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40화 (40/318)

<검신재생 40화>

40. 어디서 봤더라?

“천무백, 그놈 말이다. 정말 그놈이 맞느냐?”

처소로 돌아온 백공양은 다짜고짜 수하를 다그쳤다.

“그게 천문경과 얘기를 나누는 걸 보면 막내아들이 맞긴 한 것 같은데…….”

“조사한 것과 너무도 다르지 않으냐! 유약하기 짝이 없어 악기나 줄창 불어 대는 한량이라더니. 저게 어딜 봐서?”

“하나 무공을 익힌 것 같진 않습니다. 내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백공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하의 대답이 못마땅했다.

겉으로 느껴지는 내력은 전혀 없었다. 백공양은 계속해서 살폈지만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라고 섣부른 판단을 하는 건 큰 실수다.

넓은 강호에서 기인지사가 어디 한둘이던가.

그중엔 제 능력을 감추는 데 타고난 이들도 많았다.

더구나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인물이라면, 그 내력을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이다.

‘나보다 더한 고수라고?’

순간 울컥 무언가 치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꼬맹이가 말이다. 어찌 나보다 더한 고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가 없다.

명문세가의 후기지수라면 모를까.

지금은 쫄딱 망한 소림에게도 비교가 안 되는 촌구석 표국의 자제가 아닌가.

무파도 아니고 세가도 아니다.

그냥 표국이다.

그런 놈이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의 고수라는 가설은 설령 진실이더라도 용납 못한다.

‘나도 소림같이 망해버린 문파의 속가가 아니라 화산이나 무당의 속가였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겠지. 무소선사 그놈 따위는 우습게 여길!’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백공양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청성표국 놈들에게 감시를 더 붙여! 그 천무백이란 놈, 예사 놈이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나한각주가 접근하지 말라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네 이놈!”

백공양이 호통을 치자 수하는 찔끔하며 뒤로 물러섰다.

“네놈의 문주가 나더냐. 아니면 고작 옛날의 영화에 취해있는 소림이더냐?”

수하는 침음성을 삼켰다. 사실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다.

송진문의 힘은 소림의 속가문파라는 점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속가문파인 만큼 송진문 운영은 자주적이지만, 그래도 소림이 더 위에 있는 법이다. 소림도 문파 운영에 대해 간섭하지 않지만, 그 위엄만큼은 살아있는 법이다.

한데 백공양은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 않았다. 마치 소림에 대해 적개심이 있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감시 인력을 늘리겠습니다.”

수하가 물러나고 백공양은 겨우 호흡을 골랐다.

그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꽁꽁 싸매져있는 비단을 풀어내자 붉은색 단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공양은 그걸 들고 잠시 망설이는 눈빛으로 쳐다보다, 이내 꿀꺽 삼켰다.

순간 단전에서 뜨거운 무언가 치밀었다.

그의 눈이 희번들하게 빛났다.

“소림…… 과거의 영화에 빠진 놈들. 얼마 안 남았다. 얼마 안 남았어…….”

단전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양기에 백공양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냄새가 납니다.”

“네가 개냐.”

“어떻게 아셨습니다. 위험한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서 개코라는 별명이 있죠.”

“넌 별명이 몇 개냐.”

“엥? 독안사랑 개코 하나인데요.”

“굼벵이에 말만 번지르르한 주둥이란 별명은 없더냐.”

“아니. 이상한 말 하지마시고. 딱 봐도 감 오지 않습니까?”

“백공양이?”

“네.”

“그렇지. 수상한 냄새가 나지.”

능허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혈사문에게 포섭당한 것일까요?”

“글쎄. 네가 파악한 송진문 수준은 어떤데?”

“음. 속가라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 지역의 패자로 군림할 정도로 성장한 문팝니다. 내실이 두터워요.”

“혈사문 협박에 포섭당할 정도로 보이더냐?”

“엄청나게 큰 과실을 주지 않는 이상, 그렇진 않겠죠. 송진문 규모를 보면 혈사문하고 한판 붙자고 덤벼들 만하니 협박당한 것도 아닐 테고.”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사문하고 연결되진 않았다.”

“……그럼 그 뒤에 있는 뭐, 혈귀라던 놈들 말입니까.”

“그럴 확률이 높지.”

“거참. 그놈들은 뭔데 송진문을 포섭해서 표물까지 빼앗는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표물이 중요하지.”

“표물…… 혈사문을 조종해서 역병을 퍼뜨리던 혈귀곡이 탐낼 표물이라…….”

능허는 턱을 쓰다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을 구겼다.

“에라이 썅. 그게 뭡니까?”

“몰라.”

“표국한테도 안 알립니까?”

“당연하오, 능 루주. 비공개로 의뢰한 표물이라면, 표국에선 그걸 알 수는 없소.”

“아…… 예.”

천문경이 나타나며 그렇게 말하자 기세 좋게 얘기를 늘어놓던 능허도 뻘쭘하게 말끝을 줄였다.

아무래도 천무백의 아버지다 보니 뭔가 대하기 어려웠다.

천무백은 천문경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았다.

이미 천무백은 천문경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완전히 다 얘기한 건 아니다. 굳이 알릴 것 없는 이야기는 뺐다. 천무백은 은근히 자신의 무공 실력에 대해 알렸지만, 정확한 수위까진 밝히지 않았다.

“혈사문이니, 혈귀곡이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하는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일종의 희생양이란 얘기지?”

“예. 청성표국을 의심해서 조사를 벌이며 헛된 시간을 보낼 동안, 놈들은 모습을 감추겠지요.”

“으음. 듣기 좋은 얘긴 아니구나.”

천문경이 미간을 좁혔다.

“난 어디서 우리 표국을 무너뜨리려고 암수를 쓰는 줄 알았건만, 그냥 어쩌다 우리가 걸려든 거였어.”

천문경의 얼굴에 일견 씁쓸함이 떠올랐다.

어디 청성표국을 무너뜨리려고 누군가 함정을 판 것으로 생각했건만, 그냥 어쩌다 걸려든 희생양이었다. 만일 송진문의 의뢰를 청성표국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는 다른 표국이 있었으리라.

“꼭 그렇진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무백아.”

“송진문에서도 표국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더군요.”

“……!”

천문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게 사실이냐?”

천무백이 능허를 쳐다봤다. 이건 능허가 연화루와 흑심방을 통해 구해 온 정보였다.

“예, 표국주님. 송진문에서 소규모의 표국의 인수에 관심을 드러냈던 적이 있습니다. 근데. 갑자기 도중에 청성표국에 의뢰를 한 거죠.”

“음!”

천문경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뭐,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거겠죠. 혈귀곡에선 표물을 빼앗을 수 있고, 송진문도 망해 버린 청성표국을 마치 용서한다는 듯이 인수하는 그림을 그릴 테도. 그런 와중에 혈귀곡에게 나름 챙겨 먹을 건 챙겨 먹었겠죠.”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정리하는 천무백을 보며 천문경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오늘부터 그는 약간의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 품안에서 어리광 부리던 그 아이였는지, 지금은 늠름하다 못해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고작 반년이건만, 천무백은 완전히 성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애늙은이 같이 느껴질 때도 왕왕 있었다.

‘장노가 무공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일 수도 있겠군.’

그도 눈치가 있고 머리가 있다. 청성표국의 국주 자리에 있으니까. 연화루의 루주인 능허를 수족처럼 부리고, 연화루를 표국 사업으로 들고 온 천무백이 범상치 않은 재주를 가졌음을 깨달았다.

‘허어. 언제 이렇게 컸을꼬.’

천문경으로선 아비로서 그저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혹여 너무 낯설게 느껴지다가도, 저 눈빛을 보면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예부터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미소와 눈빛은 여전하지 않은가. 저 눈빛과 미소를 보면, 여전히 그의 귀여운 막내가 맞았다.

“그러면 표물이 중요하겠구나.”

그때 능허가 조심히 말했다.

“진짜 표물이 뭔지 모릅니까?”

“표국은 신용으로 먹고사는 사업이오. 그쪽에서 비공개를 원했으니, 알 수가 없지.”

“난 궁금해서 슬쩍 들춰 봤을 거 같은데.”

“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천무백의 말에 천문경과 능허의 시선이 향했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요.”

“엥? 누구요? 송진문주?”

“소림 방장 정도 되면 알고 있겠지.”

“……!”

천무백이 황당해하는 능허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충 아무한테나 가서 이렇게 전하거라. 적불암은 아직도 붉냐고.”

“네? 그게 뭔 뜻 모를 개소리입니까.”

“…….”

천무백이 한차례 노려보자 능허는 황급히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림방장으로부터 찾는다는 연락이 왔을 때.

천문경과 능허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천무백만은 담담하게 일어났다.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 * *

“잠깐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청성표국의 막내아들이 찾아왔습니다. 한데 송진문주, 그자가 시비를 건 것 같았습니다.”

송진문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혜량대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듣자 하니 칼을 꺼냈다고 했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그자가 정말, 갈수록 오만방자하더군요. 무사들을 이끌고 그 어린 아들을 겁박하는 꼴을 보니, 그게 소림의 속가인지 흑도의 건달인지 감이 안 잡힙니다.”

“나무아미타불.”

혜량대사는 침음을 삼키며 염불을 외웠다. 무소선사가 다소 화난 기색으로 말했다.

“방장님, 아니 사형. 아무리 생각해도 께름칙합니다. 내 사람 보는 눈은 사형처럼 대단하진 않지만, 그래도 천국주가 그런 자작극을 벌일만한 사람이 아닌 건 잘 알겠습니다. 더구나 표물이 무엇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표물을 확인했으면 알 수도 있지요.”

“설령 안다고 해도, 범인들이라면 그저 평범한 불경으로 알 것입니다. 그게 진짜 무엇인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설령 안다고 해도, 그걸 어디에 쓰겠습니까?”

혜량대사는 무소선사의 말에 공감했지만 쉽사리 동의할 순 없었다.

당시의 행적이나 상황이 청성표국의 자작극이라는 결론이 정황상 유력하다.

하나 께름칙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송진문의 행태 역시 수상한 데가 있었다. 정확히는 송진문주, 백공양이 수상했다.

“백공양 그자, 2년 전과는 너무 달라졌습니다.”

“으음!”

“무공 수위도 마찬가지고요. 절정 초입에 이르렀던 수준이, 지금은 저 역시 쉽게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요. 그가 수련에 매진해서 갑작스레 경지를 올린 것일 수도 있지만, 사형도 느끼시지 않습니까. 그 불길한 기운이요. 그건 저희 소림의 내공이 아닙니다.”

혜량대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더 조사해 주세요. 송진문은 소림이 봉문한 이후에도 40년 넘게 끊임없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온 문파입니다. 조금의 의혹이 있다지만, 정확한 진실이 나오기 전까진……우리의 속가입니다.”

사실 지금 소림사에 있어서 속가문파는 꽤 중요했다.

정마대전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이후 소림은 멸문 직전까지 달했다. 결국 봉문이란 극단적 선택까지 하게 됐고, 그 사이 수많은 속가문파들이 떠났다.

대부분은 정마대전 때 멸문당했고, 그나마 남은 문파들도 회복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송진문이 남은 속가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문파였다.

때문에 송진문에 의혹의 시선을 던지는 건 최대한 조심해야할 일이었다.

혜량대사는 애써 염불을 외우며 주제를 돌렸다.

그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를 언급했다.

“막내아들. 천무백…… 이라 했지요? 어떤 청년 같습니까?”

무소선사는 소림방장, 혜량대사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주친 건 아주 잠깐이다.

대화도 깊게 나눠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래도 첫인상은 기억에 남았다.

“참 잘생긴 미공자인데,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독특한 느낌입니다.”

“독특하다고요?”

“네. 홀로 송진문의 기세를 받아 내고 있었습니다.”

“무공을 익힌 건가요?”

무소선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백공양 그자와 정면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그 뒤에 있는 무사들의 기세 속에서도 태연자약했는데, 저는 그 아이에게서 단 조금의 내력도 느끼지 못 했습니다.”

“그 말은…….”

“정말 내공이 없다거나, 아니면……. 저보다 강한 것이겠지요.”

혜량대사는 침음을 흘렀다. 무소선사는 현재 소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었다. 괜히 나한승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니었다.

한데 천무백이 그런 무소선사보다 강하다?

그래, 강한 거야 문제가 될 리가 없다. 하지만 만일 정말 청성표국의 소행이 맞다면, 과연 소림은 청성표국을 벌할 수 있을 것인가?

‘소림이 이런 걱정을 하게 된다니…….’

새삼 정마대전의 후유증에 혜량대사는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더구나 적불암을 거론했다. 적불암을.’

그건 외부인이 절대 알 수 없는 이름이다.

오직 소림방장만 아는 내용이니까.

그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애서 가라앉히며 정면을 바라봤다. 때마침 찾았던 천무백이 왔다.

“…….”

혜량대사는 왜 무소선사가 독특하다고 말했는지 일견 이해가 갔다. 천무백은 문을 열고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만 봤으니까.

둘의 나이 차이는 조손지간에 가까우니 까마득한 나이차이고, 만일 무공을 익혔다면 항렬 역시 까마득하리라.

하면 당연히 들어오자마자 고갤 숙이고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이 아니겠는가.

이런 독특함을 처음 겪은 혜량대사는 잠시 말을 잃었다. 무소선사가 당황해 한마디 할 정도였다.

“천 공자, 방장님이십니다. 예의를 지키시지요.”

한데도 천무백은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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