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57화 (57/318)

<검신재생 57화>

57. 뒤지게 패고 싶다.

“전진교? 그거 사라진 지 족히 300년은 되지 않았나? 그곳의 성단이란 말입니까?”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겁니까?”

순간 천무백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이렇게 멍청한 놈이 아닌데?’

천무백이 능허를 보고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능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장난친 게 아니었다.

능허는 전진성단이란 이름에 그렇게 대단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깐. 하기야…… 전진교가 사라진지 꽤 됐지?’

300년은 넘었고, 그 전부터 세력이 약해져서 차츰 잊혀졌으니까.

모를 법도 하네.

천무백은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

그 시대를 살았던 천무백에게 전진교란 이름은 절대 경시할 이름이 아니었다.

중원 도학의 정통이지 않았는가.

하나 현시대를 사는 능허 같은 이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강호에서 사라진 문파.

강자생존의 강호였으니, 사라졌다는 건 결국 약해서 도태됐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러니 전진교란 이름은 잊혔고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그저 강호 역사에 무수히 많이 생기고 사라진 문파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군. 그래서 그런 건가?’

천무백은 그제야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 통쾌하게 설명된 느낌이었다.

‘전진성단만으로 무림인들을 유혹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거지.’

천무백의 의문은 바로 그거였다.

왜 굳이 있지도 않은 적혈검귀의 장보도인 마냥 꾸며낸 것일까?

전진성단이라면 충분히 대단한 발견이 분명할 텐데.

잊힌 전진교보단, 강호 역사에 뚜렷하게 당대 최고 고수 중 하나로 이름을 남긴 적혈검귀의 비급이 무림인들의 욕망을 더 자극했으리라.

그 시대를 살았던 천무백과 현시대를 살아가는 강호인들 사이의 괴리감이었다.

‘하면 이해가 되는군.’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오히려 천무백에겐 더없이 고마웠다.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전진성단을 찾았다.

애당초 적혈검귀의 장보도라는 헛소문이 퍼지지 않았다면, 천무백은 굳이 이곳을 찾지 않았으리라.

더구나 지금 전진성단이란 이름의 중요성을 느끼는 건 바로 천무백 뿐이지 않은가?

‘화산이나 종남이 알면 달려들 수도 있겠지.’

화산이나 종남 모두 도가문파로, 전진교의 맥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바가 있다.

‘그거야 뭐 그쪽 사정이고.’

전진성단이라면, 당장 천무백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가령 전진교의 성물이라거나.

‘그런 것들 중 하나만 제대로 보관되어 있다면…….’

천무백은 눈을 빛냈다.

도가의 내공심법과 불가의 내공심법으로 경천혼공은 더 크게 발전됐다.

거기에 전진교의 성물이나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면?

‘경천혼공을 더 크게 확장하거나, 다르게 이용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면 천무백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 이미 약선이 대환단을 이용한 영약을 복용한 이후 내공의 총량은 비약적으로 늘어난 상태.

이제는 활용법의 다각화를 모색할 때였다.

전진교의 성물이라면, 충분히 큰 도움이 되리라.

“뭐, 전진성단이란 게 대단하면 주군은 왜 갑자기 기척을 죽인 겁니까? 작전상 후퇴는 뭐고. 당장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있는 줄 알고?”

“……?”

천무백이 손가락으로 귀총이란 글자를 가리켰다.

“어때 보여?”

“음, 제법 필체에 힘이 있고…… 에이. 대체 뭘 말하려는 거요?”

“뒤에 새겨진 글자하고 다르다.”

단순한 필체가 다르다는 사실만 뜻하는 게 아니다.

“뒤에 글자가 시간이 흘러 지워질 정돈데, 이건 아주 선명해.”

천무백의 눈이 반짝였다.

능허는 그제야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얜 유난히 선명하네.”

“다른 시기에 새겨진 글자란 얘기지.”

천무백이 가장 먼저 귀총을 발견하고도 작전상 후퇴를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누군가 적혈검귀의 장보도를 조작해서 무림인들을 끌어모았다.

전진성단이란 이름값으론 끌어모으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전진성단을 귀총이라 거짓으로 꾸며냈다.

결국, 이 모든 건…….

“함정이라는 거네. 시발 거.”

능허가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문제는 무림인들을 싹 다 모아서 무얼 하려는 건데.’

귀총이란 글자는 검으로 남긴 흔적이었다.

‘제법이란 말이지.’

손으로 입구를 이루는 금속을 몇 번 두들겨봤다.

제법 탄성과 강도가 대단했다.

그런 금속에 검흔을 남겼다.

‘깊이가 일정하고, 파인 부분이 매끄러워. 한마디로 한 번에 새겼다는 거야.’

조각사들이 정으로 여러 번 내리쳐 음각을 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단 한 번에 새긴 글자다.

깊이도 일정했고 매끈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금속을 베려면 충분한 검기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즉 내력을 완벽히 조절할 줄 아는 엄청난 내가고수여야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획은 일정했으나 힘이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검 또한 수준급이란 얘기다.

‘함정을 파 놓은 놈이 강한 놈이라는 거지.’

하기야. 이 정도는 되어야 무림인들을 다 끌어모으는 함정을 팔 생각을 하지.

“젠장. 함정으로 먼저 기어갈 필요는 없다는 얘기네. 그죠?”

천무백은 우선 관망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곳이 전진성단이라면.

‘빨리 간다고 해서 차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능허가 다소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망?”

“함정인거 뻔히 알고 들어간다고요?”

“어떤 함정인지 궁금하잖아?”

능허는 천무백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보고 잠시 심호흡했다.

‘뒤지게 패고 싶다. 진짜.’

내 동생이었으면 아주 다리몽둥이를 그냥.

하나 그 모든 건 그저 망상에 불과했다. 능허는 체념한 얼굴로 천무백의 뒤를 따랐다.

* * *

끄아아악!

또 한 번의 비명이 석굴을 울렸다.

석굴의 구조 때문인지 소리는 바깥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다. 사방팔방에서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듯 끊임없이 울렸다.

메아리가 친다는 건 곧 석굴이 틈 없이 모두 막혔단 얘기다.

메아리칠 때마다 석굴을 달리는 무인들에게 심리적 압박감은 더해졌다.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매화일검 국보가 소리치자 청현진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살다 살다 이런 곳은 처음 보는구나.”

청현진인도 끊임없이 도호를 외웠다.

그렇지 않다면 그 역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으리라.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

화산파는 비교적 조심스럽게 귀총에 들어왔다. 처음엔 특별한 게 없었다.

문제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제 무덤을 미로로 만드는 놈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으음!”

“적혈검귀 그자는 분명 미친놈이 맞아요. 괜히 검에 미친 귀신이란 별호가 붙은 게 아닙니다.”

아직은 어린 국보가 성난 소리를 내뱉었지만, 청현진인도 차마 그 말을 부정 못 했다.

귀총의 구조는 미로였다. 그것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독한 미로.

물론 단순한 미로라면 청현진인 정도 되는 고수는 충분히 돌파할 수 있다.

문제는 같이 들어온 무림인들 때문이다.

미로는 가다 보면 한 번씩 마주치는 구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칼부림이 한 번씩은 반드시 일어났다. 적혈검귀의 장보도란 글자에 눈이 벌게진 무인들은 사리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니까.

개인으로 들어온 몇몇 무림인들은 연합을 형성했고 화산과 종남에 대항했다.

이쯤 되자 청현진인과 화산 제자들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마주칠 때마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미로가 어디 있답니까.”

국보가 다시 성을 냈다.

“내공을 아껴라.”

청현진인은 처음엔 벽을 부수면서 돌파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벽은 생각보다 두꺼웠고, 하나씩 뚫어낼 때마다 적잖은 내공을 소모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렇게 해도 다음 벽이 또 있다는 사실이다.

“지랄 맞게 넓습니다.”

“어허!”

“……무량수불.”

국보가 급히 도호를 외웠다.

하나 청현진인도 욕지기가 치솟는 걸 억지로 참았다.

미로는 너무 광범위했고 끝이 없었다.

벽을 뚫어도 또 벽이 나오니 심리적으로 지쳤다. 그렇다고 내공을 계속 소모하기엔 적이 많다.

이류나 삼류들의 연합은 문제없다.

하나 무성적마나 호성노괴, 관성검은 청현진인도 쉬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일 터.

극적인 순간에 그들을 만났을 때 내공이 부족하다면 그런 낭패가 없으리라.

‘이런 장보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미로를 달리면서도 청현진인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본래 장보도라하면 당연히 위험한 함정이 곳곳에 도사린다.

장보도를 남길 고수들은 보통 괴팍한 놈들이 많다. 제자나 가족이 아닌 무림에 장보도를 남기는 것이니, 얼마나 괴팍하겠는가. 또 그걸 숨겨놓는다면 더 그렇다.

한마디로 실력만큼 성격도 지랄 맞은 놈들이다.

문헌 속 적혈검귀도 만만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검에 미친 귀신이란 별호는 둘째치고, 그는 정사지간의 무인으로 적으로 만나면 정파든 마도든 닥치는 대로 베었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잔혹하게 상대를 단칼에 베는지, 늘 붉은 빛에 젖어 있다고 하여 적혈검귀가 아니겠는가.

그런 이의 장보도라 하니 각오하고 들어왔다만…….

‘기관진식 따위도 없고 함정도 없다. 오로지 미로, 또 미로다.’

청현진인 같은 고수도, 깊게 수련한 도인인 그도 심리적으로 지쳐가고 있다.

‘더구나 기파를 이용해 길을 찾기도 쉽지가 않구나.’

기감을 넓게 퍼뜨려 벽에 부딪히는 기파를 이용하면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나 이 미로는 이상하게도 그게 통하지 않았다.

“모두 심지를 굳게 하라. 그저 앞으로 정진한다.”

청현진인은 스스로 각오하듯 중얼거리고 다시 묵묵히 앞서 걸었다.

* * *

“난리도 아니네요.”

“이놈들 미로를 못 벗어나? 절정고수들 맞나?”

천무백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로서는 쉬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일류 이상, 적어도 절정쯤 되면 미로 따위는 우습게 돌파하는 게 내가고수들이다.

한데 천무백은 먼저 들어간 놈들이 미로에서 헤매는 모습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능허야.”

“네.”

“약값 좀 해라.”

“약값이요?”

“소림에서 영약 잔뜩 처먹었잖냐. 기감 넓게 퍼뜨려서 벽에 막히는지 확인해 봐.”

“그거 하면 저 단전 텅텅 비는데요?”

“머리도 텅텅 비었는데 단전도 텅텅 비는 게 뭐가 문젠데.”

“……지가 영약 준 것도 아니면서.”

“영약 뱉을래? 아니면 할래?”

천무백의 살벌한 말에 능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쯤 제 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죠,”

능허는 천무백 덕택에 소림에서 제법 영약을 꽤 얻어먹었다.

하여 능허는 일전보다 월등히 단전이 탄탄해지고 내력이 깊어졌다.

“으음.”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능허는 미간을 좁혔다.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요?”

“뭐가.”

“글쎄요. 내가 내력이 약해서 그런가. 뭔가 뚫린 느낌이 하나도 없고 다 막힌 거 같은데?”

천무백은 알겠다는 듯 상단전을 개방했다.

웅웅웅웅.

‘확실히…… 뭔가 인위적인 내기는 안 통한다는 건가?’

자연기가 아닌 사람이 단련한 내기는 무언가 억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나 천무백의 경천혼공이 본격적으로 운용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웅웅웅.

천무백은 경천혼공을 이용해 외기를 넓게 감지하고 퍼뜨렸다.

‘확실히 조금 다른 느낌이군.’

천무백의 경천혼공도 무언가 억제당하는 기분이건만, 다른 이들의 내기는 더 심하리라.

천무백은 그런데도 열린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방향을 대충 가늠한 천무백은 곧장 움직였다.

“일단 미로부터 벗어나자.”

길은 제법 멀었다. 미로는 일반적인 방향감각으론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천무백도 경천혼공을 계속 운용해야 할 정도였다.

천무백이 신중하게 움직이자 능허는 말없이 그를 따랐다.

‘이 정도로 미로를 꼬아 놓은 이유가 뭐지? 아무런 함정이나 기관진식도 없이. 미로에 갇혀 죽으라는 건가?’

이걸 만든 의도가 분명 있을 터.

천무백은 한층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어?”

능허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게 왜 그냥 뽑히지?”

천무백이 고개를 돌렸다. 능허가 살짝 얼빠진 얼굴로 석벽에 박혀 있던 구조물을 손에 들고 있었다.

순간 천무백이 넓게 퍼뜨린 기감이 요동쳤다.

쿠구구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이 작게 흔들렸다.

“어…… 주군.”

“…….”

“지금 저 큰일 난거죠?”

능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발바닥에서부터 전해지는 진동은 둘째 치고, 자신을 쳐다보는 천무백의 눈이 번들거렸다.

쿠구구구구궁!

이윽고 더 커진 소리와 거세진 진동.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것 마냥 거센 진동에 천무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땅이 돌았다. 빙빙 돌았다. 미로를 이루던 벽이 가라앉고, 다시 솟구쳤다.

완벽한 길로 직행하던 천무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로가 바뀌었다.

그리고…….

쿠구구궁!

“끄아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숱한 기관진식.

“야 너 뭐 건드렸냐.”

“헤…하하. 그, 글쎄요.”

어찌할 줄 모르는 능허를 보며 천무백은 진심을 내뱉었다.

“뒤지게 패고 싶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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