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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45화 (45/318)

<검신재생 45화>

45. 이 땡중놈아

외부의 침입과 공격이 있을 때 가장 앞서 싸우는 무력집단이 바로 나한각의 나한승이다.

나한승들은 습격 즉시 일제히 머물던 나한각에서 뛰어나왔다.

108명의 정원은 18명씩 6조로 나뉘어 각자 흩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정예는 바로 1조였다.

1조는 무려 이백 명이 넘는 참배객이 머무르는 전각으로 곧장 향했다. 다행히 빨리 움직일 터라 아직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곧 이어지는 습격에 나한승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십팔나한진을 펼쳐라!”

1조장, 선각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지만, 정작 모인 건 열네 명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벌써 네 명의 나한승이 쓰러졌다.

십팔나한진은 열여덟 명이 모여 만드는 방진.

열넷으로는 그 위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방진을 짜는 나한승들의 얼굴에 단 한 치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기억해라! 우리가 무너지면 소림이 무너진다!”

비단 그것뿐 아니라 당장 나한승들 뒤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양민들은 어쩌란 말인가.

소림을 방문한 무림인들이 머무는 자혜각에서도 연신 병장기 소리와 비명이 튀어나오고 있다.

저들은 비단 소림뿐 아니라 소림에 있는 모든 걸 없애려는 작자들이다.

여기서 나한승들이 밀려난다면 그저 불공을 드리려 험한 길을 뚫고 온 양민들도 죽음을 면치 못할 터.

선각은 이를 악물었다.

푸악!

덮쳐오는 복면인의 머리통을 장력으로 호쾌하게 쪼갰지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펴질 줄은 몰랐다.

‘너무 많다!’

적들의 수준이 엄청 대단하지는 않았다.

다만 숫자가 턱없이 많았다. 반면 이쪽은 턱없이 부족했다.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나한승들을 제외하면 학승이나 일반 불승이 대다수다. 이제 무공을 배우는 어린 무승들은 정종 중의 정종인 소림 무공의 특성상 성장 속도가 매우 느린 터.

결국, 이 모든 걸 나한각에서 막아야만 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 내고 있지만, 한 놈을 처리하면 두 명이 불쑥 달려드는 끔찍한 상황은 암울하기만 했다.

“으억!”

“사제!”

그때 방진을 형성하던 나한승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십팔나한진은 피해를 최소화하고 상대에게 피해를 최대한 입히는 방진이다.

방진을 형성한 일인이 공격을 당하면, 그 공격을 다른 나한승들이 같이 받아 주면서 피해를 경감시킨다.

하여 단칼에 죽는 일은 없다.

있다면 그건 방진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고수거나.

“젠장! 뒤에도……!”

선각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방진이 취약한 뒤에서 기습.

선각의 눈에 다 해진 옷을 입은 채 무심한 얼굴로 칼을 꽂아 넣는 양민이 보였다.

“이미 소림 안에 놈들이 들어와 있었구나!”

선각은 장탄식을 토했다.

“으아아악!”

“살, 살려 주세요!”

“도망쳐!”

비단 하나가 아니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양민들 틈에서 무자비하게 칼을 난도질하는 놈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단순 무림 방파의 무인이 아니라 불가의 제자기도 했다.

나한승들은 어떻게든 죽어 가는 양민들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하나 그럴수록 손발은 어지러워지고 방진은 헐거워졌다.

안 그래도 적은 숫자가 아니던가.

“컥!”

또 한 명의 나한승이 쓰러졌다.

이젠 열둘.

나한십팔진은 십팔진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헐거워졌다.

선각은 암울함을 느꼈다.

끝없이 쏟아지는 적과 현저히 부족한 아군.

‘천년소림이 여기서…….’

그는 소림에서 나고 자랐다.

정확히는 소림 문 앞에 버려졌었다.

언젠가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사실을 듣고 원망을 하기도 했었다.

하나 소림에서 그는 불법을 배우고 무공을 익히며 증오심을 덜어냈다.

소림을 새로운 어머니로, 아버지로 여기며 살아왔다.

소림의 위대함을 듣고 자랐다.

정마대전 때 천하를 지키며 덧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선배의 계명을 외우면서 자랐다.

그래서 소림이 봉문을 거두고 강호재출도를 선언할 때 얼마나 설렜던가.

천하를 지키는 거대한 지붕.

대 소림사를 꿈꾸며 더 열심히 무공을 갈고 닦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대체 뭐가 대 소림사란 말이더냐!’

선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주위를 훑었다.

‘고작 소림의 품 안에 들어온 중생들을 지키지조차 못하면서, 천하를 지킨다니. 대체 무엇이 대 소림사란 말이더냐!’

천하를 지키는 지붕이라니.

정마대전에서 장렬히 스러져간 선배들을 떠올리며 선각은 자신이 미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소림에 불공을 드리려고 온 저 중생들마저 지키지 못하는데, 그것도 마귀 같던 마교도 아닌 이름도 모를 습격자들한테 말이다.

그런 사실이 온몸을 파고드는 칼날보다 아찔하고 고통스러웠다.

“사형! 이대로면 죽습니다! 우선 몸을 피하시지요!”

“어딜 피하느냐! 우리가 피하면 남은 이들은 어떡하란 말이냐!”

선각은 핏발 선 눈으로 장력을 마구 쏟아냈다.

이대로라면 이제 버틸 시간은 반각이 채 남지 않았다.

선각은 이대로 죽을지언정 피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소림 품에 들어온 모든 만물이 곧 소림이다! 나한승이란 이름에 맞게 자리를 지켜라!”

그렇게 소리치며 다시 복면인에게 장력을 날리려는 찰나.

허공에서 새하얀 광채가 쏟아졌다.

선각의 동공이 커졌다.

‘……부처가 보내신 신장이신가?’

불현듯 그런 말도 안 되는 허황한 생각이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비단 그뿐만 아니다.

지독한 어둠을 잡아먹으며 광채 속에서 튀어나온 사내의 모습은 강렬하다 못해 장엄했다.

사내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사방팔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찬란한 광채가 번쩍일 때마다 흉험한 기세가 쏟아지며 복면인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 모습이 마치 빛이 복면인들을 집어삼키는 듯한 모습처럼 비쳤다.

불에 날아들어 타오르는 부나방처럼 복면인들은 빛에 태워지듯 쓰러졌다.

“무애광명?”

나한승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선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마귀를 물리치는 지혜의 빛.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부처의 빛이 보였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외는 선각의 목소리가 떨렸다.

* * *

“이것들 생각보다 규모가 큰데?”

천무백은 인상을 쓰며 검을 휘둘렀다.

소림을 습격한 혈귀곡의 숫자는 천무백의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었다.

소림 전체가 습격당하는 중이었으니까.

‘대략 사백 명은 되는 거 같은데…….’

사백 명이라. 한 번의 기습에 동원되는 인원이 이 정도라 말이지.

하나 같이 적어도 이류급 이상은 되는 무사들.

스걱!

또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무엇을 먹었는지는 몰라도 저들은 동료들이 무참히 죽어 나가도 뒷걸음치지 않고 묵묵히 덤벼왔다.

‘물론 소림을 치는 거니까 엄청 많이 끌고 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류급 사백 명 무사를 동원하는 건 어마어마한 규모다.

당장 소림만 해도 현재 108나한승을 제외하면 변변찮은 무력집단이 없지 않은가.

‘하긴. 이 정도는 돼야 혈사문을 수족으로 부르지.’

그럴 만했다.

사실 천무백에게 혈사문 장로들과 하남 근거지가 너무 쉽게 허물어져서 그렇지.

수백 년 전에도 혈사문은 강호를 진동케 한 사교집단이 아니던가.

명문정파며, 사파며 닥치는 대로 무인들까지 제물로 공양하며 흡정마공을 펼치던 미친놈들이다.

그런 미친놈들을 그저 말 잘 듣는 개처럼 다루는 놈들이니, 혈귀곡도 절대 만만치 않은 놈들이 분명했다.

‘아무리 세가 약해진 소림이라 한들, 그 소림을 멸문케 한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미친놈들이기도 해.’

강한 놈보다 미친놈이 더 무서운 게 강호기도 하고.

‘피에 미친 귀신들의 계곡이라. 하면 그 수장 놈은 미친 귀신이 맞겠어. 광귀 말이야.’

별호에 광(狂)자가 들어간 놈은 꼭 한 번씩 안 좋은 의미로 강호에 이름을 떨치기도 했고.

천무백은 대충 혈귀곡의 우두머리를 광귀(狂鬼)라고 마음대로 이름 붙였다.

어차피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별호는 없을 터.

천무백 마음대로 불러도 상관없으리라.

“그래. 어디 한번 사생결단을 내보자꾸자!”

천무백은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복면인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한승들과 생사를 다투던 이들이 너무 힘없이 쓰러지자 나한승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복면인들의 칼날은 광채에 휩싸여 힘없이 방향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그 모습에 나한승들은 잠시 넋을 놓다가, 이내 소리쳤다.

“모두 십팔진을 해제하고 각자 맞서 싸워라!”

천무백은 그렇게 외치는 선각을 흘깃 바라보곤 피식 웃었다.

‘소림은 소림이야. 여기가 몇 번째더라.’

천무백은 사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위험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고 있었다.

혈귀곡에 대한 얘기를 터뜨리면서 소림이 습격당한 것도 있으니, 천무백도 책임감을 느끼고 소림을 지키려 했다.

‘경천혼공이 도움이 되는군.’

외기에 민감한 상단전과 경천혼공의 효능은 여기서도 발휘됐다.

기감을 넓게 퍼뜨려 소림 전체에서 일어나는 기파의 충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덕택에 천무백은 가장 위기에 빠진 상황부터 구원했다.

“사람들을 우선 지켜라!”

천무백은 온몸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바들바들 떠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나한승들을 바라봤다.

‘무파라는 것들이. 단 한 명도 비서각은 지키질 않는구나.’

천무백은 헛웃음이 나왔다.

중원의 문파라면, 문파가 습격당했다면 응당 가장 중요한 곳을 최우선으로 지키기 마련이다.

보통 그 문파의 모든 무학이 담긴 비급을 모아놓은 곳이 그렇다.

그게 무파가 아닌가.

한데 지금의 소림은 아니었다. 물론 비서각을 지키는 소수의 인원은 있지만, 대다수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곳은 바로 이런 곳들이었다.

소림을 찾아온 이들을 지키기 위해 소림은 싸웠다.

무학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실에 천무백은 불현 듯 전생을 떠올렸다.

정마대전이 종장을 향해 달려가던 그때.

천무백은 무너져 가던 소림을 찾았다.

봉문이란 선택을 앞두고 있던 소림은 마교에 대적하여 최후의 결전을 준비 중이었다.

그때 천무백은 적불암을 같이 봉인했다.

‘어르신, 소림은 약해질 것이오.’

‘약해지겠지. 모든 걸 이 적불암에 봉인하니까.’

‘무공은 끊어질 것이고, 영약은 사라져 내공 역시 부족해질 것이며 소림을 지킬 강한 무승은 사라질 것이오. 어쩌면 나한승들도 사라질 수도 있겠지요.’

‘그렇겠지.’

‘그리되면 소림은 약해질 게 분명하오. 하지만 나는 믿소이다. 소림은 다시 굳건해지고, 강해질 것이오.’

‘…….’

‘소림의 정신은 강하고, 단단할 것이오. 약자를 가엾게 여기고 악을 앞에 두고 물러서지 않으며 부처의 마음을 잃지 않을 것이니. 소림은 강해질 것이오. 검신 어르신. 그렇지 않겠소?’

천무백은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소림의 정경을 둘러봤다.

중원제일의 성세를 자랑하던 대 소림사의 모습은 없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지고 불타는 처참한 모습이 가득하다.

그 모습 속에서 천무백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죽음을 코앞에 두던 전전대 소림방장, 천승을 떠올렸다.

천무백은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소림은 강해졌다. 이 땡중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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