르겠소.”
종남풍검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청현진인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관성검이 한 발짝 나섰다.
“적혈검귀의 비급 같은 건 없다는 게 밝혀졌으니, 싸울 이유도 없지요. 내가 비록 정파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 악독한 놈들 편에 설 생각은 없습니다. 합심하지요.”
“고맙소. 하면…… 무성적마께선?”
무성적마는 미간을 좁혔다.
“제기랄. 어떻게 하려고?”
“적어도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면 이 진법은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오.”
“음.”
“어차피 적혈검귀의 비급도 없으니 싸울 이유도 없소. 물론 그대가 화산을 끝까지 적대하겠다면 나 역시 참지는 않겠다만…… 저 혈사문의 제물이 될 수는 없지 않소?”
“후. 그러지.”
청현진인, 매화일검, 종남풍검, 무성적마와 관성검까지.
그들이 머리를 맞대자 진법의 파훼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청현진인은 진법을 파훼하는 도중 천무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창천검신은 정마대전때 사실상 홀로 싸웠지. 정도무림의 힘이 약해서.’
어쩐지 그의 후인의 뒷모습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홀로 싸우게 둘 순 없다.’
청현진인의 얼굴에 단호함이 새겨졌다.
* * *
다섯 명이 사방을 점하고 달려드는 순간.
역으로 천무백이 먼저 움직였다.
일전처럼 공격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선공을 가했다.
“……!”
그 가공할 기세에 정면에서 달려들던 칠장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꽈앙!
단 한 번의 부딪침에 칠장로는 위장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쾅! 쾅!
‘이 미, 미친!’
무지막지한 거력이 쏟아졌다.
이것이 쾌검인지, 아니면 패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속도로 보면 그야말로 압도적인 쾌검인데, 한 번에 쏟아지는 무거움은 전신의 근육을 찢어 버릴 듯 강력했다.
이대로 수세로 몰리면 못해도 다섯 합 이전에 목이 잘리리라.
다행히도 그때 다른 장로들이 옆과 뒤에서 공격해왔다.
그 틈을 타 칠장로는 간신히 몸을 빼냈다.
쩌저저저정!
천무백의 검이 찔렀다가 회수하듯이 쭉 잡아당겨 졌다. 그러다가 비스듬히 비틀어지며 옆에서 찔려오는 창끝을 쳐냈다. 다시 내딛은 뒤 거침없이 후려쳤다.
쩌엉!
“끄윽!”
팔장로가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어 천무백의 검격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흡사 새하얀 폭풍이 몰아치듯 그야말로 가공할 기세였다.
한데 그때 또다시 천무백의 뒤에서 기습적인 공격이 들어왔다.
‘음!’
묘수였다.
천무백도 순간적으로 뻗은 검을 회수해 빙 둘러대며 막았다.
찌이이잉!
검을 타고 손목으로 전해지는 진동에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문주라 이건가?’
천무백은 검을 거둬들이며 앞을 바라봤다. 조금 전 묘수로 천무백의 공세를 단번에 중단시킨 건 바로 도문탁이었다.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감탄했다.
순간 그의 몸에서 기세가 피어올랐다.
오랜만에 만난 꽤 괜찮은 실력자가 아닌가.
만일 천무백이 소림에서 약선의 영약을 복용치 못했다면, 제법 곤욕을 겪을 만한 실력자.
“귀총이란 글자를 남긴 자가 당신이군?”
“…….”
이어지는 공방에서도 도문탁은 절묘한 상황판단을 보여줬다.
천무백에게 다른 장로들이 밀려 위기에 처하는가 싶으면, 묘수로 파고들어 무위로 되돌렸다.
계속해서 공세가 무위로 돌아가는데도 천무백은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천무백은 별안간 죽은 귀면수라의 꼬챙이 같은 검을 들었다.
양손에 검 한 자루씩.
“적혈검귀한테 혈사문은 멸문당했었지.”
“…….”
“네놈들 조상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아나?”
“그 무슨…….”
“이곳을 적혈검귀의 무덤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었지?”
도문탁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아니 오히려 그는 지금 천무백의 말에 대답하며 시선을 끌었다.
그 순간.
오장로와 칠장로가 천무백의 뒤에서 기습을 시도했다.
‘됐다!’
완벽한 기습이다.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치명상을 입을 터! 도문탁은 곧장 내기를 끌어올렸다. 자신이 마지막 마무리를 할 요령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몸은 우뚝 멈춰 섰다.
푸아아악!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상식을 벗어났다. 천무백의 주위로 휘몰아치는 붉은 피보라. 왼손엔 오장로가, 오른손엔 칠장로의 몸이 잘리고, 꿰뚫렸다.
그제야 도문탁은 이해했다.
온몸을 피로 뒤집어쓴 채, 새하얀 미소가 떠오르는 천무백.
그건 절대로 무인이 아니었다.
귀신이었다. 검에 미친 귀신. 살육에 미친 귀신.
전신을 피로 물들인, 적혈검귀
그랬다.
여기는 적혈검귀의 무덤이 아니고.
“적혈검귀가 만드는 무덤…….”
혈사문의 무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