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48화>
48. 내가 가져갑니다.
하남의 정도무림이 발칵 뒤집혔다.
봉문을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림사가 습격을 당했다는 사실이 하남성을 진동시켰다.
제법 적지 않은 숫자의 나한승들이 죽었다. 소림방장과 나한각주도 적잖은 내상을 입은 거로 알려져 세간의 충격은 더 컸다.
다행히도 성공적으로 습격을 막아내면서 소림이 건재함을 알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엔 파문이 일었다.
“40년 전 정마대전이 끝나고, 명색의 구파일방이 대대적인 공격을 당했던 적이 있던가?”
“그것도 봉문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건 정도무림에 대한 공격이지! 그 소림이라고. 소림사!”
“이거야 원…… 더구나 지금 정도무림이 과연 40년 전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는가?”
고령의 정파 무인들의 고심은 깊어갔다. 40년 전 정마대전 이후 정도 무림은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한 모양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룡방을 비롯한 흑도와 사파들이 득세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소림사가 공격당했단 사실은 그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다만, 그런 위기감 속에서도 기대감을 갖게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소림을 도와준 인물이 있다면서?”
“무공이 아주 고강하다던데?”
“내가 듣기론 무공이 아니라 의술이 장난 아니라던데? 역병 환자를 혼자 치료했다고…….”
“응? 봉구현에서 흑랑단이란 대형흑도를 무너뜨린 협객이라고도 하던데?
바로 천무백에 대한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나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소림에는 일반 양민들도 가득했다.
천무백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뛰어다녔다. 새하얀 광채에 휩싸여 위기에서 구해 주던 천무백을 똑똑히 기억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천무백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가족으로, 가족들은 자신들의 일터에서 마구 떠들어댔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더구나 당시 소림에는 청현진인뿐 아니라 몇몇 무림인들이 있었다. 이들 역시 천무백의 무력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들의 증언으로 소문에 신빙성은 더해졌다.
물론 소문이기 때문에 호사가들은 전부를 믿지 않았다.
“뭐? 무애광명? 부처가 강림한 것도 아니고.”
“팔부신장이라고? 나이가 약관도 안 됐다면서?”
“무공을 모르는 양민들이지 않나. 그냥 그렇게 여긴 거겠지.”
“뭐, 그래도 그 혼잡한 상황 중에 양민들을 구할 정도로 제법 실력은 갖춘 건 분명하고.”
“새로운 후기지수의 등장이라고 보면 되나?”
소문이란 게 전부를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정도 확실한 건 있었다.
“제법 무공이 고강하면서도, 역병환자를 치료할 정도로 의술에도 조예가 깊고, 흑도에 고통받는 민생을 구할 정도로 의협심을 넘치는 협객이라.”
“그래도 천룡검협(天龍劍俠)은 너무 과한 별호가 아닌가?”
“별호를 우리가 붙였나. 이미 그렇게 소문이 퍼졌는데 뭘.”
“고작 약관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하늘과 용이 별호에 붙은 후기지수라……. 이거야 원. 강호가 이제야 좀 강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구먼.”
호사가들은 여러 얘기를 떠들었다.
그간 세가 약해진 정도무림에서 딱히 새로운 인물이라고 볼만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나 오대세가의 자식들은 여전히 명성을 떨치긴 했다. 하나 그들은 신선한 면모가 부족했다.
그에 반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천룡검협’이란 어마어마한 별호가 붙여져 버린 천무백의 등장은, 호사가들이 밤새 떠들만한 주제였으니까.
“별호가 중요하겠나.”
“그치. 어차피 별호는 강호가 증명해줄 터.”
“그 어린 친구가 천룡인지, 아니면 용을 흉내 낸 구렁이일지는 강호가 증명해주겠지.”
“이거야 원. 밤새 떠들어도 할 얘기가 많겠구만.”
* * *
호사가들이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무렵.
소림사는 말 그대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면 소림이 그대로 멸문해 버릴지도 모를 끔찍한 사건이었으니까.
소림은 우선 죽은 사람들을 위해 불공을 드리는 한편 습격의 배후를 조사했다.
조사는 쉽지 않았다.
습격자들 대다수가 죽었을뿐더러, 살아남은 이들도 자결을 시도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그저 부리는 무인에 불과한지 입을 열어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십팔성이란 놈은 입을 열지 않소?”
“지독합니다. 절대 입을 열지 않아요.”
“으음. 다행히 약선 어른의 도움으로 포로를 잡긴 했지만…….”
혜량대사는 침음성을 삼켰다.
다행히도 도망가던 습격자 두 명 중 무소선사와 싸우던 십팔성이란 사내는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범상치 않았던 노인을 놓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았던 사람을 잡은 게 어디인가.
때마침 소림으로 오고 있던 약선이란 어마어마한 인물 덕분이다.
“그분이 때마침 소림에 오셨다니…….”
“부처님의 자비지요.”
약선은 전대의 고수다.
특히 혜량은 약관도 채 되지 않았던 시절, 약선을 먼발치서나마 본 적이 있었다.
고작 삼십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어마어마한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떨치던 게 약선이었다.
‘그분이 제조하시는 약이 천하제일의 명약에, 그분이 만드시는 환단이 최고의 영약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바로 약선이 진법에 조예가 아주 깊은 점이다.
약선이란 별호 전에, 천하제일 진법가로 이름을 떨쳤었다.
‘묘선생…….’
혜량대사는 불현듯 천무백을 떠올렸다.
‘약선을 모시고 온 게 청성표국의 표사들이랬지. 하면 천공자가 계획한 일이라는 건데. 정말 적불암에 대해 안다는 건…….’
혜량은 눈을 감았다.
이리저리 엉킨 실타래가 머릿속에서 서서히 풀리는 기분이었다.
‘적불암을 봉인한 건 천승대사님과 창천검신, 묘 선생이었지. 그리고 천 공자. 그때 보여 준 건, 분명 귀곡광애였다.’
어째서 외부인인 천무백이 적불암에 대해 아는지 혜량은 이해했다.
‘창천검신의 후인이구나.’
그리고 그 후인이 약선, 묘 선생을 여기까지 불러왔다.
혜량은 방장에게만 전해져오는 적불암에 대한 얘기를 떠올렸다.
적불암의 붉은빛이 사라지는 순간, 소림이 다시 나설 때라고.
‘천하를 지키는 지붕, 대소림사.’
혜량은 눈을 번쩍 떴다.
그랬다.
지금 소림이 나설 때다. 천무백이 찾아온 것도, 그가 약선을 이쪽으로 이끈 것도.
지금이 소림이 나설 때가 아닌가.
“나무아미타불.”
혜량이 무소선사에게 물었다.
“지금 약선 어른께선 어디 계신가?”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환자들을 돌보셨는데, 오늘 아침엔 천공자와 얘기를 나누더니 사라졌습니다.”
약선은 그 이름이 맞게 역병환자들을 순식간에 치료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단순히 그가 건네준 약만 먹고 환자들이 단 하룻밤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아무리 약선이라 할지라도, 정체불명의 질병에 약을 단숨에 제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천 공자가 미리 얘기해 놓은 거겠지.’
미리 약을 제조한 게 분명하다. 하면 그것도 이게 단순한 역병이 아니라 혈사문의 독임을 밝힌 천무백이 알려준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혜량대사는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적잖이 두려움을 느꼈다.
‘천 공자가 이제 약관도 안 된 나이일 텐데.’
심계가 아주 깊었다.
다행히도 그가 정도의 인물로 보였지만, 만일 그가 마도의 편에 있었다면?
‘이 모든 게 부처의 안배일지니…….’
그때였다.
“방장님, 천 공자와 약선께서 찾습니다.”
혜량대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이 나설 때가 됐다.
* * *
“이상한 일이로구나.”
“뭐가 말입니까.”
“창천검신의 후예는 분명 맞는데.”
천무백은 약선의 가늘게 뜬 눈을 보고 피식 웃었다.
사실 약선을 이쪽으로 유도한 건 적불암의 진법을 해체하기 위해서다.
적불암은 천무백 홀로 봉인을 풀 수 없었다.
‘세명이 모두 모여야 하니.’
당시 적불암을 봉인한 건 세 명이었다.
창천검신, 천승대사, 그리고 약선.
적불암의 봉인을 풀려면 각자 세 가지의 방식이 필요했다. 하나는 창천검신의 내공으로 깨야 했고, 하나는 약선의 방식으로 해체해야 했으며 마지막은 소림방장의 보구로만 가능했다.
그러니 천무백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무백은 적불암 봉인을 풀겸 겸사겸사 독에 대한 치료약을 만들고자 약선과 접촉했다.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천무백이 창천검신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창천검신과 약선만 알 수 있는 몇 가지 얘기를 서찰에 써서.
그러니 약선은 천무백이 창천검신의 후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네놈의 나이를 보면 창천검신 어른이 아니라 검존, 그 친구의 제자일진대. 그놈 제자 같지는 않단 말이야.”
천무백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40년간의 격차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도 완벽히 안 됐을뿐더러, 괜한 말을 꺼냈다가 이상한 오해를 하면 그만 골치 아프니까.
더구나 천무백은 그 새파랗던 애송이에게 ‘네놈’이란 소리를 들으니 신기하다 못해 기분이 묘했다.
“검존의 제자라면 무언가 사람이 진중해야 하는데, 네놈이 네 종놈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꼭 싸가지가 없는 게.”
“……싸가지?”
“창천검신이랑 똑같단 말이지.”
“…….”
“마치 창천검신에게 직접 배운 것처럼 성격까지 비슷한 게 참. 그쪽 무공을 익히면 그리 변하나? 아닌데. 그러면 검존은 왜 그렇지?”
약선은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문득 물었다.
“하면 검존은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약선은 천무백의 말투가 왠지 모르게 퉁명해짐을 느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친우였던 검존의 행방이었으니까.
“끄응. 그 자식. 연락 끊긴 지가 몇 년인데. 살아 있으면 살아 있다고 서찰이라도 부치던가. 쯧쯧. 우리 나이가 언제 가도 이상할 나이가 아닌데.”
천무백으로서도 알 길이 없어 뭐라 대답하기 난처한 순간.
다행히도 혜량대사가 도착했다.
“소승이 늦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아. 대사. 이제 시작하시지요. 진법은 해체했고, 검신 어른이 해놓은 것도 저 친구가 다 해결했으니까.”
혜량대사는 고마움이 담긴 인사를 하며 진법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중앙의 원에 소림 방장의 권위를 증명하는 일종의 옥새, 나한승이 그려진 도장을 조심히 올려놨다.
“…….”
기대했던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좀 시시하네.”
다만 동굴을 가득 메웠던 붉은 빛이 사그라지다가 아예 없어진 것뿐.
“……다 끝난 겁니까?”
“적불암의 붉은빛이 사라졌소. 축하드리오, 대사. 소림사가 원래의 유산을 되찾았소.”
혜량대사는 눈을 끔뻑였다.
놀랍게도 그저 불상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동굴에 어느새 숱한 상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
혜량대사가 감격한 목소리로 그것들을 하나씩 살폈다.
무맥이 끊겼다고 여겼던 숱한 소림의 무공들.
소림을 지켜 왔던 보구들.
거기에 소림에서 제조법을 잃어버린 대환단과 대환단 제조법이 적힌 비급까지.
그간 소림이 잃었던 모든 게 다 있었다.
혜량대사는 감격에 찬 감정을 간신히 갈무리하곤, 대환단이 담긴 작은 함을 조심히 들고 천무백에게 다가왔다.
“현재 소림이 줄 수 있는 건 얼마 없소, 천 공자. 비록 우리가 받은 도움에 비하면, 정말로 부족하나 부디 받아줬으면 좋겠소.”
적불암에 있는 대환단의 3분의 2였다.
천무백은 거절하지 않았다. 겸양을 떨면서 몇 번 거절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천무백은 혜량대사의 말대로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여겼으니까.
‘응? 내가 해 준 게 얼만데?’
물론 그 장면을 보면서 약선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아무리 봐도 창천검신 그 노인네처럼 뻔뻔한 것도 똑같단 말이야.”
“……약선 어르신.”
“응?”
“창천검신께서 살아계시면, 그 말 듣고 어떻게 행동할 것 같습니까?”
“뭣? 살아 있어?”
약선이 화들짝 놀랐다.
“만일 살아 있으면요.”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에 찝찝해진 약선이 미간을 좁혔다.
“못 들은 거로 하게. 아, 그리고 그것들 나한테 좀 맡겨.”
“이것들요?”
“내가 손 좀 봐주지.”
그 말에 천무백은 망설임 없이 대환단을 다시 약선에게 건넸다.
순간 약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약선의 눈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무리 달라고 해도 영약을 덜컥 주는 놈이 강호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도 천하제일 영약으로 명성을 떨치는 대환단을.
그것도 한두 개도 아닌 가진 걸 전부를.
그 배포에 약선은 질린 얼굴이었다.
물론 천무백으로선 당연했다.
약선이 맡기라는 이유가 분명했으니까.
‘진법으로도 유명했지만, 괜히 약선이란 별호가 붙은 게 아니지.’
대환단에 약선이 직접 손을 댄다면, 그건 세상에 둘도 없는 영약으로 재탄생하리라.
천무백은 그래서 망설임 없이 넘겼다.
약선이란 인물에 대해 잘 알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천무백에게 중요한 건 사실 영약이 아니었다.
천무백은 수많은 상자 사이로 유난히 작은 함을 향해 다가갔다.
“이 중에는 당시 창천검신이 남긴 게 있지요.”
천무백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니, 후인인 제가 이걸 가져가겠습니다.”
혜량대사는 순간 몸을 떨었다.
천무백이 스스로 창천검신의 후인임을 자처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