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54화>
54. 영업비밀
“와. 진짜 상대방이 다 불쌍하네.”
능허의 목소리였다.
천무백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새끼, 싸울 땐 멀찍이서 구경만하더니, 끝나니까 기어 나오는 것 봐라.”
“원래 태풍이 불 땐 몸을 사려야 하는 법이죠.”
“말이라도 못 하면.”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실컷 패놓고 대화로 하자니.”
능허의 말에 널브러져 있던 임홍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했다.
사실 대화부터 했으면 이렇게 될 일이 있겠는가.
더구나 싸움에서 지면 진 거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면 되지.
갑자기 구라 깐다고 실컷 패는 짓은 뭐란 말인가.
“안 때렸으면 대화를 했을 거 같냐?”
“나는 배울 대로 배웠소!”
사람을 무슨 때려야 말을 듣는 짐승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
임홍이 어처구니없어서 소리쳤지만 천무백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은 한 냥에 장보도 산다고 했잖아?”
설마?
그게 정상적인 대화라 여기는 건가?
임홍이 저도 모르게 곁에 선 능허를 바라봤다.
“와. 아주 거상 납셨네.”
능허도 질린 얼굴이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어찌 제대로 된 대화의 시작이고, 거래의 흥정이오? 장보도란 말이오. 그것도 적혈검귀의 장보도! 고작 은 한 냥의 가치라니!”
“은 반 냥.”
“아니 시발!”
“그게 내가 생각한 가장 적합한 가치다.”
천무백의 목소리가 퍽 진지했다.
실제로 그랬다.
적혈검귀의 장보도?
‘애당초 사기극인데 은한 냥이면 비싼 거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은 한 냥도 비싼 거 같아서 은 반냥까지 깎았다.
저 장보도는 진짜 장보도가 아니다. 가짜다. 가짜를 돈 주고 왜 사?
적혈검귀가 남긴 신병이기나 유산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장보도는 사기극에 불과하고 가치는 형편없을 수밖에.
“이거 적혈검귀 장보도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아오?”
“설명하려면 길다.”
임홍은 복잡한 눈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방금 전 겨뤄본 천무백의 실력은 진짜배기였다.
천룡검협이란 별호가 전혀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실력자의 말이니 허투루 여길 수도 없다.
‘내 눈이 틀렸단 말인가?’
임홍이 보기엔 가짜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러나 불쑥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난 그대의 원한을 산 적이 없소. 한데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에 날 구타…… 크흠, 왜 거칠게 대한 거요?”
“허.”
천무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럼 순순히 장보도를 넘겼을까?”
“…….”
“누굴 호구로 아나. 싸움에서 졌다고, 내기대로 한다고 순순히 장보도 넘겼을 거야? 정말?”
천무백의 말에 임홍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하오문 분타에 설치된 기관진식을 모를 줄 알아?”
그것까지 알고 있다고?
“막말로 이게 진짜 장보도면, 넌 이걸 한번 졌다고 공짜로 넘길 생각이었냐고. 대충 눈치 보다 기관진식 터뜨리고 냅다 튀었겠지.”
천무백의 말에 임홍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정곡을 찔렸다.
“하여간 하오문 이 새끼들. 사람 하나 호구로 잡는 건 아주 일도 아니에요. 그래놓고 우리는 정사지간이네,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말이야.”
그게 하오문이다.
하류 인생들이 모여 만든 문파다 보니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정사지간이라는 위치도 중요했다.
하오문이라면 수없이 전생을 살아오며 겪은 천무백이다.
신의를 바탕으로 하는 정보 집단이라기보단, 이익을 기본으로 움직이는 곳이다.
그들이 그저 내기 한번으로 장보도를 포기할 리가 있나.
“그러니 누굴 대화도 안 하고 주먹부터 휘두르는 상종 못 할 인간으로 취급해?”
……아니, 실제로 그랬잖아?
임홍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천무백이 손을 들어 올리는 걸 보고 움찔했다.
“그러니까, 내놔. 내기대로.”
“이게 정녕 가치가 없다면, 그리고 가짜라면 그대는 이걸 왜 원하는 것이오?”
“누가 나 갖고 사기 치는지 좀 궁금하거든.”
“나?”
“거 말 많네.”
천무백이 결국 때릴 듯 손을 들어 올리자 임홍은 허겁지겁 장보도를 내줬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능허가 감탄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주군.”
“왜.”
“내 40년 살면서 진짜 강호를 본 것 같습니다.”
“…….”
“이게 강호죠. 힘의 논리. 힘으로 빼앗고, 힘으로 짓밟고! 키야. 역시. 주군은 다릅니다.”
“어째 어조가 이상하다?”
“그럴 리가요. 저도 주군 곁에서 주군이 하는 짓 배워서 아주 제대로 써먹겠습니다!”
“능허야.”
“네.”
“너도 대화가 필요할 거 같다.”
“…….”
* * *
“임홍, 하오문 섬서 분타주.”
“맞소.”
“하남의 하기련을 아나?”
임홍이 멈칫했다 대답했다.
“……하남에서 벌이는 우리 사업이오.”
“하남에 영향력 확대하려고?”
“그렇소.”
“하오문에서 섬서 분타의 위치는?”
임홍은 입을 다물었다.
천무백이 대화를 하자는 의미가 이런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흡사.
‘취조잖아?’
하오문의 내부 정보를 캐내려는 건가?
도대체 정파의 인물이 왜?
하나 임홍은 일단 순순히 대답했다.
절대로, 절대로 저기서 뒤지게 처맞아서 몸도 못 가누는 능허를 보고 그런 건 아니었다.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 드오.”
“하남 분타의 수준은?”
“분타의 수준이랄 것도 없소. 하남엔 분타가 없으니까.”
“왜?”
“흑도들이 워낙 많으니 제대로 세 모으기가 힘드오.”
“사업이 겹쳐서 그렇군.”
“그리고 소림이 봉문한 이후 하남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흑도들의 싸움이야 그리 비싼 정보도 아니었고.”
천무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씩 웃었다.
“너희 문주 어딨어.”
“……말할 수 없소.”
“뭐, 그건 그렇겠지.”
천무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문파라도 문주의 정보에 대해 쉽게 발설할 리가 없다.
그것도 하오문 같이 정보 집단이면 더 그렇다. 천무백도 거기까지 순순히 답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더 패도 답은 하지 않으리라.
“그럼 문주한테 전해.”
“무얼 말이오?”
“협력하자고.”
“협력?”
“하기련에서 접촉해 온 연화루, 거기가 내꺼야.”
“……!”
“하남의 흑도 중에 가장 큰 흑심방? 그것도 내꺼야.”
임홍은 놀란 눈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아, 물론 우두머리는 저기 좀 부족해 보이는 얘지만.”
저 녀석이 우두머리고, 천룡검협이 진짜 주인이라고?
솔직히 쉬이 믿기지 않지만.
임홍은 거짓이라고 여기지도 못했다.
어차피 하오문의 정보력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을 것.
상대가 그것도 모르고 거짓을 말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떤 협력을 원하는 것이오?”
“강호 중원에 대한 하오문의 정보력.”
“……그쪽은?”
“하남에서의 하오문 이권 보장.”
“수지가 안 맞는 거 같은데?”
강호 전체의 정보력과 하남에서의 이권보장이라니.
값어치가 맞지 않는다.
“잘 생각해 봐. 당분간 혈사문 때문에 섬서 분타는 제 기능을 발휘 못 할 테니, 옆에 있는 하남에서의 정보와 이권이 작을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강호 전체의 정보와는 다르지.”
“흠. 암진혜검.”
“……!”
“이젠 좀 수지타산이 맞나?”
“그, 그걸 어찌?”
천무백이 씩 웃곤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무공의 요결이 흘러나왔다.
임홍은 격렬하게 경련했다.
암진혜검.
하오문이 살벌한 강호에서 살아남게 해 준 절세무공이었다.
“40년 전에 맥이 끊긴 걸 어떻게?”
암진혜검은 정마대전 당시 맥이 끊겼다.
‘거. 그 양반. 그래도 무공은 전수하고 갔어야지.’
천무백은 약간의 부채감을 느꼈다.
아마 정마대전 막바지였을 거다.
당시 창천검신이었던 천무백이 하오문주에게 마교의 행적을 추적해 달라 의뢰했으니까.
아마 그 이후로 맥이 끊긴 듯했다.
암진혜검이 비록 문주만 익히는 무공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 요체는 분타주들 정도라면 알고 있어야 했다.
한데 임홍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과거보다 훨씬 떨어진 하오문의 수준에 천무백은 약간의 부채감과 미안함을 느꼈다.
하니 적당한 거래가 아니겠는가.
“어때. 이제 좀 끌리지?”
“정녕…… 정녕 암진혜검이오?”
“내가 말해 준 요결을 문주한테 전해.”
“알겠소.”
“좋아. 거래된 거다. 하남성 관련된 얘기는 여기 이 친구하고 얘기하라고.”
“……얘기할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이오만.”
능허는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고 해롱거리고 있었다. 천무백이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걱정하지 마. 쟤 생각보다 통뼈야.”
“…….”
음.
방금 꿈틀거린 거 같은데.
임홍은 어쩐지 능허에게 안타까운 마음 반, 그리고 동질감 반을 느꼈다.
천무백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뭐, 문주에게 말하면 대충 얘기가 될 거야. 한데, 그 전에 정보 좀 구했으면 좋겠군. 암진혜결의 일부를 줬으니까, 그에 합당한 거래 대가로.”
“……좋소. 어떤 걸 원하오?”
“그쪽이 모은 섬서의 혈사문에 대한 모든 정보. 그리고 가능하다면 혈귀곡이란 단체까지.”
“혈사문?”
임홍은 고개를 모로 꺾다가, 조금 전 천무백이 ‘당분간 섬서 분타가 힘을 못 쓸 것’이라는 부분을 떠올렸다.
‘당분간?’
섬서 분타주라면 머리가 좋기 마련이다. 임홍은 눈치도 빨랐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천무백이 했던 여러 말들이 서로 겹쳐졌다.
‘가짜 장보도. 누군가의 사기극. 섬서성은 혈사문이 퍼뜨린 역병으로 혼란. 거기에 가짜 장보도로 더한 혼란이 발생. 무림인까지 얽혀 버리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게 혈사문 짓이라고?’
너무 과한 해석이 아닌가?
임홍은 저도 모르게 고갤 들어 천무백을 쳐다봤다. 대충 눈치챈 걸 알아챈 천무백은 몇 가지 더 알려줬다.
“적혈검귀가 몇 년 전 인물이지?”
“400년 전 당대 고수가 아니오?”
“하면 혈사문이 일전에 언제 나타났었는지 아나?”
“물론이오. 우리도 혈사문 때문에 고생이 많아서, 여기저기 알아봤지. 400년 전에…… 아!”
임홍이 눈을 크게 떴다.
400년 전, 혈사문은 고수 한 명에게 박살이 났다.
그것도 바로.
“적혈검귀!”
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하필 혈사문이 판을 치던 섬서성에서 적혈검귀의 장보도가 나타났다는 말이지.”
그제야 임홍은 장보도가 가짜일 확률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저 추측이 다 맞다면.
“혈사문이 지금 가짜 장보도로 섬서에서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 아니오?”
“뭐. 추측이지.”
하나 천무백의 반응을 보건대, 임홍은 천무백이 확신하고 있음을 알았다.
임홍은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모종의 일을 꾸민단 말인가?
그리고 이어지는 건 약간의 자괴감이었다.
‘하오문의 분타주면서,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장보도가 진짜라고 믿고 비싸게 팔아넘길 생각에 냉철하게 판단하지 못했다.
자고로 무림인라면 장보도가 늘 가짜일 염려는 하는 것이 당연하건만.
만일 그랬다면 천무백의 추측대로 어느 정도 이상한 점을 느꼈을 게 분명했다.
한데 그러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천무백이 경악스러웠다.
“대체…… 이것들을 그쪽이 어떻게 알고 있소?”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영업비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