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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46화 (46/318)

<검신재생 46화>

46. 천무백, 포효.

천무백의 엄청난 무위와 선각을 비롯한 나한승들의 분투에 다행히 싸움은 끝나갔다.

피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멸을 각오했던 나한승들의 입장에선 엄청난 성과였다.

이 성과가 비단 자신들 덕택이 아님을 나한승들은 잘 알았다.

선각은 천무백을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전투가 끝나면서 그를 둘러싼 광채는 사라졌지만,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천무백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장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천룡팔부(天龍八部) 같구나. 아니 팔부신장 같은 위용에 검을 쓰는 협객이니, 천룡검협이라 불러야 하는가.’

팔부신장 중 천(天)과 용(龍)을 으뜸으로 쳐서 천룡팔부라고도 하는데, 천무백이 모습이 그러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 같고, 그중에서도 으뜸인 천룡과 같았으니까.

천룡검협(天龍劍俠).

물론 고작 스무 살도 안 되는 이에게 붙이기에는 과한 별호였으나 선각은 그 별호만큼 천무백에게 어울리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청성표국에 용이 있었구나.’

그리고 저런 청성표국을 의심해 일가를 가둬놨었다니.

선각은 뒷골이 서늘해졌다.

소림으로서는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오늘의 기습을 보면 결국 청성표국의 결백은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다.

혈사문을 추적하겠다고 선언하자마자 이런 습격이 발생했으니, 선각은 이들이 혈사문이라 추정했다.

물론 완전히 맞는 추정은 아니지만, 얼추 맞아 떨어졌다.

선각은 천무백에게 다가갔다.

“천 공자, 도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니. 그럴 것 없소.”

하나 천무백은 여전히 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선각이 잠시 의아해하는 사이. 천무백은 고개를 틀었다.

“만만치 않은 놈들이 나타났나 보군.”

천무백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오늘 작은 연회가 열린다던 전각.

천무백은 그쪽은 사실 걱정하지 않았다.

혜량대사와 무량선사, 그리고 화산에서 온 수호검 청현진인도 뛰어난 고수였다. 하물며 장노도 같이 있지 않은가.

하여 천무백은 우선 위급한 곳부터 구원에 나섰다.

한데…….

“늦지 않길 바라야겠군.”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까지 느꼈던 것보다 가장 강렬한 기파의 충돌이 느껴졌다.

천무백은 선각의 인사를 뒤로한 채, 땅을 박찼다.

* * *

청현진인은 한 차례 공력을 쏟아내느라 완전히 진이 빠졌다.

단 한 번에 내공을 쏟아 길을 열었으나, 그 길은 이내 나타난 세 명에게 완전히 막혔다.

피풍의 사내 둘을 상대하는 건 무소선사와 혜량대사였다.

꽈앙!

한 차례 공방을 오간 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으음!”

상대의 공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젊은 사내 두 명의 공력도 만만치 않은데, 저기서 팔짱 끼고 지켜보는 노인네는 어느 정도겠는가.

‘무시무시한 놈들이다! 천 공자의 경고가 틀리지 않았어!’

사실 혈사문이란 존재가 밝혀졌어도, 반신반의했다.

이만한 사교집단을 뒤에서 수족처럼 다루는 흑막이 있다니, 쉬이 믿기 어려운 얘기가 아닌가.

한데 혜량대사는 그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단 자신을 탓했다.

끊임없이 숫자가 채워지는 복면인들은 둘째치고도, 이 피풍의 사내와 노인은 그들로서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이상하게도 빠른 내력 소모에 지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정상 상태라면 분명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다. 하나 지금의 몸상태론 쉽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반면에 백발 노인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계획에도 없던 소림을 멸문시킨다는 걸 나중에 알면 오성(五星)들이 뭐라 한마디 하겠지만, 겁먹어서 일찍이 하지 않은 걸 후회하겠군.”

노인은 이죽였다.

소림 멸문.

“언젠가는 해야 했지만, 좀 일찍 해도 나쁘지 않아.”

그들의 계획 중에는 언젠가 소림을 비롯한 정파의 멸문은 필연적이다.

다만 아직 무르익지 않은 지금 시점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흡족했다.

소림은 정마대전 때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했으니까.

“쯧쯧. 과거의 소림에 두려워하고 있었다니.”

혜량대사는 여유롭게 이죽이는 노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청현진인은 내력소모가 워낙 심해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있는 힘껏 싸우면 이 둘을 묶어 두고, 저 노인까지 어떻게 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면…….’

불현듯 그와 무소선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혜량대사의 생각을 읽은 듯 무소선사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혜량대사는 곧장 장노에게 전음을 보냈다.

[장 표두! 이곳은 나와 나한각주가 막을 터이니, 청현진인과 표국주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시오!]

“……!”

복면인을 하나씩 베어 가던 장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능하다면 청현진인과 함께 화산으로 가 주시오. 가서 오늘 있었던 참사를 전해 주시오. 그리고 나가면서 천 공자를 구해 같이 가 주시오. 천 공자라면 오늘의 일과 혈귀곡이란 놈들에 대해 충분히 증언해 줄 터이니.]

장노는 잠깐의 고심을 하다 이내 고갤 끄덕였다.

그도 중과부적이었다.

계속해서 달려드는 복면인들만 해도 버거운 데, 혜량대사와 무소선사가 상대는 피풍의 사내들은 자신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 뒤에서 여유롭게 웃고 있는 노인은 감히 쳐다도 못 볼 고수가 분명했다.

“국주님. 이곳을 빠져나갈 것입니다. 준비하시지요.”

“……알겠소.”

하나 좀처럼 틈을 만들기 쉽지는 않았다.

결국 틈을 만들어준 건 무소선사였다.

“지금이오! 장표두!”

무소선사는 피풍의 사내를 있는 힘껏 밀어내고, 장노에게 달려들던 복면인 셋을 장력으로 단숨에 날려 보냈다.

장노는 한쪽 어깨에 천문경을 업다시피 매달고, 있는 힘껏 널브러진 청현진인을 들쳐 맸다.

“끄억!”

그사이 무소선사는 피를 토하며 한 차례 바닥을 뒹굴었다.

피풍의 사내의 주먹이 그대로 복부에 작렬했던 터.

“사제!”

혜량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직 괜찮소! 사형!”

하나 심각한 내상을 입은 듯 무소선사의 얼굴은 시퍼렇게 변했다.

무소선사의 희생으로 장노는 청현진인까지 구해 전각을 빠져나올 틈을 볼 수 있었다.

하나 그때였다.

“어딜 가시오! 천국주!”

“……!”

싸움이 시작될 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던 백공양이 문을 틀어막고 나타났다.

“송진문주!”

혜량대사가 장탄식을 토했다.

백공양이 검을 겨눈 방향은 복면인이 아니라 장노와 천문경, 그리고 청현진인을 향해서니까.

‘천 공자, 그의 말이 모두 다 진실이었구나!’

백공양을 께름칙하게 여기긴 했지만, 소림이 봉문한 이후에도 꾸준히 연을 끊지 않은 몇 없는 속가문파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도 송진문으로부터 도움을 얼마나 받았던가.

때문에 혜량대사는 의심은 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우유부단함이 끝내 결정적인 순간에 치명적인 비수로 되돌아왔다.

“송진문주, 당신이 어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아니오?”

“무슨 말인가?”

“난 소림을 위해 문파를 뿌리째 뽑아 지원해왔소.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 했기 때문이지. 소림의 속가이니까. 한데 말이오. 우리가 소림을 지원하면서, 소림은 송진문을 위해 뭘 해줬소?”

“……!”

“아무것도 없지. 아무것도 없어. 송진문이 굶어가면서까지 소림을 지원했지만 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에 반해 저들은 달랐지. 소림에서 보내 달라고 했던, 단지 불경 하나를 중간에 빼돌려 달라는 별거 아닌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대가로 엄청난 힘을 줬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백공양의 두 눈이 충혈되듯 붉어졌다.

동시에 소림의 속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지독한 혈향이 흘러나왔다.

혜량대사는 침음을 삼켰다. 저 분위기와 혈향. 지금 상대하고 있는 피풍의 사내의 기운과 유사하다. 아니, 거의 일치한다.

‘나무아미타불…….’

당장이라도 백공양을 향해 장력을 쏟아내고 싶으나, 피풍의 사내를 상대하는 데도 급급했다.

백공양은 그런 혜량을 비웃었다.

“그리고 오늘 여기서 살아남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어야겠소이다. 그러니, 아무도 나가지 못하오. 표국주, 당신도 마찬가지야.”

째재재쟁!

백공양이 맹렬하게 검을 찔렀다.

장노가 황급히 검면으로 쳐냈다.

“큭!”

동시에 속이 진탕됐다.

장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나 무언가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백공양의 공격이 몰아쳤다.

내공의 차이가 절실했다. 장노는 한 합, 한 합 겨룰 때마다 내공이 한 뭉텅이씩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파악!

검을 쳐내자 백공양이 그대로 발로 장노의 가슴을 밀었다.

중심을 잃은 장노가 뒤로 쓰러지고 백공양은 그대로 뒤에 있던 천문경에게 검을 겨눴다.

“그러게, 적당히 좀 하시지 그랬소. 국주.”

“…….”

“적당히 오해 좀 사고, 조용히 구금당해 있다가, 나중엔 어영부영 증거 없다고 풀려났을 텐데. 저 우유부단한 소림방장이었으면 그래도 처벌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오.”

백공양이 이죽였다.

“사실 그쪽 막내아들놈이 와서 이것저것 쑤시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일은 이렇게 되지 않았소.”

“참으로 본인이 저지르고 있는 짓이 얼마나 개같은 짓거리인지 잘 알고 있나보오. 그래서 이렇게 혓바닥이 길지.”

천문경이 독설을 내뱉자 백공양은 잠시 흠칫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리 생각하던가. 어찌 됐든 그쪽도, 그쪽이 끔찍이 여기는 막내아들도 여기서 소림과 같이 죽을 거요. 그래도 다행이지 않소?”

푹!

“끄윽!”

백공양은 천문경의 어깨에 칼을 찔러넣었다.

통점이 모여 있어 고통이 배가 되는 혈자리였다.

그곳을 칼로 깊게 찌르자 천문경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극통에 눈이 뒤집히고 입가에서 거품이 올라왔다.

그 모습에 뒤늦게 몸을 추스른 장노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소림과 함께 불타면, 이와 같은 호상이 어디 있소이까. 소림의 고승들과 화장되다니 말이오.”

“으으윽!”

장노는 짧은 찰나 고심했다.

지금 상태론 절대 백공양을 이기지 못한다. 저 요사스러운 붉은 기운을 내뿜는 백공양은 이전보다 훨씬 강했다. 적어도 지금 저기 있는 피풍의 사내보다 조금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장노로서는 감히 상대하지 못한다.

하나 숨겨진 힘을 개방하면 다르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그는 청성표국이 표사로서 살아갈 수 없으리라.

소림 한가운데에서 마공을 쓴다면…….

그렇지만 장노는 결심했다.

그까짓 명예를 무엇 두려워하겠는가.

한데 장노는 나서지 못했다.

“……!”

고통에 시달린 천문경의 눈빛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장노는 순간 깨달았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을땐, 내 막내아들놈을 챙겨주시오.’

싸움이 시작될 때 천문경이 했던 말이다.

그러니 지금 천문경의 눈빛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그랬다.

지금 자신에게 백공양의 주목이 집중된 사이. 여길 빠져나가 천무백을 구하라고.

“흐흐. 이 와중에도 무슨 잔머릴 굴리고 있소? 표국주.”

백공양이 찔러 넣었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의 방향을 틀었다.

찌르기가 아닌 베기.

백공양의 팔이 휘둘려지는 순간.

이미 고통에 정신이 혼미하던 천문경의 눈에 언뜻 백공양이 몸이 크게 휘청이면서 붉은 안개가 휙 덮치는 듯 보였다.

자신의 피일까? 아니면 착각일까.

이내 목에 파고드는 칼날을 보며 천문경은 끝내 신음을 토하며 눈을 감았다.

“백공양! 개새끼야!”

허나 저 끝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사자후에 천문경은 감기던 눈을 억지로 떠올랐다.

왔다.

천무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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