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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52화 (52/318)

<검신재생 52화>

52. 내가 산다고. 팔라고.

사실 능허의 태도가 특이한 편이다.

무공을 익히는 무인에게 장보도는 속된 말로 눈이 확 돌아갈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다만 능허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장보도? 온갖 괴물들이 호시탐탐 노리는데 흑도인 내가 탐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어?”

그러니 애당초 능허는 장보도에 관심 없었다.

반면 청현진인은 소식을 듣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변했다.

“큰일이군요.”

평범한 장보도가 나타나도 그 지방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난다.

하물며 지금 나타난 장보도가 무엇인가.

“적혈검귀라면 400년 전 당대 한 손에 꼽히던 검객입니다. 온몸이 피로 젖을 정도로 싸움을 즐겼다던 검객인데.”

세력 없이 홀로 독보강호 하던 인물이다.

하여 제자도 기르지 않았다.

검으로 당대 한손에 꼽히던 고수의 무공이 실전됐다.

적어도, 그렇게 알려졌다.

한데 그의 장보도가 발견이 됐다?

“그것도 역병으로 쑥대밭이 된 섬서성에서 말이지.”

“음!”

천무백이 말을 덧붙이자 청현진인은 침음성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무량수불, 본도는 곧장 화산으로 가서 상황을 확인해야겠습니다.”

화산은 정파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며, 섬서성의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무인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역병으로 화산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하필 적혈검귀의 장보도가 발견되어 외부에서 여러 무인들이 몰려든다면, 화산으로서도 심각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터.

“천 공자는 어찌 움직이겠습니까? 우선 본도와 같이 화산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원래는 화산으로 갈 생각이었다만…….

천무백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화산으로 가 봤자 당장 혈귀곡 추적은 요원하겠군.’

청현진인이야 소림에서 습격을 당해 혈귀곡의 실력을 봤으니 혈귀곡의 위험함을 잘 알았다.

하나 화산 본단은 다르다.

아직 그들은 직접적인 위험을 못 느꼈으니까.

당면한 적혈검귀의 장보도와 그걸 노리고 찾아드는 무림인들이 벌이는 각축전에 신경이 쏠릴 게 분명하다.

‘분명 화산의 조력도 받지 못할 것이고.’

천무백이 어떤 생각인지 눈치챈 청현진인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천 공자. 본도가 반드시 화산으로 가 혈귀곡에 대한 추적을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화산을 찾아 주세요. 본도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청현진인은 곧장 화산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경공을 펼치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능허가 인상을 찌푸렸다.

“썅. 화산 구경이나 한번 해 보나 했는데.”

“유람 왔니?”

“그럼 이제 어떻게 움직이시려고요? 이 넓은 섬서에서 혈귀곡을 어떻게 쫓습니까?”

“일단은……. 장보도부터 보자고.”

“장보도? 아니 뭘 또 장보도에 욕심을 냅니까.”

천무백은 코웃음 쳤다.

장보도에 욕심을 내기는 무슨.

‘내가 유산을 남긴 적이 없는데 장보도라니.’

아니, 있지도 않은 게 나타났다고?

그것도 하필, 혈사문이 역병을 퍼뜨린 섬서성에서?

‘그럴 수도 있기야 하지.’

장보도 소동은 강호에 빈번하다.

다만 그중에 진짜는 많지 않았다. 매번 가짜 장보도거나 전혀 다른 인물의 무덤을 파헤치는 결말로 끝는게 십중팔구였다.

‘근데 적혈검귀란 말이지.’

참 공교롭단 말이야.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올라갔다.

적혈검귀는 천무백의 무수한 전생 중 하나였다.

그리고.

“400년 전 혈사문을 멸문시켰던 게 적혈검귀였다.”

“……어? 그렇습니까?”

능허가 순간 멈칫했다.

“혈사문을 멸문시켰던 적혈검귀의 장보도가 하필 섬서성에서 발견됐다.”

천무백은 코웃음 쳤다.

사실 적혈검귀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당대 한 손에 꼽는 고수라는 사실 외에는 사문이 어딘지,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워낙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천무백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던 탓이다.

지금 강호에 적혈검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게 천무백이다.

천무백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웃길 따름이었다.

‘호북성을 주 무대로 활동했었고, 거기서 죽었지.’

하면 적혈검귀의 장보도가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섬서성에서 등장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천무백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하나는 명백했다.

“혈사문이든, 아니면 혈귀곡의 명령에 따른 움직임이든.”

어찌 됐건 혈사문과 관련이 있다.

그게 혈사문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혈귀곡의 명령에 따라 모종의 일을 꾸미는지는 확인해야 하지만, 천무백은 장보도를 쫓기로 했다.

“움직이자, 능허야.”

“아으! 섬서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적혈검귀의 무공 중엔 좌수검법이 하나 있다고 하던가?”

“뭐 해요?”

“……?”

“그렇게 느려서 언제 움직입니까. 기어갑니까?”

* * *

임홍은 처연한 얼굴로 건물을 바라봤다.

아니, 섬서성 지부였던 폐허를.

“그래. 차라리 잘된 거지.”

장보도의 정보를 갈취하기 위해 찾아온 무인들은 잘 설득해 쫓아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하오문이 강호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명백했다.

약자들은 늘 강자들의 핍박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연구하고 준비했다.

바로 기관진식이다.

임홍은 기관진식을 작동시켰고 찾아온 무인들을 격퇴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도 찾아온 무인들은 절정고수임을 증명하듯이 기관진식을 상당수 망쳐 놨다.

“후. 당분간 섬서 쪽 일은 접고 하남에 집중해야겠군.”

그나마 임홍이 위안을 가질 수 있던 게 있었다.

“적혈검귀의 장보도라!”

하오문은 그래도 하오문이었다.

비록 한 발짝 늦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장보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장보도를 누가 소유했는가에 대한 정보도 아니다.

그것도 바로 진짜 장보도였다.

“이게 아마 진짜일 거다!”

임홍이 눈을 빛냈다. 지금 섬서에 돌아다니고 있는 장보도는 세 개 정도로 유추됐다.

다만 임홍은 지금 입수한 게 진본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장보도가 그려진 이 천은 적어도 300년은 족히 될 법하다. 그때 그 시절에 쓰던 방식으로 방직된 천이야.”

설령 이게 적혈검귀의 것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지금 소문이 난 장보도는 유력했다.

“이걸 화산에 팔까?”

섬서의 지배자임을 자처하는 화산이라면, 이 장보도를 원할 게 분명했다.

섬서성이 조용해지기 위해서라도.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팔고 뜰까?”

임홍은 장보도에 탐을 내지 않았다.

하오문에게 장보도의 보물들은 독에 불과했으니까.

잠깐 고민하던 임홍은 결정했다.

“그래도 화산이지. 화산에 팔고 섬서를 뜬다. 그리고 하남으로 가서 세력을 구축하고, 섬서성이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온다.”

“그거 내가 살게.”

“……!”

순간 임홍은 깜짝 놀라 몸이 굳어졌다.

가슴이 싸늘해졌다.

전혀 기척도 느끼지 못했건만,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라니!

겨우 간신히 눈알만 굴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부잣집 도련님?’

섬서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난 상태.

유랑민과 강도들 발생으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했다. 하니 저런 부잣집 도련님의 차림새를 보기가 쉬운 건 아닌데.

청년은 태연하게 임홍의 앞으로 걸어 나와 말했다.

“그거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면 여기서 팝시다. 흥정은 안 받습니다. 딱 은 한 냥으로 깔끔하게 거래합시다.”

“…….”

여기서 팔라고?

이게 뭔 줄 알고?

그것도 은 한 냥? 당장 화산에 가면 금덩어리를 받을 장보도를?

임홍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뭔 이런 새끼가.’

임홍은 오십 줄에 접어든 무인이다.

그동안 강호 경험도 녹록지 않거니와, 지금은 섬서를 책임지는 분타주 자리까지 차지했다. 그런 그도 이런 상황에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다.

“이걸 은 한 냥에 팔라고?”

“음. 하긴. 장사에 흥정은 필요한 법이지. 은 반냥.”

임홍은 미간을 좁혔다.

‘미친 새끼구나.’

은 한 냥에서 흥정하자고 은 두 냥으로 늘리는 것도 아니고.

반냥으로 줄이다니.

임홍은 청년을 쭉 훑어봤다. 고급스러운 의복에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금실을 두른 검까지.

딱 봐도 꽤 부자로 보이건만.

‘잠깐만,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검?’

수많은 보고서가 머릿속에 순간 휙휙 지나갔다.

임홍은 저도 모르게 청년의 체형을 훑어보고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보고서에 올라온 묘사와 똑같다.

“천룡검협?”

“아고. 좀 별난 별호긴 한데. 여기까지 알려졌네.”

임홍은 어이가 없었다.

내공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부잣집 도련님이 그 어마어마한 천룡검협이라고?

소림을 구해 준 신진고수라고?

그래. 천룡검협이 맞다 치자. 한데 그 대단한 명성을 가진 사람이 장보도를 고작 은 반냥에 넘기라는 꼴이라니.

“무슨 짓이오. 하오문은 정당한 대가가 아니면 아무것도 팔지 않소.”

“유명인사 할인행사 같은 거 없나?”

“이보게. 자네가 진짜 천룡검협인지도 모르겠고, 설령 맞다고 해도 이건 파는 물건이 아닐세.”

그래도 임홍은 조심스러웠다.

상대가 천룡검협이 맞을 수도 있다는 확률이 생겼으니까.

강호란 곳은 적은 확률도 조심해야 한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깐 화산에 판다면서?”

“그러니까 화산에 파는 물건일세.”

“사람 가려가면서 팔면 장사 망하는데.”

“걱정하지 말게. 내 장사는 알아서 할 터이니.”

“아니, 나한테 망한다고. 장사가.”

……이거 협박 맞지?

“천룡검협은 소림을 구한 일세의 영웅이라던데, 지금 고작 이 천 쪼가리를 강탈하겠다는 건가?”

“강탈이라니. 정당한 대가를 주고 구매하겠다 이겁니다. 난 다른 사람들이랑은 달라서요.”

다르지. 암, 다르고말고.

장보도를 은 반냥에 사겠다는 것부터가 아주 다르지.

임홍은 더 말을 하는 걸 멈췄다.

사실 그는 이 청년이 천룡검협일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장보도에 정신 팔렸다고 한들 바로 곁에 올 때까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공 한 점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내공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고수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보고서에 따른 천룡검협의 무위가 진실이라면, 임홍보다 더 고수다.

그러니 임홍은 상대를 천룡검협이라 가정했다.

‘소림을 구한 인물이니 정의감에 투철할 터. 그리고 정파 인물들은 체면을 중요시하니.’

임홍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여까지 찾아온 걸 보니 내가 하오문 사람인 건 알고 있는 듯하오?”

“알지. 그 점소이하던 꼬맹이가 이렇게 분타주가 돼서 내가 감동스러워서 눈물이 나.”

“……날 아오?”

임홍은 멈칫했다.

고작 열 살 무렵에는 객잔의 점소이나 하던 자신의 과거를 어찌 안단 말인가?

“그래. 나도 어린 애 때리기 싫거든?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은 반냥에 넘겨. 그걸로 만두 사 먹어라, 아해야.”

“…….”

임홍은 고개를 내저었다.

도대체 자신의 아들뻘, 아니지. 일찍 결혼했으면 손자뻘인 놈이 저런 말을 하다니.

‘천룡검협이란 별호도 허명이구나.’

임홍은 이대로라면 말이 안 통하는 걸 직감했다.

하니 손을 쓸 수밖에 없을 터.

아무리 하오문이 약하다고 한들, 그는 한 지부의 분타주다. 강호에서 살아남고 강호란 칼 위에서 싸우는 춤꾼이란 말이다.

적어도 절정고수 하나쯤은 능히 상대할 실력자다.

“강호 선배로서 교육이 필요할 듯하오, 천룡검협.”

“아이고. 정당하게 돈 주고 사간다고 해도 이러네.”

천무백은 검을 꺼냈다.

“그래도 옛정이 있어 하나 말해 주겠어.”

“……?”

천무백이 미소 지었다.

“이거 내가 이기면 장보도 공짜로 가져간다?”

임홍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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