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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43화 (43/318)

<검신재생 43화>

43. 어지간히 늦게 왔네

“바빠 죽겠는데 어딜 다녀오셨수?”

“어째 말투가 퉁명하다?”

“누군 침통 구하러 저 산 아래까지 왕복해서 뭐 피곤해서 그런 건 아니고.”

“능허야.”

“……?”

“가서 눈 좀 붙여라.”

“엑?”

능허가 뜨악한 얼굴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이 자식이 왜 자상하게 굴어?’

뭘 잘못 먹었나.

처음이다. 천무백에게 가서 쉬라는 말을 들은 건.

물론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능허가 천무백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일 있습니까?”

“잠 좀 자 둬라. 내공 운기 좀 하면서 몸 상태 잘 유지해.”

거기까지 말하자 능허는 눈치채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언제요?”

“눈치는 참 빨라요. 행동도 눈치만큼 빠르면 얼마나 좋을까.”

“내 주군 곁에 다니면서 늘어난 건 눈치뿐이오. 언제 쳐들어온답니까? 아니 혈귀곡 놈들입니까? 혈사문? 그도 아니면 백공양이가 칼춤 춘답니까?”

“혈귀곡.”

능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까지 혈사문 놈들 추적하고, 때려잡고, 여기까지 왔건만.

이젠 흉악한 혈사문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는 혈귀곡이다.

“걔들 혈사문 보다 셉니까?”

“그렇겠지?”

“어째 갈수록 힘들어지네. 오늘 밤입니까?”

“오늘은 아닐 거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만간이지, 능허야.”

“네.”

“백공양이 감시 잘하거라. 그놈이 수상하게 움직이면 바로 보고해.”

“감시는 내 전문이지. 걱정하지 마쇼. 내가 이쪽 스님들하고 아주 친해졌으니까. 그쪽 전각 움직임은 마음만 먹으면 다 알아챌 수 있지.”

능허는 그렇게 말하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아, 주군은 안 쉽니까? 보아하니 백공양이 뒤꽁무니 쫓아갔다 오는 거 같은데.”

“이야. 우리 능허 많이 컸네. 이제 내 걱정도 다 하고.”

“와. 제 아들뻘, 조카뻘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진짜 어안이 벙벙하네요.”

“침통 두고 가라.”

“네네. 전 심부름도 했으니 이만 쉬러 가겠습니다!”

능허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전각을 나가기 전 고개를 돌려 천무백을 바라봤다.

‘거 참…….’

꼭 이렇게 보면 또 자상해 보이기도 해.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기색의 환자들을 특유의 미소로 안심시키며 침술을 펼치는 모습.

능허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팔을 걷어붙이고 다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같이 하면 일찍 끝나겠죠?”

천무백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냐. 뭐 잘못한 거 있냐?”

“거 잔심부름 같은 거나 시키쇼. 그쪽은 신의라는 명성에 걸맞게 의술을 펼치시고.”

“내가 사람 하나 갱생시켰나 보구나.”

“그런가 보네. 천하의 독안사 능허가 아주 대단한 의원 옆에서 심부름이나 하다니 말이오.”

능허는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천무백의 일을 도왔다.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소림에 와서 그런가. 쓸데없이 마음이 편해지는군.’

물론 아직 편히 마음을 풀 때는 아니다.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천무백의 마음속엔 검이 곧게 세워졌다.

‘심상치 않은 놈인데.’

천무백은 백공양이 만났던 피풍의 사내를 다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마기의 일종이긴 한데, 감이 안 잡히는군.’

천무백도 살짝 당황스러웠다.

상대에게서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파와 분위기를 읽으면, 그가 가진 무공을 짐작할 수 있다.

일단 혈귀곡이 마도 쪽임은 확실했다. 느껴지는 건 분명 마기였으니까.

한데 좀 특이했다.

‘마기는 마기인데, 마치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오히려 정파의 내공과 유사했어.’

본래 마기는 난폭한 기질이 가득하다. 당장이라도 날뛰고 물어뜯을 것 같은 짐승 같은 기운. 그래서 마기를 쌓은 마인들의 기질 역시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걸 제어할 수 있는 고수들도 손속만큼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렇다.

마인들이 잔혹하다는 관념이 그리 생겨나지 않았는가.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한데 피풍의 사내는 분명 마기였으나, 기질은 오히려 정파의 내공처럼 도도했다.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했다.

마기는 난폭한만큼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하나 난폭한 기질을 제어하기 위해 스스로 마기에 물들다 보니, 언제든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한데 마공의 강력함을 그대로 가지면서도, 정공처럼 안정적인 내공이라면?

‘어떤 놈이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기똥찬 걸 만들어놨네.’

물론 단순히 심증에 불과하다.

제아무리 천무백이어도 먼 거리에서 느낀 외기만으로 모든 판단을 내릴 수는 없으니까.

다만 확실히 경계할 필요는 있었다.

‘더구나 놈들이 표물을 진짜 이용하려고 빼앗은 거라면…….’

빼앗긴 표물은 십송율이란 불경이다.

정확히는 그 십송율을 다시 재해석해서 편찬해 낸 새로운 판본이다.

혜량대사는 단순한 불경이라 말했지만, 천무백은 진실을 알았다.

‘고대 천축에서 전해져 온 불경.’

거기에 담긴 의미를 만일 제대로 알고 강탈한 것이라면…….

“뭐, 뒈지게 패면 되지.”

“……저한테 한 말 아니죠?”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소 찜찜해진 능허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 * *

“소림의 수십 년 넘은 속가문파로서, 송진문을 대표해 봉문을 거두고 강호 출도를 선언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옆에 있던 무소선사는 뭔가 찜찜한 얼굴로 백공양을 흘겼으나, 혜량대사는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합장했다.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우리 선대부터 맺어온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이토록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백공양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잔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소림이다 보니 술이 아니라 곡차였다. 그래도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나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무소선사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소림이 재출도를 선언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는바, 제 사비를 털어 크게 축하연을 열고 싶었지만, 상황이 아쉽군요.”

“그야 우리는 혈사문을 추적하고 있고, 또 역병환자를 치료중이니 거하게 축하연을 벌이기는 그렇지 않겠소.”

무소선사의 날선 말에 백공양이 웃었다.

“하니 이렇게 간소한 식사 자리라도 마련해준 것에 감사합니다.”

백공양은 그렇게 말하며 잔을 돌렸다. 은은한 향이 풍기는 상급의 차였다. 재정상태가 영 말이 아닌 소림에서는 즐기기 어려운 고급품이었다.

이 자리는 송진문이 마련했다. 상등품의 차도 백공양이 준비했다.

자리에는 소림의 인물뿐 아니라 최근 소림의 출도선언에 방문한 몇몇 무가의 무인들도 있었다. 심지어 청성표국의 천문경과 장노까지 있었다.

백공양은 천문경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 듣기로 이번 표물 강탈사건에 혈사문이 관련되었다고 들었소. 역병을 퍼뜨리는 흉악한 사교집단이 내 무사들을 죽였다니, 이 원통한 심정에 그간 몹쓸 짓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문주님. 이해합니다.”

“청성표국의 자작극이 아니고 혈사문이 저지른 짓이 분명하니, 내 그간 벌인 행동을 사과드리리다.”

천문경은 웃으면서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팽팽 돌아갔다.

갑작스레 바뀐 백공양의 태도가 의뭉스러웠다.

물론 명분은 충분하다. 소림에서 혈사문의 범행일 확률이 높다고 얘기했으니, 송진문에선 청성표국에 사과하는 그림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하나 오랫동안 사람을 상대해온 천문경은 백공양에게서 느껴지는 의뭉스러움에 머리가 복잡했다.

‘흐흐. 머리 굴려봤자 뭐 알겠느냐.’

백공양은 그런 천문경의 마음을 짐작했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도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혜량대사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백공양은 그에게 다가가 잔을 건넸다.

“여기서 그 이름 높은 화산의 청현진인을 뵙다니요. 이것 또한 인연이겠지요.”

“본도는 그저 평범한 도인입니다. 이름 높다니요. 과찬이십니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눈썹이 호선을 그리자 그런 날카로운 인상도 많이 흐려졌다.

‘만만치 않은 놈인데. 잘 처리할 수 있으려나.’

백공양은 겉으로 웃으면서도 속은 복잡했다.

사실 갑자기 이런 자리를 마련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화산의 청현진인이 소림을 갑작스레 방문한 탓이다.

‘수호검 청현진인이라. 껄끄러운 놈이다.’

곧 혈귀곡이 천무백을 제거할 작정이었다.

천무백 뿐만 아니다. 혈귀곡은 소림의 혜량과 무소선사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그 둘은 천무백에게 혈귀곡에 관해 들었을 확률이 높으니까.

사실 이 계획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백공양은 경을 쳤다.

하나 피풍의 사내가 다시 돌아왔을 땐 홀로 오지 않았다.

적어도 그만한 괴물 몇을 더 대동하고 나타났다.

하지만 청현진인이란 변수가 나타났다. 혈사문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며 방문한 청현진인은 범상치 않은 고수다.

그러다 보니 불가피하게 이런 자리를 꾸몄다.

‘제아무리 천하고수여도 몸속에 독을 품고 제 실력을 발휘할 순 없지.’

치명적인 독은 아니다.

먹기만 해도 즉사에 이를 정도로 극독이라면 사천당문에서나 구할 수 있으리라.

그런 독을 밀반입하기 쉬운 것도 아니며, 효과가 즉시 발휘된다면 오히려 금방 들킬 염려가 있다.

백공양이 준비한 건 단순히 내공운용을 다소 ‘불편’하게 만드는 수준에 불과한 독약이었다.

아예 내공을 쓸 수 없게 하는 독을 쓰면 좋겠지만, 상대는 소림방장과 수호검 청현진인이다. 그 정도는 입만 대도 눈치챌 확률이 높았다.

‘이건 워낙 미미해서 그저 톡 쏘는 맛이라고 느낄 뿐이지.’

또 실제로 내공을 운기해 봐도 따로 특이하다고 생각할 만한 게 없다.

다만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다 보면 그 미미한 효과가 내공운기에 영향을 미치리라.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그 영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 정도면, 그놈들이 충분히 다 처리하겠지.’

다만 아쉬운 건 천무백이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천공자는 오지 않는 것입니까?”

“돌봐야 할 환자가 있으니 참석치 못하는 것에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호오. 과연…….”

그 말에 혜량대사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정말 대단하오. 천 국주님. 아드님께서 훌륭한 의술에 마음가짐까지 부족한 게 없구려.”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듣자 하니 이 역병의 근원이 혈사문인 걸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고, 또 의술은 하남신의라 칭할 만큼 대단하다고 하던데…….”

청현진인의 말에 혜량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진인께서도 크게 감탄하실 겁니다.”

“대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꼭 만나보고 싶군요.”

그 모습에 백공양은 속으로 실소했다.

비록 이 자리에서 다 처리하는 계획은 깨졌지만, 오히려 그게 천무백에겐 치명적이리라.

적어도 혜량대사와 청현진인, 그리고 무소선사 곁이면 조금이라도 버틸 가능성이 있겠지만.

홀로 있다면 그들에게 아주 쉬운 먹잇감 아니겠는가.

‘곧 만나게 될 거다. 지옥에서.’

* * *

“왜 그 자리를 거절했습니까? 백공양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여기 환자들 안 보이더냐.”

“어휴. 풀떼기만 먹는 것도 질렸는데. 거기 가면 좀 제대로 밥이나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능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깨끗한 수건에 물을 적셔 환자의 머리에 올렸다.

그 모습에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험상궂은 외모에 병자를 간호하는 꼴이라니. 퍽 웃겼다.

“가지 그랬냐.”

“내참. 어색해서 어떻게 갑니까. 표사들하고 친하지도 않고, 장노? 그 살벌한 눈빛의 노인네는 내가 그쪽 곁에 있는 것도 탐탁지 않아 하니. 어색해 죽습니다.”

“친구 없는 걸 길게도 말한다.”

“썅.”

“내가 그 자리보다 편하다니. 나도 참 무른가 싶다.”

“물러요? 근래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웃깁니다.”

“지금이라도 밥 먹으러 가라.”

“내 그래도 의리가 있지. 주군으로 모시기한 양반이 먹지도 않고 의술을 펼치는데 어찌 그렇겠소.”

“후회할 텐데?”

“후회요?”

“뭐. 나도 손 하나 더 있으면 편하긴 하겠지.”

“네? 갑자기 뭔 소리…… 으음!”

천무백의 의미심장한 말 직후 능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른거리는 촛불 너머 창으로 숱한 그림자들이 우수수 나타났다.

커다란 전각의 창호지 너머로 드러난 그림자.

능허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다.

“쓰벌. 숫자 세다가 늙어 죽겠네.”

“능허야.”

“드디어 온 겁니까?”

“여기 환자들 지켜라.”

“…….”

“나도 손이 두 개고 발이 두 개인 인간인지라, 놓치는 놈이 있을 거다. 네가 지켜라.”

“썅. 흑도 놈한테 양민을 지키라고 하는 양반은 그쪽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능허는 무식한 박도를 꺼내 들었다.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천천히 전각 밖으로 걸어 나갔다.

복면인들이 전각을 크게 둘러쌌다.

칼날 같은 기세가 천무백에게 쏟아졌다.

천무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능허보다 느린 새끼들. 어지간히 늦게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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