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7화>
37. 너 아는 게 많구나?
끄아아아아!
소름 끼치는 비명이었다.
“허억! 헉!”
파바밧!
척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내달렸다. 내공을 모조리 긁어 오로지 경신공을 펼쳐 댔다. 들려온 비명소리가 방금까지만 해도 살아서 섬서로 모시겠다던 수하였음에도, 그는 뒤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죽는다!’
처음이었다.
이 정도로 두려움을 느낀 건.
급히 하남을 빠져나가 전속력으로 섬서로 돌아가려는 순간부터였다.
이곳저곳 추적을 위해, 또는 감시를 위해 흩어놨던 수하들로부터 하나둘씩 연락이 끊겼다.
바로 지척까지 왔단 뜻이다.
급히 도망쳤지만, 이미 천무백은 척의 꼬리를 잡고 집요하게 쫓아왔다.
산 벌레 하나 울지 않는 고요한 숲.
“우아아아아악!”
흠칫!
척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불과 십여 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이 어둠을 일깨웠다.
“가, 가야 됩니다! 계속 도망쳐야 합니다!”
곁을 끝까지 지키던 수하 하나가 척의 굳어진 몸을 재촉했다.
정신 차린 척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고갤 끄덕이며 뛰었다.
‘더, 더 빨리 도망쳐야 한다!’
미친 듯이 내달리던 척의 눈앞에 검은 인영이 아른거렸다.
마치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위화감.
‘……천무백!’
불길한 경고가 뇌리를 스며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그림자에서 하얀 두 개의 점이 번뜩였다.
새하얀 백안(白眼)이 어둠을 갈랐다.
“커어억!”
조그마했던 하얀 점이 순간적으로 확대되더니, 곁에 있던 수하의 가슴에서 새빨간 선혈이 솟구쳤다.
그 아연한 광경에 척의 몸이 푸들푸들 떨렸다.
똑똑히 봤다.
무려 십장 거리 너머에 있던 그림자가 단숨에 짓쳐들던 모습을.
그의 곁에 있던 수하는 비록 자신의 밑에 있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수하들을 이끌던 조장급으로 실력만큼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 그가 아무런 반항조차 못 하고 가슴팍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말도 안 돼…… 천무백……!”
“뭐가 말이 안 돼. 새끼야. 인정 좀 해라. 어? 하여간 이 새끼들은 인정안하는 게 아주 버릇이야.”
“이노옴!”
“니 밑에 애들 다 황천길 건넜어요. 응? 근데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어조랑 눈빛은 뭐냐?”
순간적으로 변해 버린 천무백의 태도에 척은 당황했다.
우두둑!
천무백은 관절을 풀고는 척에게 다가왔다.
너무나 자유분방해 보였다. 오히려 과한 면이 있어 흑도의 건달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얼굴은 예의 귀찮은 기색이 한가득한 표정이었다.
“왜 도망을 치고 지랄이야. 여기까지 쫓아오느라 피곤해 죽는 줄 알았네.”
“너, 너는 누구냐. 진정 천무백이 맞느냐?”
“후우. 야.”
“……?”
“궁금한 건 내가 많아. 혈사문이 왜 혈귀곡이란 병신들하고 손잡았는지. 또 그 새끼들은 뭐 하는 놈들인지. 그러니까 질문은 내가 해. 알겠어?”
척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혈사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한데 혈사문의 뒷배라고도 볼 수 있는, 혈귀곡은 또 어떻게 안단 말인가?
사실 그건 척도 잘 모르는 단체다. 그저 이름만 알 뿐이다.
그만큼 혈사문 내부에서도 상위층만 아는 단체다.
그걸 어찌 천무백이 안단 말인가?
“네가 그걸 어떻게……?”
“봉구현에 제법 자료들이 견실히 쌓였더라고. 육성이가 죽기 전에 말해 준 것도 있고. 이것저것 교차검증하면서 추정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하! 멍청한 놈!”
척의 태도가 바뀌었다.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천무백을 안타깝게 여기듯 웃었다.
천무백은 무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냥 조용히 살아가면 될 것을.”
“허?”
“그저 전부터 그랬듯이 방에 틀어박혀 대금이나 불며 살면 될 것을. 어리석구나. 혈사문을 건든 거야 그렇다 치자. 네놈 실력을 보면 우리 혈사문하고 일전을 치를 수 있다고 자신했겠지.”
척의 얼굴에 점점 광기가 차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다르다! 그들은 달라! 그들은…… 진짜 마귀들이다! 특히 그분은, 그분은 네놈 따위의 목줄기는 가볍게 부러뜨리겠지!”
“그래?”
“흐흐흐. 언제까지 그리 의기양양할 수 있을 거 같더냐?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 챈 널 가만히 내버려 둘 줄 아느냐?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당장 하남을 떠나 남만으로 가서 숨어라. 그곳에 가면 혹여 아느냐. 목숨은 부지할지는! 아니면 발가벗고 춤이라도 추면서 용서를 구하던가!”
혈사문의 일을 그르치게 하면서 결국 뒤에 있던 혈귀곡의 심사를 건드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알려지는 걸 진심으로 싫어한다. 하물며 존재까지 알아차렸으니.
하니 천무백은 이제 죽은 목숨이리라.
그렇게 생각이 치닫자 척은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이 무서운 천무백이 비명을 내지르며 죽을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풀어졌다.
애석하게고 편안함은 잠깐이었다.
천무백이 빙글빙글 웃고 있다는 걸 인식한 순간, 머리칼이 쭈뼛 섰다.
마치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천무백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웃음을 지었다.
“너, 아는 게 많구나?”
* * *
“단주님, 도대체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허성과 천무백이 갈라진 지 열흘이 지났을 때.
곧장 소림으로 향하리라 여겼던 허성과 표사들은 아직 숭산에 도착 못했다.
정확히는 도착하지 않았다.
허성은 소림으로 가다가 중간에 방향을 틀었다.
허성이 곧장 찾은 건 바로 숭산의 거대한 산악을 따라 이어진 산맥 중 하나였다.
여기서 허성은 나흘 동안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산속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소림이 코앞입니다. 단주님. 국주님하고 총표두님이 구금당한 소림이요.”
“안다.”
수하 표사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그러면 당장 가야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무얼 찾는 것입니까?”
“도련님이 시키신 일이다.”
“네? 도련님이요?”
표사의 얼굴이 묘해졌다.
도대체 알 길이 없었다. 곧장 소림으로 향할 줄 알았던 천무백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허성도 그가 시킨 일이라고 철두철미하게 따르지 않은가.
“도대체 시키신 일이 무엇입니까? 국주님을 구하는 일보다 이게 더 급한 일입니까?”
“국주님을 구하기 위한 일이다.”
“네?”
그때였다.
대답하던 허성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잔뜩 긴장한 기색이 그의 표정에 드러났다. 급격한 변화에 표사가 어리둥절할 때 앳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저씨! 그거 밟지 마요!”
“……!”
“뭐야? 웬…….”
표사들은 일순 당화했다.
평범한 옷에 등에 망태기를 메고 있는 어린 소녀가 후다닥 달려오는 게 아닌가.
소녀는 허성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허리춤에 손을 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약초밭에 들어와서 마구 밟고 다니시며 어떡해요?”
소녀는 당차게 말하더니 허리를 숙여 쪼그려 앉았다.
퍽퍽!
“발 치워요! 밟고 있잖아요! 아저씨!”
그 당찬 모습에 표사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한데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그들의 부국주, 천유하가 어렸을 때와 겹쳐 보여 저도 모르게 미솔 지었다.
하나 허성만이 딱딱한 표정이었다.
“꼬마야.”
“왜요. 아니, 거기 밟으면 안 돼요! 다 나가요!”
“너, 혹시 망태기 어르신을 아느냐?”
“…….”
그 말에 소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할아버지 찾아왔어요?”
“……!”
“에휴. 어디 약이라도 받으러 오셨나보네. 따라와요.”
마치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에 오히려 표사들은 당황했다.
강호의 숱한 법도가 있다.
칼을 찬 사람들을 조심하라.
더구나 외지인이니 만나면 경계부터 하는 게 보통. 한데 소녀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안내까지 하지 않은가.
그제야 표사들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그 위화감에 확신을 준 건 허성의 발언이었다.
“다들 기척을 느꼈나?”
“……!”
표사들의 몸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맨 처음 허성의 얼굴이 굳어졌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표사와 대화를 하느라 신경이 흩어졌다고 한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는데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고요한 산속이라면, 작은 기척도 예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데 그때까지 표사들 뿐 아니라 허성마저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진법인가……?’
사실 아까부터 이상한 점을 느꼈다.
아무리 이동해도 무언가 길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기척마저 느끼지 못 하다니…….
만일 소녀가 악의를 가진 적이었다면?
이곳이 그들의 무덤이 됐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표사들의 안색이 변했다.
“따라갑니까?”
“따라간다.”
강호에선 의심스러운 건 무조건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허성은 확신했다. 드디어 천무백이 찾으라고 했던 사람을 찾았다고.
얼마나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소녀를 따라가면서 표사들은 더욱 확신을 굳혔다.
험한 산길이다. 표사들도 집중하지 않으면 버거울 정도로 거친 산길을 소녀는 마치 평지를 뛰듯이 가볍게 움직였다.
경계심이 한층 더 진해졌다.
“약 받으러 온 놈들이 뭘 그리 눈을 사납게 뜨고 잔뜩 긴장해?”
“……!”
“할아버지!”
작은 오두막 앞에서 약초를 햇볕에 말리던 노인은 소녀를 꼭 품에 안았다.
“녀석. 밖에 사람들 함부로 데려오지 말라니까.”
“에이. 할아버질 찾아왔어요.”
“나를? 흐음. 어디 약이나 받으러 온 느낌은 아닌데?”
노인은 예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촌부였다.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 주름진 얼굴, 바짝 마른 몸.
하나 허성은 긴장을 풀지 않고 정중하게 허릴 숙였다.
“혹여 묘교위 어르신이 맞으십니까?”
“내 본명을 아는 놈인 걸 보니. 목적이 있어서 왔구나.”
허성은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천무백이 찾으라고 했던 사람을 드디어 찾아냈다는 성취감이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이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꽁꽁 묶이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도련님이 찾으라고 한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허성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저 말없이 쳐다보는 묘교위의 무심한 시선에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허성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 급히 입을 열었다.
“저희 도련님이 반드시 찾아뵈라고 했습니다.”
“도련님? 어디서 오셨소?”
묘교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 주위를 둘러싼 압박감은 가시지 않았다. 뒤에 있던 수하들은 모두 압박감에 얼굴이 질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허성만이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원양현의 청성표국입니다.”
“청성표국? 그쪽 도련님이란 사람이 내 이름을 안다고?”
“…….”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이제는 세상에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리고, 이 말과 함께 서신 한 장을 전하셨습니다.”
“말해보시오.”
“맹수들을 피해 삼을 캘 수 있게 해 줬으니, 약이나 한 첩 지어 달라고 말입니다.”
“……!”
묘교위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한참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이 가라앉았다. 회한 어린 표정의 묘교위는 조금은 누그러진 기세로 중얼거렸다.
“그분의 진전을 이었단 말인가? 하긴. 그렇지 않다면 내 본명을 알고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묘교위가 마루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들어오시게. 약선의 약이란 게 금방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
순간 허성은 멈칫했다.
묘교위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 때문이다.
“약…… 선의 약이라고 말입니까?”
그러자 묘교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 정체도 모르고 그냥 보냈으니까 찾아왔는가? 본명은 알려줬으면서 별호는 알려주지 않다니. 그쪽 도련님이 확실히 그 별난 어르신의 진전을 이었나 보군.”
묘교위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약선(藥仙), 묘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