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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47화 (47/318)

<검신재생 47화>

47. 내가 쉬워 보이냐?

콰앙!

전각의 절반이 폭삭 내려앉았다.

복면인 너덧 명이 그대로 깔려 죽었다. 그 위로 천무백이 뚝 떨어졌다.

새하얀 광채로 둘러 싸인 천무백의 모습은 단연코 압도적이었다.

지금껏 단정했던 잘 땋은 머리카락이 풀어 헤쳐져 바람과 기파에 거칠게 휘날리고, 눈은 새하얗게 번쩍였다.

웅웅웅웅!

경천혼공을 극한까지 운공하자 천무백의 주위로 기파가 유형화되어 파도쳤다.

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모습을 갖춰 주위를 휩쓰는 광경은 절대로 흔한 광경이 아니다.

싸움을 벌이던 좌중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쩍 벌리며 멈췄다.

특히 여유롭게 피풍의 사내와 혜량과 무소선사의 싸움을 지켜보던 백발 노인의 충격은 더욱 컸다.

“저, 저놈은 누구냐!”

소림에 저런 놈이 있었다고?

혜량대사와 무소선사, 그리고 청현진인만 조금 주의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황급히 이번에 소림을 치자고 계획을 올린 십팔성(十八星)을 바라봤다.

한데 십팔성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노인이 황급히 전음을 보냈다.

[누구냐. 설마 소림에서 은거한 전대 고수라도 된다는 말이더냐? 천승 대사? 천승의 사제나, 뭐 그런 놈들이냐?]

물론 생긴 걸 보면 젊어서 턱도 없는 소리다.

천승이 언제적 인물이던가. 정마대전때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이의 사제나 제자로 보기에도 터무니 없이 젊었다.

노인은 그런 판단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운 건 십팔성도 마찬가지였다.

[구, 구성 어르신. 저놈은 천무백입니다.]

[천무백?]

[저희 혈귀곡에 대해 소림에 처음으로 언급한 그 청성표국의 막내아들 말입니다.]

노인, 구성(九星)은 입을 꾹 다물었다.

천무백은 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몸을 날렸다.

주위를 포위하던 복면인들이 달려들었다.

서걱!

그들 중에 천무백에게 닿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천무백을 둘러싼 광채는 복면인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이어지는 천무백의 손짓에 단숨에 목이 줄줄이 잘렸다.

“귀…… 곡…… 광애?”

혜량대사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귀곡광애!

소림을 지켜주러 왔던 든든하기 짝이 없던 창천검신의 독문무공.

40년 전, 자신이 스무 살도 되지 않던 애송이 때 봤던 그것과 똑같았다.

물론 그때의 귀곡광애에 비교해 손색이 있었다.

창천검신의 귀곡광애는 소림 전체를 둘러쌀 정도로 엄청났다.

하나 지금 눈에 보이는 것도 분명 귀곡광애였다.

혜량대사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창천검신의…… 후인이란 말인가.’

갑작스러운 천무백의 등장에 좌중이 일시 정지된 듯 멈춰선 사이.

천무백은 어느새 모든 벽을 뚫고 백공양에게 도달했다.

백공양은 부릅뜬 눈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천무백의 눈을 보는 순간 압도된 듯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천무백이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백공양 이 새끼야.”

낮지만 깊은 울림.

좌중은 모두 뒷골이 서늘해졌다. 낮은 목소리에서 소름 끼치는 분노가 느껴지자 싸늘함이 감돌았다.

“이…… 이익!”

백공양의 입에서 순간 시뻘건 피가 왈칵 터져나왔다.

동시에 백공양이 괴성을 내지르며 엄청난 속도와 힘이 담긴 검을 휘둘렀다.

스스로 혀를 깨물어 굳은 몸을 깨우고 온몸에 넘치던 내력을 검에 모두 담았다.

사실 무인으로서는 하지 않아야 할 짓이다.

한번의 검격에 거의 모든 내력을 담는다는 건, 일격필살을 하겠단 뜻.

일격에 반드시 죽여야 하니 위력은 당연하다.

하나 그건 뒤집어서 보면 반드시 일격에 죽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이 죽게 되니까.

파스스스스스!

“……!”

백공양의 혼신이 담긴 일격은 광채에 휩싸여 찬물에 연기를 내며 꺼져가는 불처럼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백공양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 말도 안 되는…….”

“야, 백공양아.”

“……!”

“넌 곱게는 못 죽여 주겠다.”

천무백은 그렇게 말하곤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천무백의 몸이 잠깐 흔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백공양의 좌우 뺨을 후려갈겼다.

“꺽!”

뺨 한번 갈길 때마다 입에서 핏덩이와 이빨 조각이 왈칵 쏟아졌다.

천무백은 무심하게 계속 뺨을 후려갈겼다.

저러다 뺨맞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입안에 있던 이빨이 모두 털린 뒤에야 천무백은 뺨을 후려갈기는 걸 멈췄다. 하나 그것이 천무백의 구타가 끝났다는 게 아니었다.

빠각!

천무백의 손날이 백공양의 어깨를 내려앉혔다. 백공양은 고통에 비명도 못 지르고 입만 뻐끔거렸다.

빠각! 뻐걱!

기괴한 소리와 함께 백공양은 몸의 관절이란 관절이 모두 부러지거나 꺾였다. 덜렁거리는 팔, 다리를 보면 죽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천무백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단전에 주먹을 정확히 꽂아 넣었다.

펑!

“……!”

일종의 내가중수법을 활용해 단전을 터뜨려버린 천무백은 무심하게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백공양을 내려다 봤다.

“새끼. 진즉 죽여 놓을걸. 네놈 처리는 소림에서 할 거다. 그래도 속가문파의 문주니까.”

뭐. 사실 다 죽인 거나 다름없지.

천무백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기색의 천문경에게 다가갔다.

천무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천문경을 안심시켰다.

“쉬고 계세요, 아버지.”

천무백은 천문경의 점혈을 짚고, 동시에 내기를 흘려보냈다.

천문경은 편안한 기색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제야 천무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전멸된 복면인들과 주위에 요동치는 경천혼공의 기파.

‘이거야 원.’

마치 한차례 폭풍이 휩쓴 것 같지가 않은가.

더구나 백공양은 본래 천무백이라면 하지 않았을 정도로 잔혹하게 박살을 냈다.

이곳에 오면서 천무백은 천문경이 당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그 순간 내면에서 천무백도 감당해 내지 못할 격렬한 분노가 휘몰아쳤다.

천무백이 전생을 각성하기 전, 본래의 천무백이 지니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분노로 표현된 것이다.

천무백은 본래 싸움에 임할 때 철저하게 냉정을 유지한다.

이토록 분노하며 휘몰아친 건 초기 전생 때나 그러했다.

‘이렇게 싸운 게 정말 오랜만이군.’

원래의 천무백이라면 하지 않았겠지만, 천무백은 의외로 나쁘지 않게 여겼다.

경천혼공은 비교적 잔잔한 내공심법이다. 어느 내공심법보다 깊고 중후하고 맑지만, 폭발력만큼은 최고라고 할 수는 없다.

한데 지금은 달랐다.

상단전은 사람의 감정과 뇌파와 큰 관련이 있는 만큼, 격렬한 분노는 경천혼공의 폭발성을 일깨워 줬다.

즉 이 말은, 천무백이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경천혼공을 좀 더 공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면 그에 활용할 수 있는 무공도 천무백의 머릿속에 수두룩하지 않은가.

‘뭐, 그것들이야 이놈들부터 처리하고 천천히 정리하지.’

천무백은 싸움의 한가운데로 똑바로 걸어갔다.

구성이 순간 발악하듯 소리쳤다.

“저 자식을 먼저 죽여!”

십팔성은 싸우던 무소선사를 밀쳐내곤 곧장 천무백에게 향했다.

십팔성뿐 아니라 혜량대사와 싸우던 십육성(十六星)도 혜량대사를 기묘한 손놀림으로 밀어낸 뒤 천무백에게 육박했다.

둘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공을 쏟아냈다.

“죽엇!”

전력을 다한 회심의 수가 무색하게도, 공격은 광채에 휩싸여 사라졌다.

“……!”

광채를 뚫고 사이에서 손아귀가 불쑥 튀어나왔다.

달려들던 십육성의 머리가 그 손아귀에 잡혔다.

좌중이 일순 질식할 듯한 침묵에 잠겼다.

“우웁!”

낮은 목소리가 마치 그을림처럼 짙게 깔렸다.

“내가 쉬워 보이냐?”

좌중에 질식할 것 같은 정적이 가라앉았다.

천무백의 눈이 새하얗게 빛났다.

“소림 전체를 습격하는 게 아니라, 날 가장 먼저 죽이려고 전력을 다했어야지.”

천무백의 목소리가 퍼지는 동안.

십육성은 천무백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십팔성이 황급히 구하고자 몸을 날리려는 찰나. 천무백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게 너희 실수야.”

콰득!

십육성의 머리가 수박통처럼 깨져나갔다.

* * *

구성은 상황 판단이 빠른 자다.

그렇지 않다면 살벌한 혈귀곡에서 서열 9위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으리라.

[계획은 실패다. 당장 튀어!]

구성은 십팔성에게 전음을 쏟아내곤 곧장 몸을 돌렸다.

사실 지금까지 크게 움직인 적도 없어 몸 상태는 최상이었으나, 천무백과의 싸움은 무조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 수준에서 싸울 놈이 아니다!’

십육성은 자신보다 한참 아래 서열이지만, 그래도 싸움 하나만큼은 잘하는 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록 독을 섭취해 제힘을 발휘 못 하는 소림방장이라지만, 혜량대사와 대등하게 맞서 싸웠겠는가.

한데 그 녀석이 한손에 머리가 깨져나갔다.

구성은 재빠르게 경공을 펼쳐 대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천무백은 쫓아오지 않았다.

구성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쳤구나!’

보아하니 온종일 싸운 듯했다.

아마 내력이 고갈됐으리라.

그쯤 생각되자 구성은 한번 싸울까 고심도 됐지만, 그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투자하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다.

‘본 곡에 복귀한 이후 놈에 대해 철저하게 알아봐야겠어!’

구성은 적잖이 안심했다.

그러다 문득 소림을 향해 올라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곤 눈을 게슴츠레 떴다.

칼을 차고 있는 무리. 그중 노인네와 어린 소녀가 있는 기묘한 조합이었다. 구성은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하나 별안간 저들 사이에서 먼저 선공을 했다.

“허 표사님!”

“마인이다! 잡아!”

구성은 이를 악물었다.

단순히 외기만으로 기운을 파악한 걸 보면 제법 한가락 하는 실력일 터.

더구나 은은하게 풍기는 매화향이 구성의 신경을 건드렸다.

‘젠장. 화산이었나.’

길을 막아서는 모습을 보아하니 쉽게 지나칠 수는 없을 터.

구성은 내달리면서 검을 꺼내 휘둘렀다.

막강한 공력이 담긴 검기가 작렬했다.

단숨에 와해시키고 뚫고 지나갈 속셈이었다.

“······!”

하나 구성의 계획은 단 한 번의 공방으로 어긋났다.

힘껏 쏟아낸 공력이었건만, 화산의 무인으로 추정되는 우두머리가 비틀거리면서 막아낸 것이다.

‘가볍게 생각할 놈들이 아니구나!’

물론 자신이 질 리가 없다. 하지만 뚫고 지나가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만한 수준은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간을 낭비했다가 추적을 당할 수 있단 사실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구성과 뒤늦게 도망쳐 온 십팔성도 가세해 공세를 펼쳤다.

쿵!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패검이 작렬했다.

“끄윽!”

사내는 비틀거리며 주춤 물러섰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귀찮은!”

구성이 혀를 쯧쯧 찼다.

그러다 문득 뇌리에 불길함이 파고들었다.

‘시간을 끌어?’

상대는 정면승부를 피했다. 물론 단 한 번의 공방으로 압도적인 실력 차를 느껴서 불가피하겠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누가 봐도 시간을 끄는 모양새가 아닌가.

그는 급히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그 무시무시한 놈의 기세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멀리서 소림의 무인들이 추적하는 건 느껴졌지만.

‘이놈이 나보다 더 기감을 멀리 느낄 수는 없을 터인데.’

무엇을 믿고 시간을 끄는가?

사내를 중심으로 수하로 보이는 자들이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이.

그때야 구성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을 떠올렸다.

“웃차. 수고했네, 허 표사. 이제 다 됐네.”

그사이 애당초 생각지도 못했던 노인네를 보며 구성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 느낌의 원인을 깨달은 순간, 구성의 얼굴은 아연했다.

“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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