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42화 (42/318)

<검신재생 42화>

42. 부처는 개뿔

혜량대사는 심각한 얼굴로 무소선사와 마주 앉았다. 무소선사는 새삼 놀랐다. 저토록 번뇌가 많은 표정은 처음 봤다.

무소선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천 공자의 한마디에 봉문을 거둬들이라니요. 대체 적불암이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강호재출도를 선언하는 건 봉문한 문파에서 쉬운 결정이 아니다.

봉문은 문파를 지키기 위한 자위적인 수단이다.

강호활동을 일체 하지 않겠다는 의미니까.

한데 봉문을 거둬들인 건, 곧 강호활동을 한다는 의미다.

강호의 칼날 위에서 문파를 지켜야 힘이 있어야 봉문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무소선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 봉문을 거둬들이란 천무백의 제안에 무소선사와 혜량대사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어진 천무백의 한마디에 혜량대사는 40년 만에 봉문을 거둬들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적불암의 붉은빛을 없애 준다고요? 저는 소림에서 평생 수행했는데 적불암이란 건 처음 들어봅니다.”

“그래서 이상한 것이오. 각주도 듣지 못한 곳을 외부인인 천 공자가 알고 있소. 하물며 그 숨겨진 의미까지 알고 있더군.”

“…….”

“원래는 수많은 고승이 수행했던 동굴이오. 불상이 놓여진 동굴.”

“그런 동굴이라면 숭산에 많지 않습니까?”

“단순히 그랬다면 내가 천 공자의 제안에 이리 결정을 내리지 않았겠지. 적불암은 40년 전, 봉문을 선언할 당시 봉인된 장소라오.”

“봉인이요?”

“정마대전 당시 천마와 마인 놈들이 소림을 직접 공격한 적이 있소.”

“그렇습니다. 그 사건 때 괴멸적인 피해를 보아 소림이 봉문을 결정한 거 아닙니까?”

혜량대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지간이기도 하지만 무소선사는 혜량보다 적어도 열 살은 더 어렸다.

당시 사건 때 무소선사는 열 살도 되지 않는 꼬맹이였지만, 혜량은 스무 살은 됐기에 그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당시 전대 선배님들께선 봉문을 선언하기 전에, 마교가 공격해 오리란 소식을 듣고 소림의 모든 비급과 영약들을 한데 모아 숨겼소.”

그쯤 되자 무소선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혜량대사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게 적불암이란 말이니까?”

“그렇소. 수천 년의 소림사의 역사와 비고, 모든 영약과 보물이 봉인되어 있지.”

“그걸 천 공자가 어찌?”

무소선사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혜량은 무거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천 공자에게서 불가의 기운이 느껴지긴 하나, 그가 불가와 인연을 맺었는지는…….”

“이번 사건을 조사하면서 청성표국을 조사했습니다. 천 공자에 대한 정보도 있지만, 이상할 따름입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방안에서 악기와 서화만 즐기던 한량이라고 하더군요.”

“으음.”

“그런 천 공자가 어떻게 적불암을 알고 있을까요? 저도 모르던…….”

“나만 알고 있었던 것이오. 하면…… 천 공자가 전대 방장이나, 그 전 세대의 선배에게 들었다는 것인데.”

“…….”

“적불암이 봉인된 이후 안에 있던 부처님에게서 붉은 빛이 감돌고 있소. 그래서 그 붉은빛이 사라질 때가 우리가 봉문을 풀어야 하는 때라고 전대 방장님께서 말씀하셨소.”

“으음!”

“봉인은 복잡하게 되어 있소. 40년 전, 최강자였던 창천검신과 젊은 나이에 최고의 진법가란 평가를 받던 묘선생, 그리고 당대 방장이었던 천승 어르신께서 함께 하신 것이니.”

“……!”

“그만한 봉인을 푼다는 건, 소림이 강호에 나가도 과거의 영화처럼 당당한 힘을 갖춘 뒤에나 가능한 일이오. 그러니 붉은 빛이 사라질 때 봉문을 거둬들이란 건, 그들의 봉인을 풀만큼 소림이 과거의 저력을 되찾았음을 의미하겠지.”

“으음!”

“하지만…… 만일 천 공자가 진정 봉인을 완벽히 풀 수 있다면, 그것도 부처께서 안배하신 인연이 아니겠소?”

무소서사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혜량대사가 단순히 저 말만 듣고 봉문을 거둬들이는 결정을 내린 건 아니다. 적불암의 비사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천무백의 지식은 차치하고서도, 천무백은 직접 나서서 보여 줬다.

오직 혜량대사만이 아는 위치. 적불암의 위치를 스스로 찾아가 진법을 절반쯤 해체한 것이다.

그걸 두 눈으로 목격한 혜량대사는 천무백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부처께서 안배한 인연일지니…….’

* * *

소림이 강호재출도를 선언한 직후 수많은 시선이 쏠렸다.

그간 강호를 지배하던 명문정파들은 물론이고, 정파의 세가 약해진 사이 활개를 치던 흑도와 사파들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소림이 강호재출도를 선언한 명분에 사람들은 주목했다.

‘단순한 역병이 아니다!’

‘혈사문이란 사교집단이 퍼뜨린 역병이다!’

‘소림에서 혈사문을 격멸하고, 역병으로부터 인명을 구하기 위해 봉문을 거둬들였다!’

중원을 혼란케 하는 사교집단을 멸하기 위한 출도선언.

충분한 명분이었다.

특히 역병으로 거의 성 하나가 무너진 섬서성의 화산과 무당파들은 소림사와 접촉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소림을 찾아온 건 정파의 무인도, 낭인도 아니었다.

“아이고, 부처님!”

바로 인근에 있던 양민들이 가장 먼저 소림을 찾았다.

나름 무공을 익힌 능허도 오르기 힘든 숭산의 험준함을 뚫고 찾아왔다.

그들에겐 그래야만 하는 간절한 이유가 있었다.

“역병 환자입니다!”

“음!”

“인근에 있던 역병환자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에 기대기 위해 불공을 드리려는 의미도 있지만, 중원에서 가장 먼저 혈사문의 정체를 드러내서 아마도…….”

“우리가 치료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알겠지.”

혜량은 침음성을 삼켰다.

다행히도 전염성이 있는 역병이 아니라 중독이라는 사실을 천무백에게 들어 알고 있다.

독이라면 내공으로 충분히 몰아 낼 수 있을 터.

그리한다면 소림의 가용 인력이 팍 줄어들게 된다.

“송진문주는 어찌 행동하고 있소?”

“처소에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음!”

우선 수상하다 여기던 송진문주에 대한 감시에 인력이 빠져나가고, 혈사문에 대한 조사에도 꽤 숫자가 필요했다.

비록 적불암의 붉은빛을 없애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천무백의 제안대로 봉문을 거둬들였지만 혜량과 무소선사는 순수하게 혈사문에 천벌을 내리고 싶었다.

“어쩔 수 없지. 마지막으로 부처의 자비에 기대기 위해 온 사람들이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환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한곳에 모아뒀습니다. 한데, 직접 가시렵니까?”

“손 하나도 부족한 상황이니. 그간 쌓아온 내공을 지금 아니면 언제 쓰겠나?”

혜량은 그렇게 말하며 곧장 움직였다.

한데 장소에 도착한 혜량대사는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능허야, 침통 다 떨어졌다.”

“그래서요?”

“구해오라고.”

“침통을 어디서 구합니까?”

“그걸 내가 왜 걱정해.”

“우와. 진짜 배려심 없네. 주군 행태보면 부처님도 벌떡 일어나서 이런 싸가지 없는놈! 하고 소리칠 겁니다.”

“능허야. 여기 고통스러워하는 환자가 보이질 않느냐.”

“니런 썅. 이럴 때만 꼭 착한 척을 해요.”

“그럼 너에게만 나쁜 남자가 될까?”

혜량대사는 능허와 대화를 나누는 천무백을 보며 우두커니 멈춰 섰다.

정확히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때문이다.

숱한 병상들. 그 위로 청성표국의 표사들과 소림의 승려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천무백은 일일이 병상 하나씩 옮겨가며 침을 놓고 있었다.

말투는 퉁명했지만, 그건 능허를 대할 때만 그랬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침 맞고 푹 쉬면 다 낫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아이는 건강해서 내일쯤이면 천방지축으로 사고치는 거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천무백은 환자들을 안심시키면서 빠른 손놀림으로 침을 놓았다.

혜량이 놀란 눈으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비록 의학에 조예가 깊진 않은 그로서도, 천무백의 손놀림을 보면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병상을 계속 오가면서도 거침없이 쑥쑥 침을 놓는 걸 보면 절로 감탄이 나왔다.

더 놀라운 건 환자들의 반응이었다. 침을 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같이 얼굴에 편안한 기색이 떠오른 것이다.

혜량은 불현듯 느껴지는 주위의 기운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따스하구나…….’

역병 환자들이 있는 장소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는 따뜻하고 밝았다

혜량은 이 모든 것이 천무백에게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기파와 분위기임을 느꼈다.

“하남신의란 별명이 있더라니…….”

그때 무소선사가 다가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남신의?”

“예. 원양현에서 유명하더군요. 걷지 못하던 시종의 발을 고쳐 줬다는 등,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저 과장된 소문이라 믿었건만…….”

“신의로구나.”

혜량은 하남신의란 별호가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미소로 환자들을 편안케 하고, 분위기와 따뜻한 기운으로 약자들을 감싸 안는다.

혜량은 몰랐지만, 치료를 위해 천무백이 경천혼공을 끊임없이 운기 하다 보니 벌어진 상황이었다.

“부처가 여기 있었구나.”

어느새 천무백을 바라보는 혜량대사의 눈은 반짝 빛나고 있었다.

“저 양반은 뭘 저리 쳐다본대.”

“그러게요. 저기 방장님한테 물어볼까요? 침통 갖고 있냐고.”

“못 구했냐?”

“침통이 남은 게 없다는데요?”

“무슨 소림에 침통이 없어?”

“다 환자 몸에 박혀 있지 않습니까.”

“없다고 하면 끝이냐?”

“없는 걸 없다고 하지. 있다고 거짓말합니까?”

“구해와. 아직 환자 많다.”

“없는데 어떡합니까.”

“능허야.”

“네.”

“숭산 아랫마을에 의원 하나 없겠니?”

“지금 저보고 내려갔다 오란 말입니까? 아니, 얼마 전에 소림 중들 데리고 객잔 가서 그 혈사문 놈 데리고 오느라 진 다 빠졌는데. 또 내려가라구요?”

“응.”

“썅”

능허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자신에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건만, 환자들은 그 미소를 보고 천무백에게 연신 부처님을 찾는다.

“부처는 개뿔. 에라이.”

물론 능허에게 부처가 아니라 마귀로 보일 따름이었다.

* * *

소림은 밤이 돼도 불이 꺼지질 않았다.

소림사에 역병을 치료하는 신의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또 혈사문이란 사교집단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단 소문에 양민들이 밤낮 가릴 것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환자들뿐만 아니라 40년 만에 개방한 소림을 찾는 양민들도 수두룩했다.

그러다 보니 소림 내부의 모든 인력이 바쁘게 움직였다. 자연히 밖으로 빠져나오는 사람을 놓치기 쉬웠다. 특히 무공이 출중한 백공양은 손쉽게 야밤에 소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젠장.”

소림을 빠져나와 백공양은 급하게 경공을 시전했다.

다급한 얼굴로 얼마나 움직였을까.

어느 순간 백공양은 우뚝 멈춰 섰다.

붉은 피풍의를 입은 사내가 바위 위에 걸쳐 앉아 있었다.

“왜 이제야 연락이 닿는 것이오!”

“우리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사내의 나른한 목소리에 백공양은 흠칫했다.

그러나 백공양은 애써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소리쳤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소. 당신들, 혈사문하고 무슨 관계요?”

“…….”

“뜬금없이 소림이 봉문을 거둬들이고 혈사문을 격멸하겠다고 발표한 이후로, 날 바라보는 저들의 시선이 이상하오. 날 의심하고 있다고!”

“혈사문과 당신은 관계없어.”

“젠장. 혈사문이 그쪽 수족이 맞나 보군. 하지만 말이야. 천무백이 그놈이 혈사문 뒤에 배후가 있다고 떠들고 다니고 있다고.”

순간 백공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른한 사내의 눈빛에 일순 지독한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 살기를 정면으로 마주친 백공양은 호흡이 턱 막혔다. 급히 내공을 운용해서 이겨 내려 했지만, 온몸이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천무백이라고?”

“우, 우리가 희생양으로 삼았던 청성표국의 막내아들! 그 녀석이 혈사문에 대해 소림에 전달한 것 같단 말이오.”

“…….”

사내는 잠시 말없이 백공양을 쳐다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강호에서 알아서 안 될 걸 알게 되면, 죽게 되는 법이지.”

부르르!

백공양은 끈적끈적한 살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알아서 안 될 게 뭐가 있어.”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그의 시선이 백공양과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향했다.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살짝 놀랐다.

백공양을 은밀히 추적해 따라 나와 본 광경.

특히 혈귀곡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피풍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일전에 천무백에게 당했던 혈사문의 장로들, 구진해나 육성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 아닐까 생각했던 천무백에겐 의외였다.

적어도 그 둘이 합공해도 이겨 낼 수 없는 실력자였으니까.

그렇다한들 천무백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사내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겼다.

“어쨌건 하나 걸려들었고.”

천무백의 입가에 새하얀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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