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55화>
55. 이건 내가 먹어야 해.
“귀총이라.”
“귀신의 무덤이라니. 참 이름 살벌하네.”
장보도를 해석하니 대충 이름이 나왔다.
귀총(鬼塚).
장보도에 따르면 적혈검귀가 남긴 모든 것이 있는 장소였다.
“근데. 해석이 이렇게나 쉬운 겁니까?”
“어렵진 않지.”
“아니, 난 봐도 모르겠는데.”
“네가 봤으니까.”
“썅.”
능허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지만,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장보도를 한번 해석해 보겠노라 나섰지만, 그는 채 반각도 지나기 전에 포기하고 말았다.
여러 기호와 상징들, 그리고 400년 전에 쓰였던 문자들이 뒤섞였기에 차마 해석할 수 없었다.
“나도 어렸을 때 어디 기재니, 영재가 낫니 했지만 이건 모르겠던데.”
“갈수록 뻔뻔해져.”
“뭐 주군만 하겠습니까. 주먹질 하고 정당하다는 식으로 뻔뻔하게 장보도 뺏어온 게 누군데.”
“네가 통뼈긴 한가보구나. 그새 또 기어오르는 걸 보니.”
“앗차, 임홍 분타주한테 혈사문에 대한 보고서 받아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가지고 오겠습니다.”
“뺀질거리는 것도 늘었네.”
천무백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장보도를 바라봤다.
장보도를 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다지 어려운 장보도는 아니긴 한데.”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적어도 기관도해나 진법에 밝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면 나흘 안에 충분히 풀어낼 만했다.
다만 천무백은 홀로 한 시진 만에 풀어냈지만.
“아무리 봐도 가짜는 아니란 말이야?”
한데 장보도를 해석한 천무백은 오히려 머릿속이 살짝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그저 잘 만들어진 모조품으로 여겼다.
적혈검귀의 장보도란 없으니까.
한데 장보도를 해석해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조품이 아니었다.
“이건 진짜야.”
진짜 장보도다.
“다만 적혈검귀의 장보도는 아니란 건데.”
물론이다.
천무백은 장보도 따위 남긴 적도 없고, 적혈검귀 시절엔 후인도 남긴 적이 없으니까.
어떤 무공도 남기지 않았고, 그가 쓰던 신병이기들도 모조리 전투 중에 싹다 부서지고 사라지지 않았던가.
“딴 사람의 장보도를 적혈검귀의 것이라 사기를 치는 건가. 아니면 진짜 이걸 적혈검귀의 거로 생각하고 퍼진 건가.”
이쯤 되자 천무백도 혼동이 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 하오문에서 온 보고서들입니다. 혈사문들 행적이구요. 이것들은 최근 장보도 관련 문서들입니다.”
능허는 잘 정리된 문서들을 보고 왔다.
사실 능허는 꽤 머리가 똑똑한 편이다.
흑도 무인 중에 글자 모르는 놈들이 많은 걸 고려하면, 문서를 보고 스스로 판단하여 정리할 정도인 능허의 수준이 꽤 특출 난 편이다.
“이것 봐라?”
옳지. 이거다.
보고서들을 조용히 읽어 내려가던 천무백의 눈이 반짝였다.
“능허야.”
“예.”
“아무래도 내가 장보도에 은 반냥을 매긴 게 정당한 값이었던 거 같다.”
“에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능허는 이제 대꾸하기도 힘들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천무백이 능허를 쳐다보며 똑바로 말했다.
“봐.”
“음? 이거 말입니까. 이게 왜요. 장보도가 더 발견돼서 무인들이 더 몰리고 있다는…… 아!”
“똑같은 장보도가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풀리고 있다? 이게 정상적으로 보이냐?”
“그러네요. 장보도가 원래 여러 장으로 발견됩니까?”
“그러는 예도 있긴 한데. 한 번에 동시에 발견되는 예는 없지.”
능허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 말은 누군가 장보도를 뿌리고 있다는 거네요?”
“맞아. 진품은 하나나 두 개쯤 되겠지. 내가 가진 거.”
“그게 진품입니까?”
“이게 가짜면 만든 놈은 나라에서 상 주고 장인으로 모셔가야 해.”
천무백의 단호한 말에 능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그걸 바탕으로 복제품을 만들어 내서 뿌린다면, 그걸 찾은 사람들은 가짜인 걸 알아채지 않겠습니까?”
“제법 눈썰미 좋은 양반들은 그렇지.”
“그럼 그게 효과가 있습니까? 또, 왜 가짜 장보도를 잔뜩 뿌려서 무인들을 모으냐고요.”
“일부러 이런 개판을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고.”
“개판이라. 자기가 혼자 먹기는 힘들어서 일부러 유포해서 개판으로 만들고 그 틈에 쟁취하겠다?”
“그럴 수도 있지.”
추론은 꽤 그럴듯했다.
강한 경쟁자 몇이 있으면, 그걸 뚫고 보물을 쟁취하긴 힘들다.
하여 아예 개판으로 만드는 것이다.
장보도를 마구 뿌려 절정부터 삼류까지.
온갖 무인들을 끌어모아 개판으로 만들어 버리면, 제아무리 강대한 고수라도 사람에 치여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다.
하지만 천무백은 그쪽이 아니라고 장담했다.
“혈사문 최근 움직임을 보면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다.”
하오문 섬서분타는 혈사문에게 아주 원한이 깊었다.
사업에 심각한 손해를 입혔으니까.
그래서인지 철저하게 혈사문 뒤를 캤는데, 의아한 움직임이 꽤 많았다.
“힘들게 기루나 뒷골목, 약방들을 장악해 놓고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고 있어.”
“그야 쫄려서겠죠.”
“쫄려서?”
“막말로 하남에서 주군이 다 깨부수고 다녔는데, 귓구멍에 안 들어갔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이미 섬서는 역병으로 개판 됐으니 철수한 것일 수도 있고요.”
“아냐. 장보도가 발견되었다는 시점부터 움직임이 묘해.”
천무백의 말대로였다. 시기가 겹쳤다.
“그러면 이 장보도를 뿌리는 게 혈사문이란 말이죠.”
“그래.”
그만큼 장보도가 무림인에게 주는 매력은 엄청났다.
더구나 천무백은 이것이 적혈검귀의 장보도가 아니라, 다른 인물의 장보도임을 알고 있다.
하니 한번 찾아볼 필요성이 생겼다.
“도대체 누구일까…….”
다시 한번 장보도를 유심히 살피던 천무백의 눈을 순간 휘둥그레 떴다.
“허. 이것 봐라……?”
장보도를 다시 해석해보니 뭔가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저 상징적인 그림으로 여기고 넘어갔던 일종의 기호.
하나 자세히 보니 기호가 아니라 글자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글자.
천무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능허야.”
“네?”
“장보도. 우리가 차지한다.”
“에? 그런 거 욕심내셨습니까?”
능허가 화들짝 놀랐다.
천무백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사문도 참으로 멍청하구나. 이게 어떤 장보도인지 몰라 적혈검귀의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다니.”
멍청한 것들.
이게 뭔지나 알고.
“가자. 전진교의 성물을 찾으러.”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 * *
“섬서에 이렇게 무인이 많았더냐.”
화산의 장로, 수호검 청현진인(淸顯眞人)은 주위를 둘러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곁에 있던 화산의 일대제자 중 후기지수로 이름이 드높은 매화일검(梅花一劍) 국보가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적혈검귀의 장보도가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확실치 않지 않으냐. 적혈검귀의 주 무대는 호북성이었다. 섬서성에서 적혈검귀가 묻힌 곳이 발견됐다니. 아무리 봐도…….”
“맞습니다. 이상합니다.”
청현진인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장보도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
생각이 좀 깊은 이라면 이게 흔한 상황은 아님을 깨달으리라.
심지어 화산에서 구한 장보도도 무언가의 복제품이 분명했다.
“이런 장보도에 정신이 팔릴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혈귀곡을 추적해야 하건만.”
청현진인은 한탄했다.
지금 중요한 일은 장보도 따위가 아니다. 화산이 고작 장보도에 정신이 팔릴 정도로 한가한가. 그도 아니다.
“정도무림이 다 함께 공조하여 추적하고 막아야 하는 법이거늘…….”
“그놈들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국보는 다소 이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청현진인은 그저 한숨이 나왔다.
바로 이것이다.
혈귀곡 놈들과 직접 싸워 본 청현진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차이.
청현진인은 화산에 돌아와 소림에 있었던 일을 역설하며 정도무림의 공조를 주장했지만,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다.
40년 전, 정마대전 이후 무림은 사실 평화를 유지해 왔다.
청현진인도 정마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그저 열 살 남짓한 아이였을 뿐이다.
하니 지금 무림을 이끌어 가는 이들은 정마대전을 겪지 못하고 40년의 평화를 누린 사람들이다.
당장 눈앞의 국보만 해도 큰 위기감을 못 느꼈다.
외려 매화단의 젊은 무인들은 호승심에 물들어 있었다.
“상대를 얕봐서 안 된다. 국보야. 우리 정도 무림이 지난 대전에서의 상처에서 회복하는 동안, 저놈들은 더 강해졌다.”
“음. 그렇군요.”
국보는 그리 대답했지만 수긍한 눈빛은 아니었다.
청현진인은 국보의 눈에 타오르는 열기를 보고 침음을 삼켰다.
“소림은 크게 당했으나 우리 화산은 다릅니다. 정마대전 당시의 세를 거의 회복했으니까요.”
“…….”
“놈들이 화산에 오면, 천룡검협 이상의 기재가 하남뿐이 아니라 화산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당당한 국보의 어조에 청현진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화산의 젊은 무인들은 오히려 걱정보단 호승심에 기꺼워했다.
국보가 매화일검으로 화산에서 자랑하는 후기지수지만, 기껏해야 흑도나 때려잡아 얻은 명성이다.
그들은 소림을 위기에서 구한 천룡검협에 감탄하면서도, 어느 정도 시기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보를 비롯한 후기지수들도 훌륭한 실력을 지녔고, 다만 기회가 오지 않아 이름을 떨치지 못했으니까. 국보는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천 공자를 후기지수라 볼 수 있는가?’
청현진인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천룡검협은 단지 후기지수로 재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것을 월등히 뛰어넘는 무력을 똑똑히 봤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불쑥 들었다.
천룡검협을 적절하게 질투해 오히려 호승심으로 국보가 더 발전할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마음을 가지게 될까 봐.
“그리고 적혈검귀의 장보도를 차지하는 것도 화산이 될 것입니다.”
국보는 자신 있게 말했다.
청현진인은 그저 침음성을 삼키며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화산과 비슷한 도인들이 검을 찬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사실 화산은 장보도의 사실 여부를 두고 의심하는 중이었다.
문제는 그러던 도중 종남파에서 장보도를 차지하겠노라 직접 움직였다.
장보도가 본래 그런 것이다.
강호에 나타난 장보도는 보통 백중 구십구는 거짓이다.
한데도 무림인들이 모여드는 건, 만약 저게 진짜라면? 불쑥 드는 생각 때문이다.
“종남파가 적혈검귀의 장보도를 차지하게 둘 순 없습니다. 역사에 남은 기록이 맞는다면, 적혈검귀의 무공을 익힌 것만으로 종남은 검파로서 우뚝 설 테니까요.”
종남파는 섬서성의 종남산에 본단을 두고 있다.
공교롭게도 화산과 종남, 둘 다 도가 문파다.
그리고 강호에 더 깊숙하게 개입된 이후에는 검파로서 명성을 떨쳤다.
둘의 관계는 비록 같은 정도무림이지만 앙숙이나 다름없었다.
화산은 청현진인의 뜻대로 혈귀곡 추적을 우선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종남이 아니라 화산이 장보도를 차지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미안하구려. 천 공자……그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도 중생들을 구명하고자 섬서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추적하고 있을 터인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눈이 벌게진 무림인들이 귀총으로 의심되는 지점을 마구 파헤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찾았다!”
누군가의 외침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청현진인이 재빠르게 종남파 무인들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들은 몸을 날리고 있었다.
“우리도 움직인다!”
청현지인과 화산 제자들도 도포를 펄럭이며 단숨에 공간을 뛰어넘었다.
“끄아아악!”
“으음!”
들려오는 비명에 청현진인이 침음을 삼켰다.
맨 처음 귀총의 입구에 가장 가까이 있던 무인이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강력한 일장에 절명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타난 건.
“호성노괴다!”
섬서에서 가장 무서운 고수 중 하나인 호성노괴가 피를 흩뿌리며 소리쳤다.
“다들 꺼져라! 장보도는 노부의 것이다! 노부의 곁에 오는 놈들은 모두 핏물로 만들어주마!”
기세 좋게 달려가던 종남파와 화산 무인들도 주춤했다.
호성노괴는 그들도 감히 경시할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잠깐 정적이 가라앉은 사이.
청현진인은 한숨을 내쉬며 한걸음 걸어 나갔다.
“내가 노괴를 상대하는 사이 국보야 먼저 움직이거라.”
“알겠습니다. 장로님.”
“자, 그럼…… 엇?”
그때 청현진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끄아아아아악!”
당당하던 호성노괴가 끔직한 비명을 내지르며 수십 장을 날아가 땅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지랄. 그게 왜 네 거야.”
새하얀 광채를 흩뿌리며 입구 앞에 서는 사내.
청현진인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한참 혈귀곡을 추적하고 있어야 할…….
‘천 공자가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