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53화>
53. 대화부터 하자.
“여기까지 온 거면 여기가 어디인지 알 것 같은데……?”
“하오문 섬서 지부?”
“그걸 알아낸 것도 대단하오. 하면 내가 누군지 짐작 안 가오?”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표정은 퍽이나 이상했다. 마치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미련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 임홍은 울컥 무언가 치밀었다.
“치매는 아니시죠?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이가 많으신가.”
“이런 시발.”
“분타주 맞네. 분타주 정도면 욕이 기본적으로 걸쭉해야지.”
“…….”
임홍은 입을 다물었다.
하오문이 아무리 하류인생이라지만, 강호에서 정사지간의 문파로 살아남은 이유는 명백했다.
기본적인 무력을 갖추지 못하면 언제든 휩쓸리는 게 강호다.
하물며 하오문은 정보를 다룬다. 정보를 판다는 건, 누군가를 적으로 돌린다는 얘기다. 그런 하오문의 무력이 평범하겠는가?
적어도 임홍은 스스로 관성검 정도는 된다고 자부했다.
실제로 오늘 싸움에서도 비록 기관진식의 도움을 받았지만 셋을 물러나게 만든 건 엄연히 그의 무력 덕분이 아닌가.
‘천룡검협이라…….’
임홍은 입을 다물고 무거운 시선으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강호의 소문이 전부가 아니지만, 소문이 괜히 퍼지는 건 아닐 터인데.’
천룡검협.
협객이란 별호가 붙었다. 쉬이 붙는 별호가 아니다. 하면 정의롭고 진정한 협객이란 얘기일 터인데.
이렇게 어깃장을 놓을 만한 인사는 아니리라. 오히려 지금 행동은 하오문을 적으로 돌리는 무익한 행동이 아닌가.
임홍도 결국 검을 꺼내 들었다.
이미 상대가 검을 꺼내 순간, 강호에선 돌이킬 수 없다.
“천룡검협의 소문이 맞는지 확인해야겠소. 하오문 입장에서 천룡검협의 실제 실력이라면 꽤 비싼 정보거든. 그쪽 정보를 원하는 사파측 인물들은 점점 많아질 터이니.”
천무백은 임홍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위아래로 훑었다.
‘흠. 그 점소이 꼬맹이치곤 제법 잘 자랐구나.’
뭐, 생각보단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제법 견실한 내력과 깊음이 느껴졌다.
하오문의 단점은 내공심법의 수준이 낮다는 점이다.
한데도 지금 느껴지는 깊음은 임홍이 꽤 고달픈 수련을 해왔음을 보여줬다.
저 정도라면 꽤 실력이 있다. 물론 천무백의 전생에서 봤던 분타주들의 실력을 떠올리면, 그렇게까지 대단한 수준은 아니긴 했다.
‘뭐 내공이 중후하다고 싸움 잘하는 건 아니니.’
천무백은 어깰 으쓱였다.
“자. 이기면 그거 내놓는 거요. 장보도.”
임홍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내가 이기면은?”
“그쪽이 원하는 건 내 정보 아니오?”
“강호에 나타난 신진고수의 정보라면 꽤 좋은 정보지. 거기에 더해 오늘 일에 대해 강호 선배에게 무릎 꿇고, 허릴 숙이고 사죄하시오. 자고로 남에게 잘못하거나 폐를 끼쳤으면 사죄해야지.”
“뭐, 그 정도야.”
천무백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까.”
임홍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참 어린 후배에게 저런 소리를 들으니 깊은 곳에서 짜증이 솟구쳤다.
“입담은 아주 매섭구나.”
“칼질은 더 매섭지.”
임홍의 검 끝에 아스라이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적어도 한 배분, 아니 어쩌면 두 배분으로 볼 수도 있다.
‘한 배분만 해도 강호에선 엄청난 차이다.’
생각보다 강호에서 배분차이, 즉 시간의 차이는 실력차이에 직결된다.
내력을 쌓는 건 필연적으로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내력은 영약을 통해 빠르게 앞서나갈 수 있는 방향이 있지만, 강호 경험과 싸움 경험은 다르다.
‘천룡검협이라, 사실 믿기 힘들지.’
임홍은 보고서를 아무리 봐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혜량대사와 무소선사, 그리고 청현진인도 상대하지 못했던 괴이한 적들을 홀로 싸워 이기고, 소림을 구해냈다는 소문.
그 전부는 진실이 아니리라.
물론 실력은 어느 정도 증명되긴 했다. 적어도 소문이 헛되이 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확실히 알아야 한다.’
어쩌면 임홍에겐 이건 기회다.
천룡검협이란 별호는 서서히 강호에 퍼져나가고 있다.
소림이 봉문을 거두자마자 흉사가 발생하고, 거기서 활약한 후기지수의 등장.
아무래도 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터. 임홍은 천무백에 대한 정보의 가치를 파악했다.
‘내공 한 점 느껴지지 않는다. 하면 나보다 더 내력을 보유했단 말인가?’
어디 명문세가에서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벌모세수와 영약을 복용한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할 터인데.
‘도통 감이 안 잡혀.’
상대를 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실력인지 짐작할 수 있건만, 도통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안개에 둘러싸인 듯 눈앞이 깜깜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허점이 너무 눈에 훤히 보였다.
검을 살짝 늘어뜨린 자세.
단 한번이면 복부에 칼을 꽂아넣을 자신이 있을 정도로 허점이 훤히 보였다.
당연히 임홍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찔러넣어야 했다.
그는 정사지간의 인물이다. 정정당당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런 내기가 걸린 시점에서, 그리고 상대가 소문의 실력이 진짜라면 더 봐줄 용의가 없다.
한데도 하지 못했다.
우락부락한 근육? 단전에 가득 찬 내력?
그런 것만으로 상대를 가늠하는 게 아니다.
그저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 묻어나는 분위기.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듯하나 거기에 무(武)가 담겨있다. 하니 임홍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러자 천무백이 말했다.
“흠. 일부러 기다렸는데 선공을 안 하네?”
“……일부러?”
“대놓고 공간을 열어 줘도 안 온다는 건, 강호 후배에게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뜻이죠?”
“오만한!”
임홍이 버럭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삭!
바람결에 옷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임홍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쩌저정!
“…….”
육감 중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이요, 둘째는 시각이었다.
검을 곧게 세워 코앞에서 겨우 천무백의 검을 막아 냈다.
주룩!
하나 이마에서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검을 막아선 순간 쏟아진 검풍에 피부가 베인 것이다.
‘빨랐다!’
이미 내력을 끌어올렸고, 검신마저 달궈놨는데도.
상대의 속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물며 상대는 제대로 된 자세를 취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방심했는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임홍은 진지하게 싸움에 임했다.
다만 그의 예상보다 훨씬 천무백의 속도가 빨랐다.
임홍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오문 섬서 분타주 임홍이오. 별호는 암효(暗梟). 있는 힘껏 싸우지.”
임홍이 검을 곧게 세우고 쭉 뻗어왔다.
천무백의 눈이 반짝였다.
우우웅!
임홍의 검신이 진동하고 또 진동했다. 뭉쳐진 내기가 무수히 많은 검기로 분사됐다.
천무백은 검을 들어올리며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노출검(露出劍)이군.’
객잔에서 행패를 부리는 건달들에게 술을 뿌리는 것처럼.
검에서 쏟아져나오는 검기가 이슬방울처럼 넓고 빠르게 분사됐다.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생각보다 위력이 약한데?’
천무백의 검이 서서히 움직였다. 검신이 불에 달궈진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우우우웅!
대장간의 가마에서 막 튀어나온 검신처럼 붉게 달아오르는 검.
천무백은 굳이 귀곡광애를 선보이지 않았다.
섬서 분타주 정도라면 알아볼 거다. 굳이 창천검신의 후인이란 정보를 하오문에 넘겨 줄 필요가 있겠는가.
이내 천무백의 검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휘둘러졌다.
무수한 이슬방울로 분사되는 임홍의 검기가 물방울이 터지듯 깨져나갔다.
그제야 임홍은 천무백의 행동을 이해하곤 경악했다.
‘이것들을 하나씩 깨뜨린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이 미친!”
임홍의 찢어지는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빠르다. 신속하다. 쾌속하다.
그 어떤 단어로도 쉬이 형용하기 어렵다. 천무백의 상단전이 미친 듯이 맥동하며 쏟아내는 내력이 검끝을 날카롭고 더 빠르게 만들었다.
사방으로 검끝이 찔러졌다.
작디작은 방울이 하나씩 깨져나갔다.
놀라운 일이다. 무수히 퍼진, 그리고 쏟아지는 검기들을 보이지도 않는 손놀림으로 모두 깨뜨리다니!
임홍이 있는 힘껏 쏟아낸 노출검이 처참하게 깨졌다.
“크억!”
천무백의 검이 단숨에 임홍의 검을 후려쳤다.
쩌저저적!
검신을 타고 쏟아지는 강대한 내력에 임홍은 온몸이 부서질 듯한 격통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전율했다.
‘어찌 이리도 빠르고 매섭단 말인가!’
검이 깨져나가는 순간, 임홍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그의 눈에 천무백의 잔뜩 좁혀진 미간이 보였다.
“뭐 하나만 묻겠소.”
“……?”
“그쪽 실력은 섬서에서 어느 정도요?”
“섬서에서 두 손안에…드오.”
순간 천무백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오히려 천무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지랄하지마쇼. 그 정도로 열손가락 안에 든다고? 어디서 구라를 까?”
구라?
임홍은 억울했다. 아니, 구라라니.
내가 거짓말을 할 리가…….
물론 열 손가락 안에 들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 정도 급은 되는데.
한데 천무백은 왠지 모르게 화난 듯한 얼굴로 다가왔다.
“구라를 까? 좀 맞아야겠소.”
* * *
주먹이 내려온다.
임홍은 피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발길질은 피하지 못했다.
몇 번 맞고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쏟아졌다.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아프다.
다시 한번 주먹이 쏟아진다.
이번엔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체면 따위 다 버리고 굴렀다.
한데도 피하지 못했다.
몸에 시퍼런 멍이 숭숭 생겨났다.
임홍은 몇 번의 반격을 시도했으나 천무백에게 번번이 막히고 오히려 더 얻어맞았다.
“하!”
천무백이 탄식을 터뜨렸다.
그는 엉망진창 된 임홍을 바라봤다.
“아니. 암진혜검(暗鎭慧劍)은 어따두고 안 써먹어?”
“그, 그걸 어찌……!”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긴가민가했던 것들이 탁 풀렸다.
‘썅. 정파 수준 개판됐네.’
일전부터 느꼈단 바였다.
소림의 혜량대사나 무소선사, 그리고 화산 수호검 청현진인.
셋 다 고수지만, 천무백이 생각하는 수준엔 미치지 못했다.
직전의 전생에서만 해도 소림의 방장과 나한각주라면 강호를 통틀어서도 최상의 고수들.
수호검이란 별호를 받는 화산의 검객도 그 수준은 된다.
한데 천무백이 직접 느낀 수준은 한참 낮았다.
더구나 지금 임홍 역시 그랬다.
나쁘지 않지만, 당장 직전 전생의 하오문의 고수들보다 훨씬 부족했다. 노출검의 수준도 말이다.
그리고 하오문 최강의 절기인 암진혜검조차 쓰지 않았다.
천무백은 잊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거 하오문주한테 천마 놈 뭐 하나 추적 좀 하라한 뒤로 연락이 없더만…… 가르치지도 못하고 끊겨 버린 건가.’
천무백은 착잡했다.
40년 전 정마대전의 여파로 정파 무림의 수준이 현저히 낮아진 것이다.
‘문제는 혈사문이나 혈귀곡 애들 보면, 애들은 꽤 한다는 거지.’
적어도 천무백이 느끼기엔 균형이 안 맞았다.
정마대전 때 정파 고수들이 싹 쓸려나가면서, 정파의 수준이 현저히 낮아진 것.
이러니 혈사문이 난동하고, 혈귀곡이 암약해도 별수를 쓰지 못한 것이다.
‘거. 골치 아파지는군.’
천무백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임홍을 바라봤다.
“자. 대화부터 하자고.”
“…….”
임홍의 얼굴에 황당함이 묻어났다.
그는 통증으로 뻐근한 고개를 들어 천무백의 눈을 바라봤다.
말로 하자고?
……지금 실컷 이렇게 패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