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8화>
38. 대충 알겠다.
“내 죽어서 저승에서 달마대사를 보면 이 한마디는 해야겠습니다.”
“뜬금없는 개소리지만, 거 궁금하긴 하네.”
“달마대사 멱살을 잡고, 정신머리가 어떻게 되어야 여기 꼭대기에 절을 지을 생각을 했냐고 따져야죠.”
“달마 멱살 잡을 자신은 있고?”
능허가 땀을 닦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르기 전엔 참으로 아름다운 산이었다.
하나 막상 오르기 시작하니 험준하기 짝이 없다.
중원 오악(五嶽)이라 소문만 들었지, 숭산은 정말 말도 안 되게 험했다.
심지어 이 길도 방문객을 위해 닦은 길이었건만, 능허는 속된 말로 후달렸다.
‘내가 내공이 고명한 건 아니지만······.’
능허의 눈이 가늘어졌다.
흑도 출신에게 내력을 따지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최근에 능허는 제법 내공심법에 집중해 왔다. 청심단도 복용하고 꽤 노력했다.
한손을 못 쓴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불과 반년 전과 비교해 봐도 현재 쌓인 내력의 밀도가 훨씬 높았다.
한데도 숭산을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능허가 천무백의 태연한 얼굴을 바라봤다.
“달마 멱살 좀 대신 잡아 주시면 안 됩니까?”
“능허야, 전설 속의 달마 멱살을 내가 어떻게 잡아?”
“지금 내 눈엔 달마보다 더 괴물처럼 보이는데.”
뭐, 전설의 달마와 비교하긴 무리겠지만.
정말 괴물처럼 보인단 말이지.
능허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능허와는 달리 천무백은 쌩쌩했으니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뒤처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멀찍이 앞서가 능허를 기다릴 정도였다.
“능허야, 넌 어쩜 볼 때 마다 행동이 굼뜨냐.”
“본인이 빠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네가 느리다고는 생각 안 해?”
“네.”
“멀었구나.”
“뭘요.”
“무인에게 중요한 건 바로 자기파악이지. 지 부족한 점을 모르다니.”
“아, 구박받는 거 더러워서 못 하겠네. 나 그냥 내려갑니다!”
“그러던가.”
“…….”
능허는 지금까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을 돌렸다.
“달마 대사 말입니다. 이 재수 없는 새끼가 소림사를 왜 꼭대기에다가 지어가지고. 어? 평범하게 불공드리러 올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천무백은 거침없이 능허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너 조만간 입 잘못 놀리다가 죽겠다, 야.”
“죄송합니다.”
“욕하고 싶은 건 아는데, 속으로 해. 속으로.”
“…….”
퍽!
순간 능허의 허리가 완전히 접혔다.
천무백이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능허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능허가 억울한 얼굴로 천무백을 뒤돌아봤다. 천무백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방금 속으로 욕했잖아.”
“솔직히 말해 봐요. 독심술 익혔죠?”
“능허야, 한번 찔러 본건데 진짜 속으로 욕했구나?”
“아! 그만, 그만 제가 죄송합니다. 때리지 마세요.”
“사람이 두 번 주면 정 없다더라. 세 번은 줘야지.”
“…….”
결국 천무백에게 세 대를 맞은 능허는 반성과 체념의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묵묵히 걸었다.
그 모습에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별난 놈이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아는 놈이 능허다.
점박이야 그저 대단하고 장한 도련님으로 여기고, 허성은 오히려 누군가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에 반해 천무백은 능허 앞에선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줬다.
행동 뿐 아니라 무공까지.
혈사문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적에게는 무자비한 모습을 똑똑히 보여줬다.
그쯤 되면 적어도 사람의 태도가 바뀌기 마련이다.
두려움을 가지던가, 아니면 허성처럼 이전보다 훨씬 어렵게 대하던가.
한데 능허는 아니었다.
‘속이 널널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별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기도 하고, 틈만 나면 비꼬는 어조로 사람 신경을 툭툭 건드린다.
근데, 그게 묘하게 기분 나쁘지는 않다.
적당히 손봐 주면 또 금방 눈치 채고 설설 잘 기기도 하고.
‘하여간 재밌는 놈이라니까.’
천무백이 빤히 쳐다보자 능허는 시선을 피하며 괜히 바닥의 돌을 툭툭 찼다.
“에이 썅! 길 한번 더럽게 돼 있네!”
“흠.”
천무백은 새삼 길을 한번 쭉 살폈다. 사실 중원오악이라고 해도, 이렇게 오르기가 힘든 산세는 아니다.
소림사라는 명성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중원 전토에서 몰려드는 곳이 바로 숭산이다.
무림인이라면 모를까. 내공이 없는 양민들도 숭산을 오른다.
산이 워낙 험하니 실족하거나, 맹수에게 양민들이 물려 죽는 꼴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그래서 소림에서 길을 닦고 관리했다.
문제는 지금 그 길이 과연 관리가 되는가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수풀로 가려져 길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울타리는 무너져 흙에 파묻혔고, 잘 쌓인 돌은 비바람에 수도 없이 깎이고 부서져나가 오히려 길을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
억센 잡초와 나무들이 길을 막았다.
“소림이 봉문에 들어선 지 40년이 넘었으니까 말이다.”
그 험한 길을 뚫고 천무백은 숭산의 정상에 올랐다.
산세와 부드럽게 어울려 있는 사찰, 사찰을 둘러싼 수많은 전각으로 이뤄진 거대한 정경.
천무백은 숱한 전생에서 수없이 봐 왔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은 정경을 보며 반갑게 웃었다.
“소림이다.”
소림에 왔다.
* * *
소림사에 들어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의외였다.
“분위기가 썩 나쁘진 않은데요?”
어린 스님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던 능허의 말에 천무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왼데.’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줄 줄은 몰랐는걸.
봉문중이라면 외부인의 출입은 엄금한다.
더구나 천무백은 문 앞에서 청성표국임을 밝혔다.
현재 소림에서 청성표국의 국주를 구금하고 있으니, 당연히 분위기는 좋지 않을 터.
오히려 문전박대 당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
한데 소림사에서는 마치 공양하러 온 시주를 대하는 것처럼 친절하게 문을 열어 줬다. 뿐이랴. 이렇게 안내까지 해 주는 친절을 보여 줬다.
“함정은 아니겠죠?”
능허가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함정을 의심할 법하다.
하나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적대적인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안내하는 스님이나 사찰 주위에서 보이는 분위기나 특별한 게 없었다.
특히 외기에 예민한 천무백은 특별한 걸 느낄 수 없었다.
이들은 정말로, 천무백 일행을 크게 어려워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된 건 천문경이 구금당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무백아!”
소식을 들은 천문경이 밖에 나와 있었다.
천무백의 시선이 빠르게 천문경과 주위 환경을 훑었다.
천무백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표국을 억압한 건 아니야.’
천문경은 다소 피곤한 기색이었으나 깨끗한 의복에 얼굴빛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나온 전각은 소림사 내부에서도 제법 중요한 손님을 맞을 때 숙소로 사용하는 자혜(慈惠)각이었으니까.
“무백아, 네가 여기 숭산까지 어쩐 일이더냐!”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아버지.”
“괜찮다. 괜찮아. 어디 오면서 다친 데는 없더냐? 이 먼 길을 어찌…… 호위도 없이? 표사들은?”
“허 단주와 청월단 표사들이 같이 왔습니다만, 중한 일이 있어 따로 오고 있습니다.”
“내가 구금당했단 소식을 듣고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아이고, 무백아. 여기가 어디라고…….”
천문경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묵묵히 서 있는 천무백을 보곤 솔직히 깜짝 놀랐다.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천무백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외적인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언제 이렇게 컸지?’
바로 저 눈빛이다.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천문경은 저런 눈빛을 잘 알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흔들림이 없고 당황하지 않는다. 그건 무슨 일이 다가오던 이겨 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의 발로다.
표국주로서 만났던 수많은 무인들, 상인들, 고위 관리들.
그들 중에서도 범상치 않은 이들이 하나같이 저런 눈빛을 갖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늘 여리게 생각하던 막내아들에게서 보니, 천문경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하나 이내 그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짜식! 이 애비가 걱정됐던 것이냐?”
천무백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천문경은 가슴에 무언가 꽉 차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늘 지켜 줘야만 한다고 여기던 막내가 걱정된다고 한걸음에 달려왔다니.
‘다 컸구나. 다 컸어.’
천문경은 흐뭇한 마음에 천무백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하지 마라. 비록 밖에 나가진 못하지만,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금당한 표사들이 소식을 듣고 뛰쳐나왔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모두 무탈하셨습니까?”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올리는 표사들을 바라보며 천무백의 얼굴이 묘해졌다.
‘이건 구금이 아니라 숫제 손님을 모셔놓은 거 같은데?’
다들 썩 잘 먹고 지내나 봐?
천문경뿐만 아니라 표사들의 상태도 꽤 좋았다.
여러 피곤한 기색은 있어 보였지만, 대다수가 다들 얼굴에 혈색이 돌았고 건강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달포 가까이 구금당한 사람들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구금이라고 사람이 다 피폐해지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심리적인 부담감이 있다.
갇혀 있다는 사실.
그것도 낯선 곳에서, 좋지 않은 상황이라면 말이다.
한데 표사들의 얼굴엔 그런 부담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소림이 제법 대우를 해 주고 있군.’
우선 국주인 천문경은 자혜각에 머무르고 있다.
외부에서 온 귀한 손님들이 머무르던 곳이 바로 자혜각이다.
이것만 봐도 소림이 표국 사람들을 구금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왜 구금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소림 한쪽에 머무르게 하고 있는 것일까?
천무백의 시선이 장노에게 닿자, 묵묵히 서 있던 장노가 고개를 숙였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이끌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도련님.”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아봐야 하겠으나, 그건 장노 때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잘하셨습니다. 장 표두. 소림 앞에서 힘을 쓰면 안 될 일이지요.”
“…….”
순간 장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빛에 언뜻 혼란스러운 빛이 스쳐갔다. 얼핏 듣기엔 이상할 게 하등 없는 말이다. 소림이 구금한다고 할 때 괜히 칼을 뽑아 들었다간 일이 더 심각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한데 장노는 왠지 모르게 천무백의 말에서 다른 느낌을 받았다.
‘아니시겠지?’
소림 앞에서 보여서는 안 될 힘.
천무백이 설마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단 말인가.
장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근래 예민한가 보군.’
소림 한복판에 들어와 있으니까 그런 거라고 애써 생각을 정리한 장노는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수작을 꾸미려고 막내아들까지 데려오셨소이까? 표국주?”
한껏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가득한 목소리.
염소수염이 퍽 눈에 띄는 50대의 장년인이 칼 찬 무인들을 대동하고 천천히 걸어왔다.
제법 무공을 익혔는지 견실한 내력이 느껴졌다.
보폭은 일정했고 자세 역시 바로 섰다.
온통 머리를 빡빡 밀은 소림의 중이 아니라, 세속의 인물이다.
“무슨 말이시오, 송진문주.”
순간 천문경과 장노의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적개심.
그리고 다들 기쁜 낯이었던 표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걸 확인한 천무백은 실소했다.
‘대충 알겠다.’
천무백의 시선이 천천히 송진문주에게 향했다.
마침 송진문주도 천무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네놈이 청성표국의 막내인 천무백이냐?”
천무백이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의기양양한 얼굴과 달리 눈은 달랐다.
눈은 사람의 모든 걸 비추는 그릇이다. 천무백은 송진문주의 눈에서 똑똑히 봤다.
적개심, 불안함, 조급함…….
표물을 빼앗기고 무사들을 잃고, 의뢰했던 표행까지 실패했던 송진문이기에 청성표국 사람에 대한 적개심은 이해한다.
하지만 불안함과 조급함은 다르다.
천무백의 오감을 넘어선 육감에 잡힌 그 감정에 천무백은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다.
“알 만하군.”
“뭐?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송진문주! 이 무슨 행패요!”
“닥치시오! 표국주! 당장 내 무사들을 죽이고 표물을 강탈한 자작극을 벌인 당신네를 모조리 죽이고 싶지만 내 참고 있는 중이니!”
그 말이 신호였다. 송진문주가 일순 기세를 내뿜자 기다렸다는 듯 같이 온 무사들이 자리를 잡으며 마치 포위하듯 위협을 해왔다.
노골적인 적개심에 천문경과 장노, 표사들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형식상 구금이라 해도 구금은 구금이었기에, 그들은 모두 무기를 지니지 않은 상황.
한데도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천무백만이 담담했다.
그 담담함을 겁에 질린 거라고 해석한 송진문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이어진 천무백의 말에 미소는 처참히 깨졌다.
“외부인이 소림 내부에서 칼자루에 손을 올리다니. 소림의 속가문파가 언제 소림사의 계율 위에 서게 됐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