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44화>
44. 악인이 빛을 만날 때.
전각 밖의 상황은 예사롭지 않았다.
전각을 물 샐 틈 없이 둘러싼 복면인들의 숫자는 대략 삼십여 명.
그리고 그런 복면인들과 대치하는 소림의 승려가 열 명이었다.
“천 공자님!”
아직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린 승려였다.
천무백은 나한각주인 무소선사 뒤를 쫓아다니던 승려중에 원안이란 계명을 떠올리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서 피하시지요! 습격입니다! 여긴 우리가 막겠습니다!”
천무백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숫자에서 차이는 명백하다. 더구나 복면인들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지만, 그에 반해 대치하는 인원의 파릇파릇한 머리를 보니 아직 어렸다.
기껏해야 이제 무공을 익히거나 배우는 수준에 불과할 터. 천무백이 보기에도 일류는커녕, 삼류를 간신히 넘길 수준이다.
원안 정도만 이류, 잘하면 일류 정도로 봐줄 정도다.
하기야 대성하면 능히 천하를 진동케 하는 소림무공이지만, 그 과정이 느리기 짝이 없는 게 바로 소림의 무공이니까.
“어서 안의 환자들을 데리고 피하십시오! 소림은 부처의 품을 찾아온 이들을 지킬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말하는 저들의 모습에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록 40년 전의 소림과 비교하면 턱없이 약하고 부족했지만, 정신만큼은 그대로였다.
“저들은 아마 절 노리고 찾아왔을 겁니다.”
“네? 습격자들이 천 공자를 노린다고요?”
천무백은 담담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실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아무리 배짱이 두둑해도 당황하거나 압박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복면을 써 험악한 표정은 드러나지 않아도,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짐작이 되지 않은가.
장내를 가득 채운 살벌한 분위기는 바로 살기였다.
무형의 살기가 다름 아닌 천무백에게 집중되고 있는 건, 천무백 본인이 잘 알았다.
원안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어찌 저토록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천무백은 담담한 표정으로 주위를 슥 둘러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은 안 왔네?”
천무백은 미간을 확 좁혔다.
당연히 곧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그중엔 저번에 봤던 피풍의 사내가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없지 않은가.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었다.
“원안 스님.”
“네?”
“지금 여기만 습격당한 겁니까?”
“아니, 잘,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습격에 맞서 싸우다 밀리고 밀려 이쪽까지 온 것이니……!”
“흠. 나만 죽이려는 게 아니라 아예 소림을 지워 버리겠단 속셈인가?”
“……!”
원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천 공자!”
“이거야 원. 내 생각보다도 더 미친놈들이었네. 아무리 그래도 소림을 지워 버릴 생각을 해?”
솔직히 천무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것들이 진짜 미쳤나?‘
천무백이 혈귀곡을 소림에게 운을 띄웠다고 해도, 혈귀곡에선 자신만 노리리라 여겼다. 중원에 혈귀곡이란 이름이 흘러나가려는 걸 틀어막으려면 소림 자체를 지워 버려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소리인가.
‘천마 놈도 수하 놈들 우르르 끌고 와서 작정하고 쳤던 건데.’
물론 그때의 소림과 지금의 소림은 다르지만 말이다.
아무리 세가 약해진 소림이라고 해도. 자신들의 정체에 대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고 지워 버린다는 생각은 천무백으로서도 기함할 따름이었다.
‘하면 얘들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건데. 그게 분수도 모르는 자만감인지, 진짜 실력에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꽤 골치 아픈 일이다.
더구나 지금 소림사는 불공을 드리려 찾아온 참배객들이 많았다.
천무백은 손을 쭉 폈다.
“스님.”
“네.”
“전각에 있는 환자들을 지켜 주십쇼. 안에 능허 놈이 있는 데 영 믿음직해야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몸으로 어찌…… 어?”
원안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
담장 위와 길옆으로 곳곳에 불을 밝혔지만, 세상은 어두웠다.
늦은 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불을 피워도 어둠은 물리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한데 원안은 그 어둠이 걷히는 광경을 보았다.
웅웅웅웅!
귓가로 들려오는 거센 공명음과 함께 천무백의 주위로 찬란한 광채가 쏟아졌다.
그 모습에 당황한 건 비단 원안뿐만이 아니다.
전각을 둘러싼 복면인들의 기세도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난생처음 보는 괴이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으니까.
악인들은, 마인들은 찬란한 빛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다.
그 거부감은 격렬한 폭력성으로 드러났다.
일시에 천무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한 점에 집중되는 검은 천무백을 둘러싼 광채와 충돌했다.
쩌저저저저정!
“……!”
강력한 내력이 담긴 검격이 천무백의 광채에 부딪히는 순간 힘없이 방향을 잃고 헤맸다.
마치 검에 담긴 내력을 그대로 빨아들이는 듯한 괴이한 광경이었다.
달려들던 복면인들의 눈에 아연함이 떠올랐다.
하나 멈출 순 없었다. 오히려 당장 죽이지 않으면 위험하리라는 건 그들의 머릿속에 당연히 떠올랐다.
복면인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쏟아내며 검을 휘둘렀다.
“…….”
천무백은 무수히 쏟아지는 칼날의 숲에 몸을 던졌다.
삼십 명이 일제히 쏟아내는 엄청난 맹공에도 천무백은 단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하면서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가볍고, 빠르게 경쾌하게 보법을 밟으면서 쭉 들어오는 칼날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냈다.
동시에 검을 휘둘러 놈의 어깨를 베었다.
푸악!
복면을 써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동자는 보인다.
천무백은 눈동자에 새겨지는 지독한 공포와 고통을 똑똑히 봤다.
간혹 사람들은 묻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들도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냐고.
‘당연하지.’
악인들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진정 강렬한 빛을 만난다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 마귀들이 부처님 앞에서 벌벌 떨어댔던 것도, 중원을 먹겠다고 장담하던 마도의 인물들이 매번 실패했던 것도.
결국, 그들이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있어서다.
그리고 지금, 그 존재는 바로 천무백이었다.
직도를 쭉 뻗어오는 사내의 목을 치는 순간, 좌우에서 협공이 들어왔다.
쐐애액!
이대로 진행하면 정면의 적은 죽일 수 있어도, 양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은 피하지 못한다.
일대 다수의 싸움에서 한명이 고립될 수밖에 없는 구조의 약점이었다.
한데도 천무백은 멈추지 않고 목을 베었다.
쩌저저정!
좌우에서 매섭게 들어온 공격은 다시 한번 천무백의 광채에 삼켜졌다.
“이 미친!”
복면인들 중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천무백은 곧바로 몸을 빙그르르 돌려 검을 찔렀다.
푹푹푹!
세 명의 목덜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천무백은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은밀히 접근하며 뒷목, 허리, 발목을 노리던 세 명에게 검을 쭉 뻗었다.
단 세 번의 찌르기에 피를 내뿜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천무백은 검기를 쓰거나 하지 않았다. 오로지 단순하게 검으로 찌르고, 베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내공을 써가며 검기를 줄줄 흘려 낼 필요가 없었다.
천무백은 그렇게 단순하면서도, 저들이 도저히 막지 못하는 방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기세등등하게 살기를 흘려 내던 습격자들은 이내 사냥당하는 짐승들처럼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싸움이란 건 서로 공방이 오가야 성립된다.
한데 지금은 싸움이라고 볼 수 없었다.
천무백은 방어를 도외시한 채 오로지 공세만 펼쳤다.
싸움에서 방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건 엄청난 이점이다. 모든 힘과 속도, 여력을 오로지 공세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끄아아악!”
달려들던 복면인들은 광채에 막혀 비명을 내지르며 무너졌다.
“나, 나무아미타불.”
원안은 저도 모르게 염불을 외웠다.
불가의 제자로서 지독한 살생의 장면을 보고 있건만, 그는 오히려 경외 어린 시선으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살벌한 기세로 공격해 오는 복면인들이 천무백의 광채 앞에 무너지는 장면이, 마치 마귀들을 삼켜 버리는 불가의 팔부신장처럼 보이지 않은가.
그 어떤 공격도 저 광채를 막지 못했다.
“무애광명…….”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부처의 빛.
비단 그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같이 적들과 대치하던 사제들도 모두 합장하며 염불을 외웠으니까.
* * *
상황은 좋지 않았다.
“봉문을 거두자마자 이런 습격이라니!”
혜량은 탄식하며 손을 뻗었다.
손에서 뻗어지는 장력에 달려들던 복면인이 괴성을 내지르며 뒤로 우르르 나자빠졌다.
작은 연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도 치열하게 싸웠다.
무소선사와 혜량대사는 있는 힘껏 습격자들을 처리했다.
연회에 참여한 청현진인도 검을 휘둘렀다. 매화가 피어오를 때마다 여지없이 서너 명의 목숨이 사그라졌다.
“국주님, 제 뒤에만 계십시오.”
천문경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노도 덤벼오는 복면인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베고 있었다.
그렇게 전각 내부에 쓰러진 복면인들의 시체가 수두룩해졌지만, 싸움은 끝이 없었다.
어느 정도 숫자를 줄였다고 생각하면 또 어디선가 복면인들이 문을 박차고 칼을 휘둘러 왔다.
“비단 여기뿐만이 아닌 거 같습니다, 사형!”
무소선사가 굳은 얼굴로 속삭였다.
습격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났건만,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적어도 나한각의 나한승들이라도 반응이 있어야 한다.
이 정도 소란이면 말이다. 한데도 지원이 없다는 건, 비단 이곳뿐 아니라 소림 곳곳이 습격을 받았다는 의미다.
“사형, 어쩌면 여길 피해야겠습니다.”
“나한각주…….”
“제가 버티겠습니다.”
“그럴 순 없다. 여기서 버텨서 이겨 내면 그만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사형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체로 복면인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소림의 세가 아무리 약해졌다고 한들, 나한승들을 지휘하는 무소선사와 소림방주인 혜량대사의 무공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뿐인가. 손님으로 왔던 청현진인도 화산의 수호검이란 별호처럼 막강했다.
또 의외로 천문경을 지키며 버티고 있는 장노도 일개 표사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견실한 무공을 보여 줬다.
다만, 계속되는 공격에 몸에 점점 부담이 심해졌다.
끊임없이 내력이 소모되다 보니 근육에 피로함이 더해졌다.
또 평소보다 내력이 더 빨리 고갈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적들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치 축차소모를 노리는 듯이.
적들의 숫자가 줄지 않는 이상 무리였다.
“방장님, 본도가 길을 한번 뚫겠습니다.”
그때 청현진인이 나섰다.
“진인!”
“잠깐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때 같이 빠져나가서 정비하지요.”
청현진인은 그렇게 말하곤 검을 곧추세웠다.
웅웅웅!
동시에 검의 주위로 회오리치듯 대기가 들끓었다. 강렬한 기파가 일시에 집중되더니 청현진인은 망설임 없이 검을 쭉 내질렀다.
꽈과과과광!
마치 벽력이 내려치듯 강렬한 기파의 검기가 일직선으로 쭉 날아갔다.
“……!”
정면에 있던 복면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검격이 스쳐지나가는 양편의 복면인들도 피를 흩뿌리며 마구 쓰러졌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나 그만한 내공을 쏟아 낸 만큼, 청현진인은 입가에 핏물을 머금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휘청거렸다.
“진인!”
“사형, 제가 진인을 업겠습니다! 어서 빠져나가시지요!”
하지만 이내 그들은 못 박히듯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쓰러진 복면인들 사이로 이전 복면인들과는 다르게 피풍의로 몸을 감싼 사내 둘과 백발의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과연 화산 수호검이라더니. 몸 상태도 범상치 않을 텐데 이만한 공력이라니. 아주 대단하오.”
백발 노인은 주위의 참상을 보면서 읊조렸다.
감탄한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 속에 담긴 건 명백한 조롱이였다.
혜량대사를 비롯한 일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노인에게 난폭한 기세가 느껴졌으니까.
비단 노인뿐 아니다.
뒤에 있던 두 명의 피풍의 사내도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노인이 뒤를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자칫하면 위험한 일이 될 뻔했소. 십팔성(十八星)”
“……죄송합니다. 저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습니다.”
“아니, 뭐 됐소. 이왕에 소림을 없애버리는 게 차라리 낫지. 더구나 소림도 우리 이름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들의 대화에 혜량대사는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저들이 누군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혈귀곡!”
그러자 노인이 빙긋 웃었다.
“물론 언젠가 우리가 소림을 멸할 건 분명했으나, 그게 지금은 아니었지. 우리 이름을 알게 됐으니 어쩔 수 없소. 정파 쪽에서 우릴 알면 큰일이거든.”
노인이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러니, 오늘 소림은 없어져 줘야겠소이다. 혜량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