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41화>
41. 소림출도
혜량대사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자신은 천무백의 얼굴을 처음 봤으니까.
“천공자, 날 본 적이 있습니까?”
더구나 소림은 봉문중이니 지금과 같이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사람을 받지 않는다.
결국 혜량대사를 볼 일이 없다는 얘기다.
한데 천무백은 진짜로 혜량대사를 본 적이 있다. 다만 시간이 워낙 흘러 잠깐 기억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 까까머리 젊은 놈이 이제 방장이구나.’
정마대전이 끝나갈 무렵, 천무백은 천마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나섰다. 그때 따라나섰던 숱한 정파의 무인들 중에 바로 혜량대사가 있었다.
당시 천무백은 몇 남지 않은 소림의 무인이 전투 중에 희생되는 걸 안타깝게 여겨서 돌아가길 권했다.
말로 잘 타이른 게 아니라 기세를 흉흉하게 내뿜으며 사실 반협박했었다. 그땐 말로 타이르기엔 천마에 대한 소림의 원한이 워낙 컸으니까.
한데 혜량대사는 애송이였음에도 천무백의 기세를 버텨 냈다.
물론 더 버티지 못하고 몸이 저절로 무너졌다. 오히려 천무백이 그대로 죽을까 봐 기세를 걷어 들일 정도였다. 그때의 모습이 워낙 인상적이라 머릿속에 잔상처럼 얼굴이 남았다.
그때의 어린아이가 이젠 대소림사의 방장이 되어 여기 앞에 앉아있는 게 아닌가.
물론 천무백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한 것 같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청성표국의 천무백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천무백은 정중하게 허릴 숙였다.
“반갑소. 부족하지만 방장의 자리에 있는 혜량이라고 하오.”
“갑작스레 만남을 청하는 요청을 승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객이 왔으면 주인이 먼저 반기며 대접해야 하는데, 오히려 내가 미안할 따름이오, 공자.”
혜량대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천무백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혹, 불가에서 가르침을 받으신 적이 있으시오?”
혜량대사로선 그렇게 느껴졌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친근한 느낌은 불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거기에 적불암을 거론한 걸 떠올리면, 혹여 스승이 소림 출신이란 점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한데 천무백은 그저 편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저는 따로 불가의 가르침을 받진 않았습니다만, 부처는 누구의 마음속에나 있는 것이니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씀 드릴 수도 있겠네요.”
“…….”
혜량대사와 무소선사는 감탄한 시선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현기로구나.’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지만, 혜량대사는 천무백에게서 현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런 시선들을 느끼며 천무백은 내심 만족했다.
‘분위기 나쁘지 않고.’
아무리 소림사가 공명정대하다고 한들, 강호의 섭리란 게 있다.
‘모르는 사람 만나면 경계부터 하는 게 기본이거든.’
소림은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이들도 강호인들이잖아?
그게 칼 찬 사람들의 기본이잖은가.
그러니 천무백은 나름 수를 썼다.
이미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경천혼공을 운용했다.
안 그래도 불가와 도가의 내공심법이 바탕이 된데다가, 얼마 전 흑심방을 털고 소환단을 섭취했던 터라 그의 기운은 언뜻 소림의 기운과 유사했다.
거기에 천무백이 은은히 미소만 지으니, 혜량대사와 무소선사는 은근히 친근감이 들었고 저도 모르게 경계를 풀었다.
‘나름 분위기는 괜찮으니, 슬슬 얘기해볼까.’
천무백은 사실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당초 계획은 혈사문의 행적과 정체를 밝혀 그들의 소행임을 알리고 천문경과 표사들을 구출하는 것.
물론 지금도 그 계획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추가된 게 있다.
‘정황상 송진문이 혈귀곡과 연관된 가능성이 농후해. 송진문을 통해 혈귀곡의 꼬릴 잡는다. 거기에 겸사겸사 소림하고 안면이 트면 좋은 일이고.’
보아하니 혈귀곡은 혈사문을 수족으로 다룰 정도로 범상치 않은 놈들이다. 더구나 천무백이 흑심방과 연화루의 정보망을 총동원해도 꼬투리를 잡지 못했을 정도로 철두철미하다.
여기서 송진문과 연관된 가능성을 봤으니, 천무백은 결백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더 파고들어 혈귀곡의 꼬리를 잡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선 송진문을 압박해야 한다.’
압박을 하다보면 못 버티고 도움을 구하기 마련이니까. 아마 혈귀곡을 노리겠지.
천무백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혈사문이란 집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혈사문 말이오? 이름만 들어도 사파의 무리처럼 들리네만…….”
“단순한 사파가 아닙니다. 이것들을 보시지요.”
천무백은 봉구현의 혈사문을 털면서 가지고 온 자료를 건넸다.
그것들은 그간 하남성에서 벌인 혈사문의 행적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이 무슨!”
자료들을 하나씩 확인하던 무소선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혜량대사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두려움 따위가 깃들어 떨리는 게 아니다.
진득한 분노.
불가의 가르침을 갈고 닦는 혜량도 쉬이 분기를 가라앉히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내용이 아닌가.
“이런 사교집단이 정녕 존재한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증거뿐 아니라 증인 역시 있습니다.”
“증인?”
“혈사문에 소속된 무인입니다. 현재 숭산 아래 객잔에 구금해놓은 상태입니다.”
뭐, 조금 상태가 좋지 않긴 한데.
천무백은 반쯤 미쳐 버린 척을 떠올리며 다소 난감한 기색을 숨겼다.
백색마안으로 금제를 풀고, 여러 정보를 캐내느라 거의 반쯤 미쳐 버려서 소림까지 데리고 오진 못했다.
다만 사람을 보내 확인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알 순 없더라도 소림이 혈사문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충분한 증인이 되리라.
“제 수하를 붙여 줄 테니, 사람을 보내 확인하시지요.”
“으음!”
혜량대사는 침음을 삼켰다. 증인까지 잡아 왔다고 하니 의심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자료들이 하나같이 상세했다. 만일 조작된 내용이라면, 조작에도 큰 심혈을 기울였으리라.
하물며 이걸 조작할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섬서에 역병이 퍼져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단 소식은 들었지. 하남에서도 환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고……이게 다 인위적이란 것들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혈사문의 소행입니다.”
“좋소. 확인하면 진실인 것이 밝혀질 터. 천 공자, 한데 여기서 이런 사교집단이 있음을 알리는 이유가 무엇이오?”
“저는 이번 사건에 혈사문이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
“혈사문이 표물을 강탈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강탈당한 당일 혈사문의 일부 무사들이 명령에 따라 숭산 쪽으로 향했단 기록이 있습니다.”
“음!”
“하지만 고작 이걸로 혈사문의 소행이라기엔……빈약하오.”
“맞습니다. 더구나 진짜 범인은 혈사문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단체니까요.”
“배후?”
배후란 말에 혜량대사와 무소선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기 자료에 적힌 혈사문만 해도 그 흉악함과 규모가 만만치 않은데, 그 뒤에 배후가 있다?
천무백은 조용히 말했다.
“혈귀곡이란 놈들입니다.”
“……혈귀곡이라.”
“다만 이놈들은 워낙 철두철미해서 겨우 그 이름만 알아차렸을 뿐입니다.”
“혈귀곡에서 혈사문을 부려 표물을 강탈했다는 것이 천공자의 주장이오?”
“맞습니다.”
천무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했다.
“송진문주 백공양.”
“백문주는 왜…… 설마?”
“그와 혈귀곡이 협력해 일을 꾸몄습니다.”
그쯤 되자 혜량대사는 어쩔 수 없이 정색했다.
“천공자, 송진문은 소림의 속가요. 그럴 리가 없소.”
“정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천무백은 그렇게 말하며 혜량대사를 똑바로 바라봤다.
언뜻 무엄한 태도였지만, 혜량대사는 감히 그걸 제지하지 못했다.
사실은 그도 속내는 송진문을 조금 께름칙하게 여기고 있었지 않았나.
그것도 백공양을 말이다.
“하나 증거가 너무 빈약하오. 더구나 표물을 왜 노렸단 말이오? 송진문주도 그 표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소.”
“표물은 혈귀곡이, 그리고 백공양은 다른 걸 얻었으니까요.”
“다른 걸?”
“그의 내공 말입니다.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그걸 어찌……?”
“제가 사람의 기운에 조금 예민해서요.”
천무백이 태연하게 웃었다. 하나 혜량대사와 무소선사는 그저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은근히 느껴지던 그 사특한 기운은 여기 무소선사나 혜량대사만이 간신히 느꼈던 것이니까.
그걸 예민하다고 다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도 송진문주를 조금 수상하게 여기고 있소.”
“압니다. 그래서 구금이라는 명목으로 아버지와 표사들을 나름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음.”
“말만 구금이지, 자혜각에 머무르게 한 것만 봐도 소림사의 공명정대한 처사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혜량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천무백의 눈썰미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에 놀랐다. 더구나 코앞이 청년, 아니 아직도 앳된 소년티가 남아있는 16살이란 걸 감안하면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은근히 외기에 예민하다며 자신이 무공을 익힌 걸 알리고 있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다.’
한데 혜량대사도 천무백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말은 특이한 내공을 가졌거나, 자신보다 더한 고수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고작 열여섯의 아이가 말이다.
“증거가 빈약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면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겠지요.”
“어찌 하겠단 것이오? 혹여 송진문을 공격하겠다는 말은 감히 발설치도 마시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송진문은 소림의 속가요.”
“네. 다만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십시오. 그렇다면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탁?”
천무백이 혜량대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봉문을 푸시고, 개문을 선언하십시오.”
“……!”
* * *
“뭐라?”
“소림사가 봉문을 마치고 강호출도를 선언했습니다.”
“갑자기? 잠깐만, 천무백이 그놈이 소림방장과 만난다고 하지 않았나?”
수하는 소림방장을 가볍게 거론하는 백공양의 어조에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직후 대사께서 무소선사를 통해 재출도를 선언하셨습니다.”
“이 무슨! 지금 상황에서 말인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태에 백공양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천무백하고 만난 직후 봉문을 끝냈다?
40년간 이어진 봉문을?
사실 정마대전이 끝나고 마교가 십만대산으로 숨어들어갔음에도 소림이 봉문을 유지한 이유는 명백했다.
‘소림은 망했다!’
수많은 인재들이 대전중에 사라져갔고, 숱한 무공비급과 영약들이 싹 다 파괴되고 없어졌다.
봉문이라는 극악의 선택이 아닌 이상, 소림은 스스로 보호하기 힘든 지경에 빠졌다.
봉문을 풀었다는 건, 과거의 영화를 회복할 무언가를 찾았다는 것인데…….
“대체 무엇을?”
“강호 재출도를 선언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혈사문이란 사교집단이 출현해, 그들을 멸하기 위해 봉문을 깼답니다.”
“혈사문?”
백공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 그들이 현재 섬서와 하남에 퍼지고 있는 역병을 퍼뜨린 놈들이랍니다.”
“흐음.”
“그리고 또, 혈사문의 배후에 있는 놈들을 잡기 위해 직접 무소선사가 출도하겠단 뜻을 밝혔습니다.”
“배후?”
순간 백공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뭐, 혈…… 귀곡이라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