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5화>
35. 누구 맘대로?
“뭔 난리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시위가 일어났다는데?”
“시위?”
흑랑단에 소속된 흑도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무슨 시위래?”
“타도 흑랑단이겠지.”
“나참.”
그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양민들은 표정 구기고 칼 한번 보여 주면 허리를 굽신거리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상황을 정리하러 나갔던 흑도 몇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오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거리를 꽉 메운 군중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그간 억눌린 불만이 일시에 터졌다.
하나 흑랑단의 커다란 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기세는 점차 힘을 잃었다.
여러 전각을 둘러싼 높은 담장 앞에 흑도들이 눈을 부라리며 지켰다.
“이 개새끼들이! 지켜 주고 보호해 줬더니, 이젠 지랄을 해?”
“당장 썩 돌아가서 장사나 해! 이것들아!”
“영영 장사하기 싫어?”
상점 주인들이 하나같이 두려워할 말을 던지며 겁박 질렀다.
“어이! 양 씨! 자식 놈이 요즘 공부한다면서? 양쪽 눈알을 다 뽑아 버리면 공부할 수나 있나?”
“여! 네놈 부인이 나이치곤 야들야들해 보이던데. 확 집에 방문해서 내가 응? 은혜를 베풀어 줄까?”
맨 처음 소란을 일으킨 양민들을 모두 죽여서 본보기를 보일 셈이었다.
그러기엔 숫자가 너무 많았다.
자칫 한두 놈 본보기로 죽였다가, 오히려 불길에 기름을 붓는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흑랑단도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겁박질러 일단 이 상황을 무마시키고 나중에 보복할 생각이었다.
기껏해야 식칼이나 도리깨 같은 농기구를 들고 나온 양민들은 모두 주춤거렸다.
기세 좋게 뛰쳐나오긴 했지만 그간 몸에 새겨진 공포가 떠올랐다.
그 모습에 흑랑단들은 비열하게 웃었다.
“썩 꺼져! 이 쓰레기들아!”
그때였다.
저벅.
흑랑단을 포함해 수백의 군중들이 대치한 상황.
서로 욕설을 내뱉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시장 한복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시끄럽다.
그런 와중에 절묘하게 사람들 틈 사이로 내지르는 발걸음 소리가 모두의 이목을 빼앗았다.
저벅, 저벅.
군중들 사이로 천무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린 걸음.
명승지에 유람이라도 나온 것처럼 뒷짐을 진 채 주위를 슥 둘러보며 나오는 천무백의 모습에 군중들은 일순 침묵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특별한 걸 한 게 아니다.
그저 걸었다.
한데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천무백의 손짓 하나에 시선이 절로 끌렸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묘한 분위기.
허리춤에 칼 하나만을 찬 채 흑랑단과 양민들이 대치하는 빈 공간 중앙에 우뚝 멈춰 선 천무백.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유효한 행동 중 하나가 바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천무백은 침묵했다. 상단전을 열고 경천혼공을 운용했다.
느껴졌다.
‘두려움, 황당함, 당황스러움, 희망······.’
군중들이 내뿜는 각자의 고유의 기파가 있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해도,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담겨 기파로 흘러나온다.
천무백은 그 모든 외기의 흐름을 읽었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외기의 흐름. 그사이를 절묘하게 파고드는 천무백의 발걸음.
그것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으로 표출됐다. 천무백은 한가운데 서서 전각 앞을 막아서는 흑랑단을 하나씩 쳐다봤다.
그들 중 가장 강골인 사내가 겨우 입을 뗐다.
“넌 누구냐?”
“천무백이다.”
“천무백? 그게 누구지?”
“넌 누군데?”
“나는 요성검 추각이다!”
“요성검? 그게 누구지?”
“······.”
본인이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하는 천무백 때문에 추각은 일순 말을 잃었다.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건 간단하지. 네놈들 대가리나 나오라고 해.”
“이 자식이! 네가 이 새끼들 선동한 거냐?”
“대가리. 나오라고 하라고.”
“······!”
순간 흑랑단은 가슴이 꽉 조여 오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천무백의 기세는 순식간에 흑도들을 파고들고 전각 전체를 뒤흔들었다.
정확히는 전각 안에 있던 몇몇에게 향하는 기파였다.
천무백은 저들을 끌어내려고 마음먹었다
일부러 적당히 기파를 조절했다.
‘너무 강해 보이면 튈 수도 있지.’
적당히 강해 보이되 무시할 만한 상대는 아닌 수준.
그러니까 호기심을 이끌어 낼 만한 수준으로 기파를 쏘아 보냈다.
당연히 반응이 왔다.
천무백의 기파에 전각의 대문을 열고 중늙은이가 걸어 나왔다.
그가 바로 지금 흑랑단주이리라.
흑랑단의 흑도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보는 순간 천무백은 직감했다.
흑랑단주와 함께 같이 나타난 세 명의 무인.
모두 흑랑단 흑도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끈적끈적하면서도 음침한 특유의 마기.
‘혈사문.’
천무백이 눈이 빛났다.
제대로 찾아왔다.
숫자는 적었다. 천무백은 기감을 최대한 예민하게 넓게 퍼뜨렸다.
‘나머지는 날 잡으려고 곳곳에 파견나간 것이군.’
남은 놈들은 저것들뿐이다.
하나 그간 모아놓은 혈사문 관련 자료는 고스란히 있으리라.
천무백은 슬쩍 뒤를 살폈다.
어느새 군중 사이에 있던 능허가 사라졌다.
확실히, 눈치는 빠른 놈이다.
‘쩝. 아직 전각에 한 놈 있긴 한데.’
뭐, 저 정도면 능허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네놈은 누구냐.”
그때 조금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호의 싸움은 의외로 길거리 싸움과 흡사한 면이 있다.
서로 인사를 하고 고명하게 존중하며 싸우는 건 싸움이 아니라 비무다.
싸움은 서로를 죽여야 했다.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게 심리전이다.
상대의 집중력을 흩뜨리고 무너뜨리는 것.
“네놈 모가지를 따러 온 어르신이다.”
“······!”
크. 한방 먹였네.
황당해하는 얼굴의 흑랑단주를 보며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새끼야. 공자가 가르침을 전한 게 언제인데. 어르신이 왔으면 인사 올려야지. 장유유서 몰라? 응? 능허 새끼도 아는 걸?”
“······.”
흑랑단주가 어처구니 없는 눈으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뿐인가.
그를 따라 나온 사내들도 모두 입을 쩍 벌었다.
흑랑단주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천무백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하긴, 그런 가르침을 알았으면 술에 독타고 약에 독타는 짓거리를 안 했겠지.”
“······!”
순간 흑랑단주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천무백이 그를 조롱하듯 웃었다
“혈사문의 떨거지들아. 천무백이라고, 천무백. 모르겠나? 육성과 구진해를 죽인 게 나다.”
천무백은 그 표정을 감상하듯이 쳐다봤다.
그제야 천무백이란 세 글자 이름을 떠올린 흑랑단주는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때였다.
끄아아아-!
전각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흑랑단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혼자 온 게 아니구나?”
그는 곧장 손을 들었다. 동시에 뒤에 있던 혈사문도 하나가 몸을 돌려 전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니, 뛰어 들어가려 했다.
쐐액!
천무백은 손가락 끝에 공력을 주입했다. 혈사문도 하나가 몸을 돌리자마자 탄지공을 벼락처럼 쏘아 보냈다.
한줄기 푸른빛이 대기를 가르며 정확히 놈의 뒤통수에 박혔다.
푸석!
말발굽에 밟혀 깨지는 수박 통처럼 머리가 처참하게 깨졌다.
마치 폭발이라도 하듯 새빨간 핏줄기가 솟구쳤다.
“······!”
주위가 정적에 빠졌다.
끔찍하게 죽어 버린 시체에 모두 말을 잃었다.
상당한 거리다. 그 거리를 탄지공을 쏘아 보내는 내공의 중후함은 둘째 치고, 정확히 머리를 터뜨리는 실력에 모두 소름이 오돌토돌 돋았다.
언제든 저 멀리서 머리를 터뜨릴 수 있는 괴물이 아닌가.
주위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천무백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륵.
“어딜 가려고?”
“천무백!”
“우리 볼 일 많잖아? 육성과 구진해를 잡은 것도 나고. 너희도 나한테 불만 많잖아?”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혈사문이잖아?”
“······우린 네놈에게 먼저 해를 끼친 적은 없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어쩌면 맞는 말이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어쨌건 혈사문을 먼저 공격한 건 천무백이었으니까.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혈사문이 마수를 뻗을수록 천무백과 청성표국에 종국엔 악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러니 천무백은 미리 제거하는 것뿐이다.
더구나 숱한 전생을 살면서 천무백의 신념 중 하나가 있다.
강호의 일은 강호에서만 이뤄져야 한다.
혈사문은 강호의 무림집단이고, 강호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한데 그들의 악영향이 일반 양민들에게 끼치는 것만큼은 검을 잡은 무인으로서 차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것은 특별히 그가 특출한 정의감에 불타서가 아니었다.
그냥 인간이라면 당연해야 할 합당한 도리였을 뿐이다.
‘당연한 거다.’
검을 잡고 그 길을 걸어가는 강호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신념이지.
“내가 허락지 않는 한 단 한걸음도 떼지 못한다.”
“이 미친 새끼가!”
쾅!
천무백이 한차례 땅을 굴렀다.
강렬한 기파에 흑랑단주와 흑랑단들은 모두 속이 진탕됐다. 그들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너희들의 모든 움직임! 생각! 그리고 호흡까지! 여기선 내가 통제한다!”
“······!”
천무백이 검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너희들의 생사까지도, 내 맘대로야.”
* * *
“동시에 쳐라!”
흑랑단주는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 천무백을 죽여야 했다.
어차피 천무백을 죽이기 위해 하남에 있던 혈사문도들이 모두 떠나지 않았는가.
흑랑단주는 천무백이 육성과 구진해를 죽인 장본인이라 했을 때 믿지 않았다.
그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저 악기나 불 줄 아는 서생에 불과했으니까.
하나 지금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위험한 놈이다!’
맞닥뜨린 천무백은 충분히 육성과 구진해를 죽일만한 위인이었다.
분위기를 휘어잡는 능력이나 방금 전 탄지공으로 수하의 머리를 박살 낸 것하며.
모두 육성과 구진해보다 더한 무위임이 분명했다.
흑랑단주는 육성, 구진해보다 급이 떨어진다. 그 둘은 장로였으니까.
하나 그래도 그는 자신 있었다.
바로 흑랑단의 숫자.
제아무리 고수여도 손은 두 개다.
검은 하나다.
내공은 한정되어 있다.
‘나이도 어린놈이니, 내공을 쌓아 봤자 얼마나 쌓았겠느냐!’
답은 축차소모다.
흑랑단의 흑도들이 계속 달려들면서 놈의 내력의 고갈을 유도하면 그만이다.
제아무리 강대한 고수라고 한들, 내력이 무한한 것은 아닐 테니까!
그사이 흑랑단주는 전각으로 돌아가 또 다른 침입자를 제거할 속셈이었다.
전각에는 하남에서 혈사문이 벌인 사업과 행적이 고스란히 서류로 남아 있다.
그것이 자칫 세상에 알려진다면, 흑도를 장악해 뒤에서 마수를 뻗던 혈사문이 그대로 드러나리라.
“모두 저놈을 죽여라! 저놈의 배에 구멍을 낸 자에게는 내 큰 상을 내리마!”
흑랑단주가 그렇게 외치곤 전각으로 뛰어가려는 순간, 무언가 파공성을 내며 단주의 목젖을 노리고 쏘아져왔다.
쐐에엑!
‘내공!’
그건 조금 전 수하의 머리를 터뜨린 탄지공이었다.
단주는 그래도 있는 힘껏, 내력까지 사용하며 몸을 뒤틀었다.
푸악!
어깨 한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탄지공. 하나 그것만으로도 끔찍한 고통이었다. 어깨가 한 뭉텅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끄윽!”
단주는 날아간 어깨를 나머지 손으로 붙잡고 비틀거렸다.
그는 떨리는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수십 명의 흑도들로 둘러싸여 유유히 검을 휘두르던 천무백과 눈빛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말했다.
“움직임도, 호흡도, 그리고 목숨도. 내 맘대로 한다니까? 어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