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6화>
36. 사냥감이다
분명 천무백의 위력을 모두 절실히 느꼈으나, 흑랑단은 망설임 없이 공세를 펼쳤다.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다!’
단순한 숫자 차이라면, 압도적인 실력이 그 간격을 메꿀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단순한 차이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만 거의 백여 명에 이르는 흑도들이 모여 있지 않은가.
‘여기서 일할만 칼을 쑤셔 박아도 열 번은 박힌다!’
사람이라면 살거죽으로 이뤄져 있고, 강철이 아닌 이상 칼에 찔린다.
물론 어느 정도 막겠지. 하지만 그중 한 번, 두 번만 칼이 들어가면 끝장이다.
그런 광기어린 믿음이 흑랑단의 얼굴에 새겨졌다.
천무백은 싸울 때 습관 하나가 있다.
“거참. 얘들도 약을 먹였나.”
바로 상대의 눈을 본다.
천무백은 그 짧은 찰나 달려드는 수십의 눈을 똑똑히 봤다.
여러 감정이 깃들어있다.
하나 그중에 공통된 감정이 있었다.
‘두려움인가? 광기?’
언뜻 드러난 두려움.
한데 그건 천무백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흑랑단주가 공포로 권력을 잡았나 보군.’
하긴, 외부인이 흑도 안에 들어와 차지하는 방법이 어디 쉬울까.
하나같이 잔머릴 잘 굴리는 놈들이니까.
치밀한 계책이 필요하다. 만일 계책이 없다면 답은 하나다. 지독한 공포로 권력을 휘어잡는 것.
천무백은 이해했다.
자신도 흑심방을 손에 넣을 때, 방주와 부방주를 직접 무참히 베었다.
그것이 나머지 흑도들이 고분고분하게 무릎 꿇었던 이유가 아니던가.
저 흑도들은 분명 천무백에게 달려들길 망설였다.
하나 그간 몸에 새겨진 두려움으로, 천무백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흑랑단주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으리란 두려움이 더 컸다.
우스운 일이다.
‘하면, 누가 더 두려운지 알려 줘야지.’
천무백의 눈이 새하얗게 빛났다.
“……!”
달려들던 흑랑단의 몸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눈은 뇌로 연결되는 지름길이다.
상단전과 통하는 통로다.
경천혼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검은 동공이 사라지고 새하얗게 타올랐다. 그 괴현상에 흑랑단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누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뒤로 빠지려는 순간.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누군가 경고를 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달려들던 놈이 처참한 비명을 토했다.
푸하악!
“끄아아악!”
사내의 허리춤이 크게 베어지며 선홍빛의 핏줄기가 솟구쳤다.
순간 흑랑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선혈이 흘러내리는 칼을 그대로 정면으로 겨누자 온몸이 돌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 동시에 공격해!”
쿠르르르!
흑랑단 중에는 제법 내력을 쌓은 실력자도 있었다.
쏟아지는 수십 개의 칼날 속에서 내기가 실린 공격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비록 공후한 내공도, 고명한 무공도 아니지만 흑랑단은 각자 가진 재주를 있는 힘껏 쏟아냈다.
수십 줄기로 쏟아져 오는 검격에서 평온함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이다.
한데도 천무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 강호에서 가장 먼저 죽는 놈들의 공통점이지.”
천무백의 나직한 목소리가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쿠쿠쿠쿠!
천무백의 주위로 새하얀 광채가 쏟아지더니, 이내 그의 주위로 하나의 공간을 잠식했다.
이질적인 광경이다.
하늘에 태양이 떠올라 어두운 구석 한 점 없지만, 천무백과 그 주위만은 따로 잘라 놓은 것처럼 더 유난히 빛났다.
“뭐, 뭐냐!”
“저건 또 뭐야!”
그 광경은 신비하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했다.
마치 빛이 천무백을 보호하는 것처럼 둘러쌌다.
천무백은 자신을 둘러싼 새하얀 광채를 보며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아직 모자르군.’
원래는 이 정도가 아니다.
고작 자신의 주위로 일장 반경으로 만들어지는 새하얀 공간.
한창때는 고작 일장이 아니었다.
적어도 천무백과 그를 둘러싼 흑랑단 전부를 삼켜야 했다.
마교애들이랑 푸닥거릴 할 때니까. 뭐 지금 그 정도 생각하는 건 너무 이른가.
고작 흑도 놈들 상대로 그 정도 하기엔 좀 아쉽지.
천무백은 전생에서 숱한 싸움을 해 왔다.
당연히 강호란 곳이 늘 낭만이 살아 숨 쉬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더 잔인하고 잔혹하고 비열한 세상이 아니던가.
천무백은 수없이 다수와의 싸움을 해 왔다.
매 생에서 천무백은 그 세상의 최강자였고, 필연적으로 숱한 적과 만났다. 적들은 천무백을 이기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수법을 들고 왔다. 바로 다수의 공격이다.
제아무리 천무백이어도 다수와의 싸움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결국 팔이 두 개고, 눈은 앞에만 있으니까.
한데도 천무백은 이겨 내야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호신강기였다.
숱한 다수와의 싸움에서 완성해 낸 그야말로 철벽의 호신강기.
귀곡광애(鬼哭光崖).
천무백이 완성해 낸 빛의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호에 식견이 높은 누군가 봤다면 경악을 금치 못 했으리라.
수십 년 전, 고금제일인 창천검신의 독문무공이자 최고의 호신강기인 귀곡광애.
귀신도 넘지 못해 곡을 낸다는 새하얀 절벽을 두른 채, 천무백은 흑랑단 사이로 뛰어 들었다.
쩌저저저저정!
흑랑단이 발작하듯 검을 휘둘렀다.
뿐만 아니다.
흑랑단주와 그의 혈사문 수하들도 황망한 얼굴로 모든 공력을 쏟아 냈다.
콰콰콰쾅!
절대 다수는 힘없는 그저 검격이지만 그사이에 제법 결신한 장력과 검기가 쏟아졌다.
하나 천무백은 단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미, 미친!”
“공격이 안 통해!”
모든 공격이 빛에 삼켜졌다.
천무백은 그들의 눈동자를 똑똑히 봤다.
여전히 떠올라있는 두려움이란 감정.
하나 그건 흑랑단주에게 향한 공포가 아니었다.
오롯이 자신에게 향한 두려움.
천무백의 미소가 그대로 흑랑단을 갈랐다.
쩌저저적!
천무백의 검에서 쏟아진 한줄기의 가공할 내기가 주변을 휩쓸었다.
“허억!”
저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양민들은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강렬한 기파와 함께 휩쓴 바람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비명과 고함, 칼이 부딪치는 그 시끄러웠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을 때.
겨우 실눈을 뜬 양민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
숨 막히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벽돌로 이중, 삼중으로 쌓은 전각의 담벼락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폐허가 됐다. 그 위로, 아래로, 뒤로, 흑랑단의 시신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전각을 향한 정중앙에 기다란 검흔이 남았다.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나서 땅이 쩍 갈라진 듯 깊게 새겨진 검흔.
그리고 그 옆으로 비틀거리며 서 있는 흑랑단주의 모습을 봤을 때, 사람들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간 자기네들을 못살게 굴던 흑랑단의 우두머리요,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악인의 비참한 최후가 눈에 선했다.
흘러나오는 내장을 담을 생각도 못한 채 흑랑단주는 비틀거렸다.
그가 곧 죽으리라는 건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알았다.
“넌…… 넌 누구냐. 어떻게…… 이건, 이건…… 귀곡광애가 아니더냐.”
“전혀 멍청이는 아니군. 귀곡강애를 알아봐? 본 적 없을 텐데.”
“창천검신. 그리고 검존. 마도와 사도의 길을 걷는……우리에겐 그 둘은 근처에 가지도 않아야 할 괴물들이다. 넌 검존의 제자더냐?”
천무백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검존의 제자라.
녀석. 아직 살아 있기는 한가.
천무백은 불현듯 죽기 전 자신의 곁을 지켰던 검존을 떠올렸다. 듬성듬성 났던 그의 하얀 머리칼까지 같이.
“검존과 관련된 사람이긴 하다.”
“허어…… 그런가. 큰일이군. 으하하하. 큰일이야. 창천검신이 등선하기까지 숨죽였고, 그 이후에도 검존이 사라질 때까지 숨어 살았건만. 그놈의 제자가 나타나다니. 으하하하!”
흑랑단주는 피를 토하며 웃었다. 그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천무백은 그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진정, 창천검신의 제자인 검존, 그의 제자라면 혈사문…… 아니 그 뒤에 혈사문을 조종하는 혈귀곡은 진정 큰 실수를 했다.
비록 아직은 어린 애송이지만…….
‘그 창천검신의 후예다! 검존의 제자란 말이다!’
눈앞의 천무백은 적으로 돌려선 안 될 사이다.
아니, 아예 마주쳐서도 안 된다.
“쓰읍. 조금 뭘 오해하는 거 같은데.”
“……?”
“난 검존의 제자가 아니다.”
흑랑단주의 얼굴에 혼란스런 빛이 떠올랐다.
검존의 제자가 아니다? 하면 저 귀곡광애는 뭐란 말인가?
문헌으로 전해지고, 강호의 풍문으로 들었던 귀곡광애가 분명했다.
아니라면, 이런 상황을 초래할 수는 없다.
하면, 검존의 혈연이라도 된단 말인가?
하나 이어지는 천무백의 나직한 말에 흑랑단주는 말을 잃었다.
“그놈이 내 제자야.”
“……!”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나 입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경각에 달했던 목숨이 끊어지고 있었다.
“창…… 천…… 검신!”
단발마의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채, 흑랑단주는 하나의 의문을 눈에 담고 죽었다.
살아남은 흑랑단은 극소수였다.
그 압도적인 무위에도 뒤에서 지켜보던 양민들은 단 한명도 다치지 않았다.
순간 놀라서 뒤로 넘어져 타박상일 입은 한 둘이 전부였다.
천무백의 시선이 반쯤 무너진 전각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차례 훑었다.
엄청난 존재감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한데, 놀랍게도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건 지독한 공포 따위는 아니었다.
털썩!
“아이고오! 부처님!”
누군가 바닥에 냅다 절을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하나, 둘씩 모두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부처님!”
“나무아미타불!”
“무량수불!”
그들의 눈에 비친 천무백은 절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를 온몸에 두른 채, 그들을 두렵게 했던 흑랑단을 단 일거에 없애버린 모습.
“신장님이시다!”
장 씨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소림이 있는 하남이다 보니, 부처를 찾는 양민들이 유난히 많은 게 이 고을이다. 장 씨는 천무백의 모습을 보고 불가에서 수호신이라 부르는 팔부신장을 떠올렸다.
악인들의 시체 위에 오롯이 홀로 서 있는 천무백의 존재감.
“아아!”
그들이 느낀 건 공포심 따위가 아니다.
빛에 둘러싸인 채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든 천무백의 모습은 신장(神將)이나 다름없었다.
경외심 그 이상의 감정으로 천무백의 그들의 눈에 비쳤다.
‘마귀를 없애 주러 온 신장이다!’
‘하남에 신장이 내려왔다!’
하나 천무백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전각에 시선을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인영이 흐느적거리며 뛰어나왔다.
등에 커다란 보따리를 하나 메고 있었다.
능허는 뛰쳐나오다가 밖의 참상을 보곤 흠칫 놀랐다.
“어? 뭔, 썅. 폭풍이라도 부르는 재주가 있소?”
능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흘깃 천무백의 눈치를 봤다.
놀랍게도 옷이나 얼굴에 피 한방을 튀지 않은 모습이었다.
‘썅. 개겼다간 진짜 뒈질지도 모르겠네.’
주위의 참상.
그 엄청난 인원의 시신과 피를 보고, 능허는 솔직히.
‘존나 후달린다. 진짜 야.’
전각에 들어갔더니 튀어나오는 몇 놈하고 거의 생사결을 벌였다.
쉬운 일 운운했던 천무백에게 따지려고 했던 능허는 그런 마음을 모조리 꼭꼭 숨겼다.
“자. 이제 숭산으로 갈 거요?”
“가야지.”
“그럼 바로 배타고 갑시다. 그게 빠르니까.”
천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일은 보고 가야지.”
“일? 우리 일 다 본거 아니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
“하남에서 혈사문은 모조리 사라져야 한다고.”
순간 능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시선이 천무백 너머 절을 하는 사람들에게 닿았다.
그들은 천무백을 그저 불가의 신장처럼, 수호신처럼 여겼지만, 능허는 달랐다.
‘이…… 미친 놈!’
천무백의 웃음이 더 진해졌다.
* * *
“봉구현의 흑랑단 전원 전멸입니다.”
“…….”
척은 들어오는 보고에 입을 다물었다.
천무백의 행적을 뒤늦게 쫓는데, 이미 일이 벌어졌다.
봉구에 있던 혈사문의 하남근거지가 하룻밤사이에 사라졌다.
척의 떨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천, 천무백은 어디 있느냐? 아직 봉구현에 있느냐?”
“행적을 놓쳤습니다!”
척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무슨 방법을 쓰는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천무백은 혈사문의 추적을 아주 간단히 뿌리친 채 모습을 감췄다.
그야말로 기이한 일이다.
그때였다.
또 다른 수하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정주에 대기 중이던 1조로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
“신밀에 대기 중이던 3조도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그 말에 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급히 수하에게 명했다.
“공의와 언사에 있는 2조와 4조에게 빨리 연락을 취해라!”
천무백을 잡기 위해 소림으로 가는 길 곳곳에 숨겨놨던 혈사문의 무사들.
그들로부터 하나둘 연락이 끊기자 척은 순간 오한이 들었다.
맨 처음 추적을 시작할 때부터 느꼈던 불길함이 머리끝까지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보고에 척은 끝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2조와 4조도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
지독한 정적이 가라앉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장 최악의 상황에 모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척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모두 짐을 챙겨서 전속력으로 하남을 빠져 섬서로 간다!”
“……네?”
“천무백 추적을 포기하고 말입니까?”
그 말에 척이 웃음을 터뜨렸다.
뜬금없는 웃음에 수하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들은 이내 핏발선 척의 눈동자를 보곤 딱딱하게 굳었다.
“추적? 추적이라고? 으하하!”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웃던 척이 별안간 정색했다.
“추적은 우리가 당하고 있다. 놈을 잡기 위해 숨겨놓은 덫을 하나씩 다 제거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천무백은 사냥감이 아니야. 우리도 사냥꾼이 아니야. 아니, 사냥꾼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척이 푸들푸들 떨었다.
“우리가 사냥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