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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50화 (50/318)

<검신재생 50화>

50. 먹히기 전엔 잡아먹어야지.

“창천검신의 후인이 맞긴 했군.”

약선의 퉁명스러운 말에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분은 준 건 준 만큼 받아야 한다고 여겼거든요.”

“그랬지. 그거 좀스러운 양반이라고 생각했지.”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객원표사님.”

천무백은 능청스럽게 화답했다.

약선은 객원표사란 단어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은 천무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처음에는 난색을 보였다.

청성표국 표사들의 실력은 괜찮은 편이지만, 소림사의 경비를 맡기기엔 터무니없었다.

“천 공자가 직접 남아 준다면 모를 일이겠지요.”

혜량대사의 웃음기 어린 말에 천무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각자 할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진인과 우선 화산으로 가실 예정입니까?”

“예. 섬서는 넓죠. 그곳에서 혈귀곡의 꼬리를 추적하려면 화산의 조력이 절실하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 공자. 내 있는 힘껏 장문인과 장로들을 설득할 터이니.”

화산수호검 청현진인의 단호하게 말했다.

다름도 아닌 수호검, 화산 장로 중에서도 수위권에 있는 청현진인이 장담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화산의 조력을 분명 받을 수 있으리라.

“감사합니다.”

천무백으로선 예상치 못했던 성과였다.

어차피 훗날 혈귀곡과 혈사문을 추적하려면 섬서에 갈 건 당연한 일이다. 천무백은 섬서에서 화산이나 종남의 조력을 구할 생각이었다.

넓은 섬서성에서 어찌 추적하겠는가.

‘하여간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한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천무백은 자신을 쳐다보던 약선의 뚱한 시선에 애써 헛기침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약선 어르신.”

“끙. 이로써 그 양반이 나에게 베푼 은혜는 모두 갚은 거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소림이 천무백의 제의를 받아들인 건 바로 약선 덕택이었다.

“거 참. 강호 인생이 몇 년인데, 표국의 객원표사가 되는 것도 신기한 경험일세.”

천무백이 약선을 객원표사로 고용하고, 소림의 경비를 맡겼다.

“약선 선배가 남아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혜량은 뚱한 얼굴의 약선에게 직접 고개를 숙였다.

제아무리 후배라고 해도, 소림 방장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약선도 표정을 애써 펼 수밖에 없었다.

‘뭐, 어쩔 수 없겠지.’

천무백은 약선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전생에서 약선에게 여러 은혜를 베풀었었다.

창천검신의 후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그간 받아왔던 도움에 비교하면 아주 별것도 아닌 일이다.

“어서 후딱 가기나 해라. 이러다가 그 노인네 놓치겠다. 네놈이 제법 한가락 하지만, 그 노인네 진법 뚫는 실력 보면 만만치 않아.”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혜량대사와 소림에 남는 인물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천 공자. 이걸 받아가시오.”

“……?”

그때 혜량대사가 검은 광택이 감도는 네모난 모양의 묵패를 건넸다.

좌중의 인사들이 그게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할 때, 천무백만이 알아보고 살짝 감탄을 터뜨렸다.

“이걸 줘도 되겠습니까?”

“천 공자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보구려.”

“그 유명한 소림면패 아닙니까.”

“맞소.”

“소림면패!”

소림면패란 단어에 좌중이 깜짝 놀랐다.

혜량대사가 자세를 바로 하며 합장했다.

“천 공자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이던, 소림은 천 공자의 편에 서겠다는 뜻입니다.”

천무백은 잠시 멈칫하다 이내 소림면패를 받아들였다.

“지금껏 소림면패를 내준 적은 몇 번 없소. 하지만 지금 저희 소림으로서 천 공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 부족하나마 이것뿐이오.”

소림면패.

면패를 지닌 자는 강호 전체의 공분을 살 일이 아니라면, 소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즉 소림이 함께 한다는 의미였다.

묵패를 지닌 자의 명령은 곧 소림방장의 뜻과 같은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 더하여 소림에 공식적으로 나한승의 지휘권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물론 실제로 사용하려면 막무가내로 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소림과 서로 교감이 된 후에야 가능하다. 하지만 면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천무백의 뒤에는 소림이 있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비단 소림뿐 아니라 정도 무림을 등에 업은 것이지.’

천무백은 소림면패의 진정한 힘을 알았다.

아직도 형식상이나마 무림맹이란 단체는 아주 힘겹게 유지되고 있다.

지금 무림맹에서 소림의 비중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봉문을 푼 이상 무림맹 안에서의 소림의 영향력 확대는 자명한 일.

결국, 소림의 뜻이 정도 무림의 뜻과 함께한다.

즉, 정도 무림에선 천무백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됐다. 만일 천무백이 마도나 사파의 인물이라고 의심한다면, 그건 곧 천무백에게 면패를 내준 소림을 의심한다는 의미니까.

‘가장 큰 성과일지도 모르는군.’

대환단을 받았을 때보다 천무백은 더 기뻤다.

‘사람이 명성을 쌓게 되면 시기와 질투가 따르기 마련이고.’

천무백은 천룡검협이란 명성을 서서히 떨치는 중이었고.

‘나이가 어리면 무시당하기 마련이지.’

아무리 강호가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이가 어리면 비교적 말에 힘이 실리지 않기도 한다.

한데 천무백은 혈귀곡을 추적하면서, 어쩌면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이 면패는 천무백에게 천군만마보다 더 큰 조력이 되리라.

“소림면패라니…….”

“소림이 그 정도로 큰 은혜를 입었단 말인가.”

사실 파격 중의 파격이다.

천무백이 소림을 구해 준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게 소림면패를 내어 줄 정도인가는 의문이었으니까.

하나 그들은 몰랐다.

적불암의 봉인을 풀어 준 것만으로도, 소림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됐으니까.

혜량은 오히려 소림면패밖에 내줄 수 없는 상황이 미안할 따름이었다.

물론 천무백은 혜량대사의 뜻을 그저 완벽한 선의만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렇기엔 천무백은 강호경험이 일천한 애송이가 아니었으니까.

‘은근 약았단 말이지.’

정도 무림의 지지와 보호를 받는 인물이란 의미.

이걸 다르게 보면, 사파와 흑도, 마도의 대적이란 얘기다.

그러니까 이 면패 하나를 주면서, 천무백은 마도와 사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적이 된 것이다.

그 심계에 천무백은 혀를 차면서도 받아들였다.

‘뭐. 그만큼 날 믿는 거겠지.’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그만큼 천무백을 강하게 신뢰한다는 의미다.

만일 이 면패를 이용해서 정파 무림을 오히려 마도쪽에게 이롭게 이용한다면?

그런 가능성도 충분하지 않은가.

천무백이 애당초 마도의 인물임을 숨기고 있었다면 말이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천무백이 이미 혈귀곡과 혈사문하고 돌이킬 수 없는 적이 된 지금, 굳이 마도와 뜻을 함께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소림면패를 내어 준 소림의 뜻, 잊지 않고 정도를 걷겠습니다.”

천무백의 인사에 혜량대사가 합장을 했다.

“소협의 길에 부처의 자비가 함께하길 바라겠습니다.”

* * *

“솔직히 말해보십쇼.”

“뭘.”

“저 좋아합니까?”

“능허야, 이제 진짜 미쳤구나.”

“아니 내가 뭐, 진짜 조금 잘생기고 형처럼 의지하고 싶은 건 아는데. 그렇다고 매번 절 대동하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약선이 너한테 독약을 줬나 보다. 머리가 돌았어.”

“아니. 썅! 화산에 가고 싶어 했던 허 표사 내버려 두고 왜 날 데리고 갑니까.”

“심심하진 않잖아. 또 표국 바쁠 텐데 허표사 데리고 가기도 그렇지.”

“……와.”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저 연화루 루주입니다.”

“맞아.”

“흑심방 우두머리입니다.”

“맞아.”

“그 우두머리가 자리를 비우는 게 말이 됩니까?”

“흑심방은 화웅이 잘 이끌고 있고, 연화루도 설영이 문제없이 이끌고 있는데?”

“아. 분명 대가리는 됐는데 정작 대가리 짓은 못 하고 있네.”

“네가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뭡니까.”

능허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만일 합당한 이유가 아니면…….

“반항이라도 하게?”

“그럴 리가요. 허리가 간지러워서.”

“일석이 놈이 갖고 온 거에 적힌 얘기 있잖아.”

소림을 떠나기 전 연화루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일전에 능허가 수하로 거둬들인 흑심방의 일석이란 녀석이었다.

“네.”

“웬 이상한 놈들이 연화루에 접근했다 하지 않았느냐.”

“아, 그 뭣이냐. 하남기루연합인가 뭐신가?”

“그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원래 우리 같은 하층민들이야 살려고 이렇게 저렇게 뭉치는 건데.”

“보통 기루는 뒤에 흑도가 봐주는데, 기루들끼리 연합을 이룬다고?”

“어?”

“하면 흑도들이 건들기 힘든 뭔가 있다는 건데 말이다.”

천무백이 빤히 능허를 쳐다보자 능허는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

‘대답해야 한다!’

천무백은 시시때때로 능허를 시험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화루고 흑심방이고 다 빼앗겠다는 의도를 숨기지도 않고 풍겼다.

‘그래선 안 되지!’

능허가 위협 속에서도 천무백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이유가 뭔가.

‘내 노후!’

옛날처럼 야망에 가득 찼을 때면 흑심방 자리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으리라. 지금은 아니다. 매번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사태를 겪고 나니 그는 야망을 버렸다.

그저 편안한 노후를 원했다. 하면 흑심방은 몰라도 연화루주 자리는 지켜야 한다.

그러니 능허는 있는 힘껏 머리를 굴렸다.

천무백의 눈초리가 점점 가늘어질 때. 능허의 머릿속이 밝아졌다.

“하오문!”

“호. 그래도 어깨 위가 장식은 아니구나.”

“저 능헙니다, 능허. 독안사 능허. 응? 뱀의 특징이 뭡니까. 교활하다는 거 아닙니까. 교활하다는 건 좀 똑똑하다는 거죠.”

“하긴. 그걸 장식이라고 들고 다니기엔 너무 흉물스럽긴 하지.”

“아오.”

“어쨌든 하남기루연합. 뭐 줄여서 하기련이란 단체 말이다. 하오문이 하남에 진출하려는 단체일 확률이 높다.”

연화루는 하남성의 정보망을 꽉 쥐었다.

흑심방과 연계하고, 청성표국의 정보력까지 통합해서 운영 중이었는데 하남성의 정보망은 절반 이상 차지했다.

그러니 하남에서 세가 약했던 하오문이 접근할 수밖에 없다.

연화루만 하오문의 품안에 안으면, 하남의 정보 절반을 쥐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하오문이 자기네 밑으로 들어와라? 이 목적으로 접근한 거란 말입니까?”

“응.”

“니런 썅! 그게 누구 건데! 이런 상도의도 없는 새끼들이! 뭐 합니까! 당장 원양현으로 돌아갑시다!”

“됐다.”

“네?”

“하기련은 아직 세가 약해. 굳이 안가도 연화루를 못 건드려.”

“그러면 가만히 내버려 두자고요?”

“내버려 두긴 무슨. 손 좀 봐야지.”

“우리 지금 섬서성 가는 거 아닙니까? 혈귀곡 족치러?”

“화산에서 조력을 받아도 쉽진 않을 거다. 섬서성이 지금 소문대로 개판이라면.”

능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병의 근원지로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지옥도라고 하지 않은가.

“관아의 행정력도 마비될 정도로 유랑민이 발생하고 있다는데, 그중에 혈귀곡이나 혈사문이 맘먹고 모습 숨기면 어디 찾기 쉽겠어. 강호에서 사람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섬서성은 넓다. 그리고 사는 사람도 엄청나다.

행정력이 제대로 적용되는 평상시에도 사람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지금 역병으로 난리가 난 상황이라면 화산의 조력을 받아도 시간은 분명 걸릴 터.

그러면 더 큰 정보망이 필요했다.

연화루론 무리다.

섬서성에서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했다.

“섬서에 하오문 지부가 있다.”

“당연히 있겠죠. 종남과 화산이 있는 성인데. 아, 혹시 정확한 위치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고작 하기련 같은 하오문의 밑에 애들 말고.”

하오문 섬서 지부가 아마 가장 규모가 큰 편일걸?

‘강호에서 괜히 정보를 사고파는 놈들이 있는 게 아니지.’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많으며 고수들은 모래알처럼 많다.

그런 강호에서 살아남고, 목적한 바를 이루려면 정보를 한손에 쥐어야 했다.

적어도 남들보다 한발 앞서 움직일 수 있는 정보력.

‘하남에서는 연화루와 흑심방, 그리고 표국으로.’

그럼 섬서에서는 하오문을 먹어야겠지.

“잡아먹히기 전에, 잡아먹어야지. 큰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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