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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61화 (61/318)

<검신재생 61화>

61. 한꺼번에 덤벼

혈사문 삼장로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천무백의 검.

‘검기!’

검신을 타고 흐르는 미약한 검기도 아니다.

마치 불타오르는듯 새하얀 빛의 검기는 이해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려 칠장로를 바라봤다. 혈사문에서 진법에 가장 이해도가 높은 자였다. 지금 설치한 광륜멸겁진도 그가 보름 가까이 밤새워 만들었다.

“진법은 제대로 만들어졌소!”

삼장로의 시선을 읽은 칠장로가 그리 외쳤다.

그랬다.

진법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른 무인들, 화산이며 종남이며 무성적마며 관성검이며.

다들 한가락 한다는 고수들이 내공을 운용하지 못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러서 있지 않은가.

‘대체 뭐냐!’

삼장로의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는 혈사문에 투신하기 이전에는 지금은 모습을 감춘 마교의 촉망받는 고수였다.

마교에서 촉망받는 고수란 얘기는 곧 숱한 실전을 거듭 겪어온 사람이란 뜻이다. 저기 화산의 매화일검처럼 그저 온실 속에서, 사문 안에서만 수련과 영약으로 성장한 게 아니다.

삼장로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칼에 숱하게 피를 묻혔다.

그랬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삼장로는 몸이 굳었다.

‘감이 잡히지 않는다.’

천무백의 타오르는 검기를 보라.

분명 강대한 내가고수가 맞다. 한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無).

아무것도 없었다.

위압감도, 두려움도, 살기도, 엄청난 기세도.

하지만 삼장로는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 움직이기 어려웠다. 목은 뻣뻣이 굳었다. 입술이 메말랐다. 허리춤의 검집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법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자.

그런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자.

‘말이 안 된다. 광륜멸겁진에 갇히면 우리 문주도 그저 기세를 일으키는 정도밖에 내공을 쓰지 못해!’

한데 저 애송이가 그걸 이겨낼 정도로 고강하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여긴 강호다.

마교 출신인 그는 강호를 숱하게 경험했다. 혈사문에 오기 전까지 수도 없이 싸웠고 피를 뒤집었으며, 혈사문에 투신한 후에도 삼장로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싸웠다.

하여 그는 강호가 어떤 곳인지 안다.

비상식이 가능한 곳.

그것이 바로 강호다.

그리고 삼장로는 지금 비상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긴장해야 하겠소.”

삼장로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곳에 모인 혈사문의 무인은 총 여섯이었다.

삼장로 본인을 포함해 이장로와 오장로, 칠장로와 팔장로, 그리고 맨 뒤, 제단 위에 있는 사람.

바로 혈사문주까지.

삼장로는 긴장을 억누르며 검을 뽑았다.

‘아무리 강한 내가고수라고 해도, 진법 안에 있으면 내공 운용에 제약을 받는다. 하면 저 녀석에겐 진법이 통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진법의 허점을 발견하고 그 틈을 비집을 수는 있다.

광륜멸겁진은 쉬이 만들 수 있는 진법이 아니다.

칠장로가 무려 보름 가까이 밤을 새우며 구축한 게 아니던가.

하니 분명 틈이 있을 수도 있다.

저놈이 그 틈을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음.’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광륜멸겁진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엄청난 놈이라는 거니까.’

삼장로는 한발짝 다가섰다.

어차피 이번 계획을 세울 때, 그들이 상대하기 힘든 고수도 올 수 있다는 건 가정하지 않았나.

삼장로는 누가와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천무백이 광륜멸겁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예상 외였지만, 그래도 그뿐이다.

‘이제 갓 명성을 얻은 후기지수일 뿐.’

한 배분 차이만 나도 도저히 이겨내기 힘든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 어찌어찌 한배분의 차이는 이겨낼지도 모른다. 갖은 영약과 수련이 더해진다면.

하지만 두 배분에 가까운 차이는 메꿀 수가 없다.

그 기간에 녹아든 경험이란 영약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죽었다고 복창하라고?”

천무백은 그저 무심하게 삼장로를 응시했다.

“무슨 수를 써서 진법을 벗어났는지는 모르겠다만, 여기는 하남이 아니다. 애송아. 너희 촌동네서 칼질 좀 한다고, 강호에서 똑같은 줄 알더냐?”

“지랄.”

“······뭐?”

“너희들 특징은 싸우기 전에 말이 많은 거냐? 기루 찾아온 구진해나 육성이나 하나 같이 다 똑같네.”

“이놈!”

“야.”

천무백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순간 기세 좋게 나섰던 삼장로의 입이 굳게 닫혔다.

천무백이 검을 바닥을 향한 채 내리고, 한걸음 다가오자 거센 압박감이 짓눌렀다.

“싸울거면, 입 닫고 싸우자. 응?”

천무백이 칼끝을 까딱였다.

“덤벼. 능허보다 못한 놈아.”

역설적으로 삼장로는 그 말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빈틈투성이다!’

검을 비스듬히 내린 자세.

오른손 역시 한쪽에 축 늘어졌을 뿐 무슨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봐도 싸움을 앞둔 무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삼장로의 눈에는 빈틈이 훤히 보였다. 한데 삼장로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미소를 본 삼장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생각이 많아지지?”

“······.”

맞다.

생각이 많아졌다.

그냥 당장 빈틈을 향해 검을 쑤셔 넣으면 그만인데.

명백하지 않은가. 그래, 저게 함정이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빈틈을 쑤시고, 역공을 당하면 피하거나 막으면 그만 아닌가.

“저 새끼가 왜 저렇게 대놓고 공간을 열어주나 싶지? 뭔가 있나 싶지? 비수를 숨기고 있나 께름칙하지?”

삼장로가 입술을 깨물었다.

천무백의 조롱기 가득 찬 목소리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의심스러웠다.

천룡검협이란 명성, 육성과 구진해를 죽인 실력, 광륜멸겁진이 통하지 않는 특이점.

그 모든 요소를 생각하면 지금 빈틈투성이의 상태가 오히려 빈틈이 하나도 없이 느껴졌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비수처럼 천무백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귓가에 박혔다.

“그게 바로, 겁에 질린거야.”

“······!”

겁에 질렸다고? 내가?

“겁먹어서, 감히 못 덤비는 것이거든.”

삼장로는 이를 악물었다.

그랬다.

원래라면, 망설임 없이 살수를 뿌렸으리라.

그것이 그가 살아온 강호였다.

한데 삼장로는 머뭇거렸다. 천무백을 보고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그것이 상대에게 겁에 질린 모습으로 보였다.

‘개소리!’

삼장로의 눈이 벌게졌다.

숱한 아수라장을 헤쳐나온 이가 바로 그였다.

고오오오!

삼장로의 피풍의가 거칠게 펄럭거렸다. 그의 주위로 마기가 휘몰아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호흡 한번에 전신의 근육이 살아있는 것처럼 깨어난다.

그는 무표정한 천무백을 보며 일갈했다.

“귀면수라(鬼面修羅) 용막이 본좌다! 감히 고작 최근 얻은 명성으로 헛된 입만 놀리느냐!”

“……!”

“귀면수라!”

삼장로, 그러니까 용막이 본인의 정체를 밝히자 상황을 지켜보던 중인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귀면수라라면…….”

“이십 년 전 청성파의 장로 세 명을 죽여 공적으로 몰린 이가 아니오?”

“이럴 수가! 귀면수라라니!”

이거였다.

놀라움, 경악, 그리고 두려움.

귀면수라라는 네글자에 중인들의 반응을 보라.

겁에 질린 건 자신이 아니다. 바로 저들이다.

귀면수라는 의기양양하게 천무백을 바라봤다.

“자기소개 하냐? 천무백이다.”

하지만 천무백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귀면수라라는 네글자에 천무백은 단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쯤 되면 귀면수라는 한 번 더 생각했어야 했다.

싸움에 앞서 침착함과 평점함을 유지한다는 건 절대로 경시할 수 없다는 적이란 얘기니까.

하지만 귀면수라는 천무백의 말에 평정심이 깨졌다.

그는 끝내 눈을 뒤집으며 천무백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후웅!

‘빈틈! 단숨에 찌른다!’

보통의 검보단 마치 꼬챙이를 연상시키는 가느다란 검은 일반적인 장검보다 두 치는 더 길었다.

검이 파공성을 내며 천무백의 명치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쒜애애액!

피육을 꿰뚫어야 할 검은 공간을 갈랐다.

검이 도달하기 직전, 천무백의 신형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사라졌다.

‘피했어?’

이걸 피했다고?

순간 귀면수라의 머릿속에 찬물을 뒤집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하지만 귀면수라는 검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과연 숱한 경험을 겪어온 관록이었다.

‘왼쪽!’

가장 빨리 찌를 수 있는 지점.

쒜애애애액!

새빨갛게 검기로 달궈진 검끝이 무서운 속도로 천무백의 어깨를 찔렀다.

‘어디로……!’

귀면수라의 눈이 부릅떠졌다.

천무백의 신형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사라졌다. 이번에는 어디로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피했다는 게 맹점이 아니다.

귀면수라는 극도로 빠른 쾌검(快劍)이 장기다. 그런 그도 몇 번이고 그의 칼을 피하는 강자를 숱하게 만나왔다. 피하는 건 놀라운 일이어도 충격적인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충격적인 점은 천무백의 신형이 ‘사라졌다’라는 얘기다.

‘온몸을 늘어뜨린 자세다. 사람인 이상 다음 동작을 위해선 준비 자세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이건 말도 안 된다.

아무런 준비 자세도 없이 귀면수라의 검을 피했다고?

그리고 어디로 피하지도 못 봤다고?

더 우스운 건, 상대는 반격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하고, 반격한다.

이것이 싸움의 기본이 아니던가.

하면 상대는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는 얘기.

“네 이노오옴!”

귀면수라의 입에서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쒜애액! 쒜애액!

지독한 살기가 담긴 살검(煞劍)이 공간을 갈랐다.

빠르게, 더 빠르게.

귀면수라는 단전의 내공을 쏟아붓고 근육이 찢어질 때까지 극도로 빠른 찌르기를 계속했다.

하나 그때마다 찌르기는 매번 천무백의 흐릿한 신형만 갈랐을 뿐이다.

‘도대체, 어째서? 어떻게?’

머릿속에서 마구 떠오르는 의문.

상식으로 불가능이다.

어떻게 한번을 못 맞추고 다 피하나? 상대가 그만큼 빠른가? 아니다. 빠르다기보단……마치 사라진다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귀면수라는 천무백의 발을 봤다.

“……떠 있어?”

약 한 치 정도 떠 있었다.

“말도 안되는……!”

귀면수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랬다. 천무백은 땅에 발을 대고 보법을 밟고 있는 게 아니라, 뜬 상태로 보법을 밟고 있었다.

‘허공답보?’

저 애송이가, 허공답보를 펼친다고?

하나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그건 허공답보가 아니었다. 경공술에 속하는 허공답보와는 달리, 천무백은 좁은 범위에서 보법을 밟고 있었다.

불현듯 귀면수라의 머릿속에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정마대전 당시.

하급 마졸에 불과하던 그의 눈에 겁에 질린 채, 패배하고 돌아온 마인들이 중얼거렸었다.

‘사람이 아니야. 하늘에서. 하늘에서 보법을 밟고 자유자재로 검을 휘두른다고!’

믿지 않았다. 한데 눈에 보였다. 비록 하늘에서 보법을 밟은 게 아니지만, 한 치 정도 위에 뜬 채 보법을 밟고 있는 이.

귀면수라의 눈이 부릅떠졌다.

‘창천……검신?’

* * *

천무백은 웃었다.

비록 전생보다 부족하지만, 그는 점차 과거의 무위를 되찾고 있었다.

‘건곤창응보(乾坤蒼鷹步).’

창천검신하면 떠올리는 대표적 무공 중 하나다.

귀곡광애라는 호신강기와 바로 건곤창응보.

지상에서 보법을 밟는 게 아니라 허공을 밟는 보법.

이 두가지는 천무백이 비단 한번의 삶이 아니라, 숱한 전생을 거듭하며 완성해낸 무공이다.

수백년의 경험과 노력, 그리고 깨달음이 고스란히 들어간 무공의 정수였다.

그리고 지금의 천무백은.

‘비록 미약하나 가능하군.’

짜릿한 고양감이 혈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토록 허약한 몸뚱이에서 차츰 과거의 무위를 되찾아나가는 과정.

천무백은 웃었다.

“놀랍더냐?”

“이이익!”

귀면수라는 방향을 바꿨다. 남은 내력을 끌어모았다. 근육이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하반신을 노린 채 찌르기가 쏟아졌다.

‘느려’

상단전의 특성 중 하나.

감각의 확장.

오감을 넘어서 미지의 육감까지 근접한 천무백의 감각은 귀면수라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그건 동체시력이라고 표현하기 힘든, 특별한 영역의 감각이었다.

‘됐다. 이제는 더 볼 것도 없군.’

피하지 않았다. 비스듬히 내린 검이 서서히 올라왔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천무백의 검이 곧추섰다.

천무백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천연격(破天連擊)을 잘못 익혔군.”

순간 귀면수라의 시간과 사고가 정지됐다.

‘어떻게?’

자신의 무공인 파천연격을 알아본단 말인가?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어?’

천무백의 검이 하나, 둘, 점점 늘어났다.

채채채채챙!

힘차게 나아가던 귀면수라의 검은 연이은 충격에 힘을 잃고 손아귀에서 멀리 날아갔다.

‘이 무슨…….’

허공을 가득 메우는 무수한 검 끝. 그것들은 점점 많아지더니 이내 하나의 점처럼 보였다.

그리고 세상이 점점 붉게 물들어졌다.

“이게 파천연격이다.”

푹, 푹, 푹, 푹……

네 번, 다섯 번, 아니 수십, 수백번.

전신에 구멍이 뚫렸다. 피할 새도 없이 극도로 빠른 찌르기에.

귀면수라의 눈이 경악과 그리고 감격으로 번졌다.

그가 꼭 대성 하고 싶어 했던 무공의 끝.

‘이게……파천연격……!’

애석하게도 그것이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쿵!

수백개의 구멍이 뚫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귀면수라의 시신이 바닥을 뒹굴었다.

깊게 가라앉은 천무백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그냥 한꺼번에 덤벼. 이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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