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9화 (39/318)

<검신재생 39화>

39. 나도 같은 생각했는데.

능허가 천무백에게 말했다.

“소림의 속가인 송진문의 문주 백공양입니다. 생긴 건 저리 허섭스럽고 조금 뭔가 부족하게 생겨도, 제법 실력은 있다고 하던데. 절정 초입이라던가. 생긴 거 보면 딱 봐도 뒷골목 우두머리처럼 생겼는데 말이죠.”

“능허야.”

“네?”

“너 전음 모르냐?”

“전음술을 개나 소나 한답니까?”

“그렇다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말하냐.”

“조용히 말했는데요.”

“절정 초입이라면서. 그걸 못 들을 거 같아?”

“오.”

“오는 무슨.”

송진문주, 백공양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광경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수하들이 다 같이 칼날 같은 기세를 피어오르는데, 저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라.

“아. 미안하게 됐소. 내 수하 놈이 워낙 입이 방정인지라.”

하물며 천무백의 말에 백공양은 순간 울컥 무언가 치미는 기분이었다.

전혀 미안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은 어조였으니까.

“지금 장난하는 것인가?”

“장난은 무슨. 진짜 실수한 건데.”

빠득.

천무백의 태연한 어조에 백공양은 얼굴을 굳혔다.

묘하게 반말이 섞인 듯한 삐딱한 말투.

천무백의 태연한 표정과 옆에서 이상한 말을 전음이 아닌 실제로 지껄인 놈도 능청스러운 표정이다. 일부러 저런 거다.

백공양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막내 놈이 왔다 해서 잘만 이용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송진문에서도 청성표국을 다방면으로 조사했다.

천문경이 천무백을 끔찍이도 아낀다는 정도는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여 백공양은 막내아들이 소림사에 찾아왔다는 걸 듣고 빠르게 움직였다.

고작 열여섯의 어린아이.

건강이 좋지 않아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아이.

그를 유무형으로 압박하면 청성표국이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까.

백공양은 은밀히 살기를 흘려보냈다

주위에 밀집한 군중만 해도 수십여 명.

그중 한 명에게만 살기를 흘려보내는 건 쉽지 않다. 백공양이 그럴 수 있는 건, 그가 그만한 경지에 오른 절정의 무인이란 증거다.

‘흥. 지 애비가 보는 앞에서 오줌을 지리게 해 주마!’

살벌한 강호판에서 갈고 닦은 거친 기세는 직접 내력을 실진 않아도 고작 10대가 버텨 내기는 어렵다.

하나 천무백은 담담했다.

그저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오늘 초면인데 다짜고짜 살기를 뿜어내는 이유가 뭔지나 궁금한데.”

백공양은 일순 놀랐다.

‘살기를 눈치 채?’

아주 은밀히 흘려보낸 살기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살기를 간파하지도 못한다. 그저 온몸에서 식은땀을 흐르고 이상 현상을 느끼는 게 전부다.

‘더구나 나인 걸 알았다?’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며 하는 말.

이 수많은 사람 중에 은밀히 살기를 내보낸 사람이 본인임을 곧장 알아차렸다?

백공양은 새삼스런 눈빛으로 천무백을 살폈다.

‘무공을 익혔나?’

소문으로 들은 것과는 다르게 건강해 보였다. 아니, 건강한 수준이 아니라 제법 견실한 체격에 적당히 근육도 붙은 게 어느 정도 수련을 해 온 어린 무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고급스런 의복과 분위기를 보면 어디 명문세가의 후지기수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닌데. 내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특이한 분위기를 가지긴 했는데…….’

하나 내력 한 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함을 느낀 백공양은 다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호통을 쳤다.

“무슨 소리인줄 모르겠구나, 아이야. 네놈 애비가 표물을 뺏고 우리 무사들을 다 죽이지 않았느냐!”

“증거 있소?”

“증거?”

“그래. 증거.”

“하하하하!”

백공양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아해야, 증거란 게 눈으로 보여야만 증거겠느냐?”

백공양은 뒤를 돌아보며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소림으로 가는 표물이 사라지고 우리 송진문의 무사들만 죽고, 청성표국의 표사들은 전부 살았다! 더구나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도 못 한다고 한다! 자! 용적아!”

“네, 문주님.”

용적이란 무사가 튀어나왔다. 다소 뺀지르르한 얼굴의 무사였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겠느냐?”

“그럼요. 누가 봐도 청성표국이 자작극을 벌인 거 아닙니까요?”

“너 천자문은 떼었더냐.”

“헤헤…… 어릴 때부터 칼만 휘둘러서.”

“그치. 천자문도 못 뗀 무사도 알 법한 일인데. 이걸 몰라서 증거를 찾는 놈은 얼간이더냐. 병신이더냐?”

“킥.”

송진문 무사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몇몇은 대놓고 키득거렸다.

누가 봐도 자신을 얼간이고, 병신이라고 군중 앞에서 소리치는 꼴이다.

막내가 모욕당하는 꼴을 본 천문경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천문경뿐만 아니다. 장노를 비롯한 표사들도 굳은 얼굴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무기가 없어서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증거는?”

“아해야, 너도 혹시 천자문도 못 떼었더냐? 하긴. 아직 어린아이니 그럴 만하다!”

이젠 대놓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런 모욕적인 광경에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천무백은 단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었다.

그저 팔짱을 낀 채 기계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증거는?”

“……정말 시치미를 뗄 속셈이더냐?”

백공양이 뒤에서 굳은 얼굴의 천문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표국주! 언제까지 발뺌할거요! 우리 무사들을 싹 다 죽여 놓고!”

“하. 시발 놈이 진짜.”

“……!”

일순 정적이 가라앉았다.

일견 고상해 보이는 사람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하면, 주위는 당황하기 마련이다.

천무백의 입에서 흑도나 할법한 쌍욕이 나오자 백공양의 얼굴이 붉어졌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백공양의 눈동자에 살기가 번들거릴 정도였다.

“뭐라 했느냐?”

“이건 잘 듣네. 꼭 지 욕하는 건 잘 들어요.”

별안간 쌍욕을 얻어먹은 백공양과 송진문 무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고 튀어나갈 기세였다.

“아이야. 지금 네가 무슨…….”

“아니. 묻는 거에만 답하면 되지. 말 더럽게 많네.”

“……!”

백공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처음엔 곱상하기 짝이 없는 우아한 외모에서 튀어나온 쌍욕이라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한데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결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갑작스레 사람들 앞에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쌍욕을 얻어먹는 망신을 당한 꼴이다.

백공양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천무백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증거는?”

백공양은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기 위해 호흡을 내뱉는 그 잠깐의 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행동과 말.

‘내가 호흡을 빼앗겼다?’

무인들의 싸움에서 호흡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내공을 운용하는 것이 바로 호흡이니까.

싸움 중에 호흡을 얼마나 잘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내공운용의 수준에 차이가 난다.

내공운용 차이가 난다는 건, 곧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변수가 되는 법.

한데 잠깐이나마 백공양은 천무백의 손짓과 말 한마디에 호흡을 빼앗겼다.

‘이게 만일 싸움이었다면?’

무인이라면 자고로 매사 모든 일을 싸움과 빗대어 생각하기 마련.

이게 싸움이었다면 호흡을 빼앗기는 순간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그런 사실을 떠올리자 백공양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젖어들었다.

‘우연인가?’

아무리 봐도 내력 한줌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놈이다.

하나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는데, 원인을 찾았다.

‘눈빛!’

바로 저 눈빛.

“증거는?”

무심하게 기계적으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도, 동공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멈춘 채 백공양을 직시한다. 그에게 쏟아지는 송진문 무사들의 모든 기세를 싸그리 무시한 채

위화감을 인식한 순간 백공양은 이유 모를 압박감에 짓눌렀다.

“그래서, 증거는?”

그런 그에게 천무백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백공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무형의 기세가 백공양을 짓눌렀다.

백공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든 정황이 청성표국의 자작극임을 가리킨다. 당장 사죄는 하지 못할망정, 네놈과 네놈 애비는 왜 이리 방자한 것이더냐!”

“송진문주! 더 이상 행패는 나또한 참지 않겠소!”

더 이상 참지 못한 천문경이 나섰다. 동시에 표사들도 일제히 천무백과 천문경을 중심으로 진을 형성했다. 비록 무기는 없어도 그들의 기세는 송진문에 비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부딪칠 것 같은 살벌한 대치 속에서, 천무백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결국 증거는 없다는 거네?”

“……!”

백공양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천무백의 말대로였다.

모든 정황이 청성표국의 자작극임을 가리켰지만, 결정적인 물증은 없었다.

그러니 소림에서도 이렇게 구금만 해 놓은 게 아닌가.

소림은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청성표국을 의심하기엔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고.

“증거도 없이 사람을 겁박지르는 꼴이, 꼭 흑도나 사파 놈들을 보는 것 같소. 송진문주님.”

잔뜩 조롱기가 섞인 말에 백공양의 어금니가 우드득 갈렸다.

벌써 수하들 앞에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쌍욕을 먹는 치욕을 당했으니, 그의 인내심도 한계였다.

그는 검을 꺼내들었다.

“더는 못 참아주겠군, 아해야. 오늘 네놈 버릇 좀 고쳐 줘야겠다.”

“송진문주! 뭐 하는 짓이오!”

“닥치시오! 표국주! 자식 교육은 내가 대신해 줄 터이니!”

“……!”

살벌한 분위기.

그때 천무백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까 말했었는데, 또 잊었나보오, 송진문주.”

“이 어린놈이 어디서 그런 고약한 말버릇을 끝까지!”

“소림의 속가가 소림보다 더 위에 있나?”

“뭐라?”

조용히 말하던 천무백이 순간 크게 외쳤다.

분명 내력을 실지도 않았건만, 그 목소리는 좌중의 귓가에 똑똑히 박혀들었다.

“소림 안에서는 그 누구도 살심을 품을 수도 없고, 무기를 꺼낼 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다. 소림의 계율이오. 속가인 송진문이 그 계율을 무시하는 것인가!”

“……!”

소림의 계율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도 어렸을 때 소림에서 무학을 배우지 않았던가.

갑작스럽게 계율을 운운하는 이유를 짐작 못 하던 백공양은 뒤이어 나타나는 일단의 무리를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송진문주!”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과 심상치 않은 기세의 무리.

바로 나한승이었다.

특히 가장 앞서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나한각의 각주, 무소선사였다.

그의 등장에 백공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소선사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신성한 소림 내에서 칼을 꺼내들다니! 지금 무엇 하는 게요!”

“각주님.”

“내 오면서 다 들었소. 저 어린 소년이 한 말이 사실이오?”

백공양의 얼굴이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찡그려졌다.

방금 일부러 크게 외친 이유가 바로 무소선사와 나한승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였음이리라.

시선이 일순 천무백에게 집중됐다.

그러자 이내 벌어지는 상황에 백공양과 송진문 무사들은 아연실색했다.

태연자약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저는 청성표국의 막내 천무백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만리천향에서 연락이 끊겼단 소식을 듣고, 놀란 마음에 여까지 달려왔는데 우리가 범인이니 죽여 버리겠다고…….”

“……!”

순간 좌중은 어안이 벙벙했다.

언제 쌍욕을 했던 그 막무가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천무백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처연했다.

마귀를 때려잡는 신장 같던 무소선사의 얼굴에도 언뜻 안쓰러움이 깃들었다.

“문주, 정녕 이 아이와 표국을 겁박한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면 무사들을 여까지 이끌고 와 대체 칼을 꺼내든 이유가 무엇이오?”

백공양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한각의 각주 무소선사는 소림에 도전해오는 외부의 적들을 상대하는 뛰어난 무인이지만, 또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이기도 했다.

‘외통수로구나!’

상황은 누가 봐도 자신이 계율을 어기고 사람들을 겁박한 모양새였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선사님.”

그때였다.

천무백이 조용히 무소선사를 불렀다.

“……?”

“아마 송진문주님께서도 변을 당한 무사들을 아끼셔서 순간적으로 화가 나셨을 겁니다. 부디 선사님께선 넓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으음!”

무소선사가 천무백의 눈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천무백은 이 순간에 경천혼공을 조용히 운용하고 있었다.

항마의 기운이 스며든 경천혼공은 소림의 내공에서 느껴지는 기세와 비슷했다.

“공자 안에 부처가 있구려.”

무소선사는 살짝 호감 있는 시선으로 천무백을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송진문주, 오늘 있었던 일은 불문에 부치겠소. 하나 저 어린 공자도 충분히 이해를 하는데, 문주께서도 정확한 조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부디 기다려 주시오.”

“……알겠습니다.”

결국, 백공양은 백기를 들었다.

그는 물러나면서 천무백을 노려봤다. 방금 전 자신에게 쌍욕을 하던 건방진 아이는 없었다. 여린 표정과 그저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안타까워 보이지 않은가.

그 가증스런 모습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문제는 천무백이 저렇게 말하면서, 백공양은 좋든 실든 조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청성표국에 접근할 수 없게 됐다.

‘설마 이렇게 될 줄 알고?’

사실 알게 모르게 백공양과 송진문 무사들은 소림에 구금된 청성표국의 표사들을 겁박하고 괴롭혀왔다.

백공양이 은근히 조장한 것도 있지만, 무사들에게 있어선 어찌됐든 동료 무사들을 죽게 만들어버린 범인으로 인식되고 있으니까.

백공양은 말 몇 마디로 상황을 뒤집어 버린 천무백을 쳐다봤다.

분분히 서로 자리로 돌아가는 와중에, 백공양은 천무백의 곁을 스쳐가면서 속삭였다.

“네 이놈! 소림이 아니었다면, 넌 내 칼에 죽었을 거다.”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지나가듯이 말했다.

“우리 은근 닮은 데가 있네.”

“뭣?”

“나도 그 생각했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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