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56화>
56. 작전상 후퇴
‘저 새낀 또 누구야?’
무성적마(無聲赤魔)는 입을 떡 벌렸다.
귀총을 쫓아 여기까지 왔건만 예상치 못한 경쟁자가 또 등장했다.
‘호성노괴가 저리도 쉽게 나가떨어지다니!’
호성노괴는 자신도 쉬이 상대하기 힘든 상대다. 한데 어디선가 나타난 낯선 사내에게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그는 다시 방금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검총이 발견됐단 소식에 가장 먼저 뛰어간 호성노괴다.
성급한 성격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성격은 급하더라도 실력은 진짜배기였다. 단숨에 주위를 둘러싼 무림인들을 한줌 핏물로 만들지 않았는가.
문제는 다음이었다.
‘보지 못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무성적마는 애석하게도 보지 못했다. 호성노괴가 어떻게 나가떨어졌는지.
그건 공방도 아니라 그저 단 일격에 아무 힘도 못 쓰고 처박혔단 의미다.
전신의 근육이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니다. 호성노괴가 갑자기 기습을 당했을 뿐이다. 저 어린놈이 호성노괴보다 최소한 한두 수 더 강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무성적마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애써 부정했다.
‘적혈검귀의 비급은 내가 가져가야 한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천무백을 노려봤다.
“음!”
관성검(關聖劍)은 코를 찡긋하며 천무백을 바라봤다.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그는 목덜미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도대체 뭐란 말인가?’
촉한의 명장 관우의 방계, 아주 먼 후손인 관성검은 예의 그 후손임을 증명하듯 얼굴이 붉었다.
하나 평소보다 그의 얼굴은 더 붉게 달아올랐다.
그건 특별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었다.
호기심과 타고 오르는 호승심.
‘호성노괴의 조공(爪功)은 자칫하면 단 일격에 심장이 뜯겨 나갈 정도인데…….’
관성검은 며칠 전 호성노괴와 하오문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부딪쳐 본 호성노괴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물론 관성검은 일대일의 대결이었으면 능히 이겨 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자신이 한 수 더 위였다. 다만 그사이에 무성적마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난 저 청년처럼 단 한 수로 쓰러뜨릴 수 있는가?’
관성검은 저도 모르게 검집을 꽉 쥐었다.
핏줄이 손등 위로 우둘투둘 올라왔다.
전신에 긴장감이 팽배했다.
무성적마와는 달리 그는 천무백의 움직임을 희미하지만 놓치지 않았다.
‘호성노괴는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았어. 공격당하는 순간 조공을 펼쳤다.’
한데 호성노괴의 반격은 저 빛무리에 삼켜졌다.
그리고 눈을 깜빡 감았다 뜨니 호성노괴는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후우. 과연 강호는 넓다더니…….’
관성검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천무백을 주시했다.
“누구냐?”
“혹시 천룡검협이 아닌지.”
종남파 종남풍검(終南風劍) 전현은 우뚝 멈춰섰다.
“천룡검협? 소림에 나타난 기재 말이냐? 아니, 그 녀석이 왜 여길?”
“적혈검귀의 소식을 들은 게 아닐지요.”
“젠장. 천룡검협이라…….”
전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종남파도 천룡검협에 대한 소식은 들었다.
전현은 힐끔 저 멀리 화산파 무인들을 살펴봤다.
안력을 돋구니 수십 장 거리를 꿰뚫어 선명한 광경이 펼쳐졌다.
‘화산 놈들도 당황해하는군.’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호성노괴한테 본인이 질 리는 없다만, 상대하려면 종남풍검 본인도 꽤 각오하고 시간이 걸릴 터.
그런 자를 아무리 기습이라도 순식간에 무너뜨렸으니…….
‘천룡검협에 대한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소림을 구한 실력자.
정마대전 이래 최고의 신진고수.
‘화산의 화산일검 국보와 남궁세가의 대공자, 그리고 중경의 투귀가 다음 강호를 이끌어갈 후기지수로 꼽혔거늘, 단숨에 그들의 명성을 뛰어넘었지.’
전현은 입을 다물었다.
전현의 위치는 조금 애매한 편이다.
장로직에 있지만 그건 실력과 사제 관계 때문이다. 대장로가 제자로 거뒀기에 그는 일대제자들 보다 배분이 한 단계 높았다.
그만큼 실력과 재능은 증명됐다.
단숨에 일대제자들 중에 수위를 차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분 덕택에 장로 자리에 오르게 됐다.
하여 그는 후기지수로 뽑히기에는 모호한 위치가 됐다. 실제 나이는 이십대 후반이었으니 후기지수가 맞긴 했다만…….
그는 내심 본인이 후기지수로 안 묶이는 게 만족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후기지수들에 대한 경계가 강했다.
앙숙인 화산의 대제자인 매화일검과 검으로 천하를 다투는 남궁세가의 대공자는 확실히 경계의 인물이었다.
그런 와중에 천룡검협이 나타났다.
‘하물며 적혈검귀의 비급을 빼앗긴다면…….’
그의 눈이 붉어졌다.
“간다! 화산도, 저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르는 천룡검협이란 작자도,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먼저 비급을 차지하고 우뚝 서야 한다!”
종남파가 움직였다.
* * *
깡! 까앙!
“와! 손목 떨어져 나가겠네! 여깁니다!”
능허가 손목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나름 검기가 실린 검이다. 어느 정도 철이라면 완벽하게 베진 못해도 때리다가 박힐 수는 있다.
한데 튕겨 나왔다. 안에 무언가 있다는 거다.
“비켜라, 능허야!”
천무백이 거침없이 검을 뽑았다.
검신을 타고 쏟아져 나온 내력이 갑자기 쏟아지는 급류처럼 거칠게 요동쳤다.
쿠구구구구!
“와. 미쳤네.”
능허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천무백은 보통 싸울 때 다른 무인들처럼 검기를 줄줄 흘리지 않았다.
검기는 무인들에게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파괴성이었다.
내력을 담아 외부로 방출해 내는 힘.
사실상 절정과 일류를 나누는 가장 보기 쉬운 증거였다.
능허는 자신도 검기를 미약하게나마 담을 수 있지만, 천무백이 평소 검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당연하다.
천무백에게 있어 검기는 과유불급 그 자체였다.
검기를 줄줄 흘리는 게 아니라 검신 안으로 집중하고, 압축하여 절대적으로 효울된 방식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
그게 평소 천무백의 지론이었다.
한데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이 양반, 나 빼고 산삼이고 뭐고 온갖 영약 다 처먹은 게 분명해!’
능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커다란 언덕이 천무백의 검기에 두부가 베이듯 한 움큼씩 깎여 나갔다.
쿠구구구구!
고작 몇 번의 검기가 휘둘러졌을까.
언덕을 메우던 흙과 돌은 모조리 부서지거나 사라졌다. 그 밑으로 텅 빈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장한 사내 다섯 명이 나열해도 동시에 들어갈 만한 구덩이가 생긴 것이다.
“주군!”
“들어가자!”
느껴졌다. 묘한 기류가.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공기는 습기에 가득 찼지만, 천무백은 다른 걸 느꼈다.
경천혼공이 반응할 정도로 자연기가 풍부했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망설이지 않고 구덩이 안으로 몸을 던졌다.
“……!”
은은한 빛이 공간을 밝혔다.
야명주(夜明珠)가 양쪽 벽에 박혀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양쪽 벽이 막힌 복도였다.
천무백은 내공을 눈에 집중에 안력을 돋궜다.
은은한 빛 너머로 커다란 입구가 보였다.
둥근 형태의 입구 위에 날카롭게 음각으로 파인 글자가 드러났다.
귀총(鬼塚)
“장보도가 진짜였네!”
능허는 입구에 드러난 이름에 탄식을 터뜨렸다.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에 욕심이 넘실거렸다. 장보도는 자신하고 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그도, 눈앞에 실체가 드러나자 절로 욕심이 생겼다.
천무백은 그런 욕심에 아랑곳 안 하고 입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입구를 응시했다.
“적혈검귀의 장보도다!”
“젠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가 보자고!”
구덩이 위에서 무림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해진 능허가 천무백을 재촉했다.
“아니, 안 들어갑니까?”
입구 너머는 지독할 정도로 빛 한 점 없었다.
마치 끝도 없는 지옥의 입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능허는 솔직히 말해 옆에 천무백이 없었으면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 했으리라.
그러나 천무백은 꿈쩍도 안 했다.
그저 가늘게 뜬 눈으로 입구에 새겨진 귀총이란 글자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하. 이제야 감이 좀 잡히네.’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유난히 가득 차게 느껴지는 자연기부터, 요 글자들까지.’
예상했던 바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예상한 게 완전히 맞아 떨어진다면.
‘제법 괜찮은 걸 얻을 수도 있겠구나.’
천무백은 곧장 능허에게 외쳤다.
“작전상 후퇴다.”
“네?”
“일찍 들어가 봤자 좋을 거 없어. 기척 죽이고 숨어.”
“아니. 갑자기 무슨…….”
능허는 황당해하면서도 천무백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는 곧장 야명주를 닥치는 대로 부쉈다.
콰득!
입구까지 향하는 복도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겼다.
천무백이 그 모습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기척만 죽이라니까.”
“내가 그 정도 할 줄 알았으면 자객질이나 하겠죠.”
“기척 숨겨라. 지금 그 정도면 아까 내가 한 방에 날려 보낸 노인네 정도면 충분히 눈치챌 거다.”
“아니, 여기서 기척을 어떻게 더 숨깁니까.”
“에휴. 한심한 놈.”
능허는 순간 울컥했다. 천무백의 어조는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눈치였으니까.
그때였다.
“앞이 하나도 안 보여!”
“저기다! 저기 입구가 있다!”
구덩이 안으로 속속 몸을 던진 무림인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귀총, 귀총, 귀총이라고 적혀 있어! 적혈검귀의 무덤이다!”
누군가 귀총이라고 외치자 상황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치달았다.
“비켜!”
순식간에 칼부림이 일어났다. 먼저 귀총 입구 안으로 달려드는 자와, 막는 자. 또 그걸 베어 넘기는 자.
어둠에 익숙해진 능허는 그 모든 걸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이 자식들, 장보도에 아주 미쳤구만?’
바로 벽에 붙어 있건만, 무림인들은 천무백과 능허를 보지도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한데 능허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함을 느꼈다.
대충 그저 그런 무인들이 눈치도 못 채고 지나가는 거야 그렇다 치자.
이어 등장한 만만치 않아 보이는 무인들도 그저 조심스럽게 지나갈 뿐이었다.
특히 호성노괴를 비롯해 등에 창을 메고 있는 붉은 수염의 무성적마와 허리춤에 큰 칼을 찬 관성검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종남파랑…… 어? 소림에서 본 그 화산 도사네?’
하물며 종남파 무인들과 화산파의 청현진인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제야 능허는 이유를 깨달았다.
‘설마?’
능허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사람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천무백이 기척을 내며 움직였다.
그제야 능허는 바로 자신 옆에 천무백이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본인의 기척뿐만 아니라 타인의 기척마저 숨겼다고?’
능허도 나름 기척을 죽이는 법을 알았지만, 그것도 수준 차이가 있다.
당장 지나간 화산파 제자 중 절반은 능허의 기척을 눈치챘으리라.
한데 그러지 않았다. 모두 그냥 낌새도 눈치 못 채고 지나갈 뿐이었다.
“혹시……내 기척 주군이 숨긴 거요?”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도 안 했다.
능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타인의 기척을 숨기는 사람이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세상에. 도대체 이 양반은 뭘 더 숨기고 있는 거야?’
매번 천무백에게 감탄을 느꼈지만, 능허는 이 순간만큼은 공포를 느꼈다.
“뭐, 별거 없다. 한번 시험해 봤는데 되네.”
경천혼공의 효능으로 외기를 어느 정도 조절할 줄 알기에, 천무백도 한번 시험해 봤다.
다행히도 꽤 성공적이었다.
“근데 왜 먼저 귀총에 들어가지 않고 관망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거 보이느냐.”
“응? 뭐, 너무 지워져서 좀 안 보이는데.”
능허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귀총이란 글자가 새겨진 뒤로 무언가 글자나 그림처럼 보이는 흔적이 언뜻 보였다.
이내 능허는 그것 중 몇 개는 글자임을 알아봤다.
“뭐라 쓰여 있는지 모르겠소.”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비웃음으로 받아들인 능허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나도 까막눈은 아닙니다. 몇 개는 대충 알겠는데, 몇 개는 획이 지워진 건지 처음 보는 글자란 말입니다.”
천무백은 이해했다. 현시점에서 이 지워진 글자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터다.
지금은 사라진 글자들이 몇 개 섞여 있었으니까.
물론, 여기 천무백은 그리 많지 않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천무백은 천천히 글자를 읽었다.
“전진성단(全眞聖壇)”
이제는 사라진 전진교의 성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