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4화>
34. 하남협객
사실 흑도에서 오래 굴러먹은 사람이면 감이 좋다.
본능적으로 위험한 판인지, 다 죽을 판인지 감지한다.
그래서 도망치거나 바닥을 핥을 정도로 굽히며 살아남는 방도를 택한다.
하나 적어도 정주는 아니었다.
‘께름칙한데.’
정주는 천무백의 얼굴을 노려봤다.
‘옆에 놈을 믿고 저러나?’
슬쩍 보니 살벌한 인상이다. 능허를 본 정주는 이 사람이 동종업계임을 직감했다.
‘조금 이상한 조합인데.’
부잣집 도련님과 흑도라.
“뭐요. 혹시 그쪽이 이 애송이 납치라도 하는 건가?”
그 말에 천무백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심한 얼굴로 정주를 바라보다가 능허에게 말했다.
“능허야.”
“네.”
“미안하다.”
“왜요?”
“너만 한 놈이 없는 거 같다.”
“그렇긴 하죠.”
“같은 흑도라고 다 똑같이 잔머릴 잘 굴리는 건 아니구나.”
“저 능헙니다, 능허.”
천무백과 능허가 저들끼리 대화를 하자 정주의 얼굴이 벌게졌다.
‘여기 애꾸눈이 께름칙한데. 숫자 앞에 장사 있나.’
흑도의 법칙 중 하나다.
상대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절대고수가 아닌 이상.
숫자만큼 정확하고 신뢰성 있는 지표는 없다.
조금 께름칙하긴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과 험악한 얼굴의 흑도 놈 하나다.
그렇게 여기자 정주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봉주에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은 없다. 흑랑단이 새 우두머리들? 그놈들은 흑랑단에 아예 관심도 없다. 심지어 들어오는 수익에 손도 대지 않는다.
그러니 정주는 안하무인이었다.
“어이. 꼬맹아,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하면 이 어르신이 용서해 주마.”
“지랄한다.”
“어떻게, 제가 처리할까요?”
“능허야.”
“네. 준비됐습니다.”
“너는 꼭 쉬운 상대일 때는 먼저 나서는 척하더라?”
“…….”
“말했잖냐. 싸움은 오늘 내가 한다고.”
천무백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자신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천무백 때문에 정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을 두고 쉬운 상대를 운운하다니.
사실 그쯤에서 웬만하면 이상함을 눈치채야 한다.
하나 그랬다면, 애당초 정주가 봉주현의 중간 간부에 머물렀겠는가.
“이 개새끼가!”
정주가 어느새 칼을 뽑아 내질렀다.
그 순간에 천무백이 발로 탁자를 툭 엎어 버리며 칼이 나무 탁자에 박혔다.
푹!
“……!”
정주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탁자에 박힌 검을 그대로 뽑으면 된다. 한데 마치 강철에 박힌 것처럼 검이 뽑히지 않았다.
탁자 뒤로 천무백의 미소가 보였다. 정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덤빌 놈이 아니었다!’
그러면 여기서 판단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만일 능허였다면 이 상황에서 미친 듯이 도망쳤을 거다.
흑도들이 무공이 고명하진 않아도, 제법 한가락 하는 게 바로 경공이다.
능허도 썩 괜찮은 경공을 익혔다. 흑도의 사내라면 가장 먼저 몰두하는 게 바로 경공이란 얘기가 있다. 그만큼 워낙 죽을 위기가 많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공이 필수니까.
한데 정주는 미련하게도 또 다른 선택을 했다.
“뭐 해! 당장 이 새끼 죽여 버려!”
정주와 함께 온 수하들이 ‘와’하는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지켜보던 능허가 나서려는 순간.
천무백의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탁자 하나를 손에 잡은 채로, 오른손은 검집에 올라갔다.
“죽엇!”
등 뒤에서의 기습은 가장 위험하다.
숱한 고수들이어도 등 뒤의 공격엔 별수가 없다. 손이 뒤에 달린 것도, 눈이 뒤에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위험한 만큼, 대비는 철저하다.
천무백은 탁자를 가볍게 밀어내며 정주와 한 놈을 뒤로 무너뜨렸다.
“으악!”
동시에 몸을 빙그르르 돌면서 검을 뽑았다.
빛이 한차례 번쩍였다.
스걱!
등 뒤에서 기습했던 흑도 하나의 머리가 깔끔하게 잘랐다.
어찌나 깔끔하게 잘랐는지 피가 솟구치지도 않았다.
“……허.”
능허의 입에선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감탄했는지 그건 탄식처럼 들릴 정도였다.
천무백의 움직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이미 짜인 대로 서로 합을 맞추는 것처럼, 물 흐르듯이 흘렀다.
한 놈을 처리하고 곧장 몸을 돌리며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단칼에 한명의 가슴팍이 쩍 벌어졌다.
검을 휘두르면 여지없이 목숨 하나가 사라지고, 핏물이 바닥을 흘렀다.
단 한칼이었다.
분명 중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비틀거리며 발악이라도 해 볼 만하겠지만 여지없이 모두 쓰러졌다.
‘맙소사. 설마 급소만 노리고 있는 것인가?’
능허의 눈이 부릅떠졌다.
검이 가는 대로, 그저 휘두르는 게 아니다.
능허가 보기엔 분명 피를 흘려도 단숨에 죽을만한 상처는 아니건만. 상대들은 단칼에 여지없이 쓰러졌다. 자세히 보면 그 모든 게 급소였다. 비단 급소가 목이 잘려야만 되겠는가.
가슴에도 급소가 있으니 그저 푹 찌르기만 해도 죽는 것이다.
“으, 으어어어!”
정주는 반쯤 미친 채로 달려들었다.
어느새 수하들이 모조리 죽어 나자빠지고 남은 건 그뿐이었다.
“검을 쓰는데 뭐 고명한 검도(劍道)가 있는 건 아니지.”
천무백은 그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다 검을 거둬들였다.
“그래도 말이다. 검을 쓰기엔 아까운 놈이 있기 마련이다.”
천무백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너 같은 놈에게 내 검을 주면, 내 검에 당한 사람들이 억울해하지 않겠느냐?”
천무백이 정주의 무식한 공격을 한차례 피했다.
‘천마놈이 얼마나 억울하겠냐. 응?’
천무백이 말끝에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어랏!”
다시 한번 쭉 찔러져 오는 정주의 박도.
천무백의 왼손이 순간 작은 원을 그렸다.
“……!”
그 원 안으로 검이 들어가는 순간.
빠각!
정주의 손목이 뒤틀렸다.
우드득!
천무백의 손이 정주의 뒤틀린 손목을 타고 올라갔다. 팔꿈치를 옆으로 꺾어 버렸다. 이어서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뽑아 버렸다.
“으어억!”
천무백은 마지막으로 공격을 주입한 손으로 그대로 정주의 머리를 후렸다.
쿵!
얼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피가 터져 나오며 정주의 거대한 몸뚱이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능허가 다가왔다.
“와. 진짜 구경만 하니까 이거 좀 재밌네요.”
“재밌어?”
“원래 불구경하고 싸움구경만큼 재밌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얘들, 혈사문 애들하고 관련 있는 거 맞는 거 같지?”
“딱 연화루 접수하는 방식이랑 똑같네. 우두머리 갈아치워서 자리 앉고, 운영은 밑에 애들한테 맡기고.”
“그도 그렇고. 음식에서 더러운 냄새도 나고.”
천무백은 이미 알고 왔다.
이곳에 혈사문의 하남 근거지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 그 근거지가 어떤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잠깐 상황을 살피기 위해 들린 객잔에서 핵심을 짚을 수 있었다.
객잔 주인과 주방장은 조심스럽게 얘기했다고 하지만 천무백의 청력에는 여지없이 다 잡혔다.
무엇보다 음식.
음식에서 쌉싸름하게 느껴지는 그 특유의 독.
혈사문이 맞았다.
“흑도 하나를 집어삼키고, 주위 상가를 통해 독이 주입된 약하고 식재료를 공급한다라……. 나쁜 짓에는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요. 이놈들.”
“그러게나 말입니다.”
“뭐 하냐.”
“네?”
“슬슬 준비해라. 흑랑단인지 뭔지, 걔들한테 간다.”
“후우.”
능허의 얼굴에 긴장이 새겨졌다.
“대, 대협. 혹시 흑랑단을 공격하시려는 겁니까?”
그때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객잔 주인, 장 씨가 다가왔다.
* * *
지금 장 씨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후달린다. 후달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저 부잣집 도련님인 줄 알았던 잘생긴 청년이 시비를 걸 때만 해도, 장 씨는 큰일이 났구나 싶었다.
그래서 점소이를 관아에 보내 신고하려고 했다.
물론 관아의 포졸들이 와도 흑랑단이 관계된 걸 알면, 별수를 쓰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객잔에서 사람 죽는 꼴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죽는 꼴을 보려면 흑랑단이 죽어야지.
그렇게 여겼건만, 저 대단한 청년은 순식간에 무시무시했던 정주와 흑도놈들에게 벌을 내렸다.
그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 기대하지도 않던 일이다.
장 씨에겐 천벌처럼 느껴졌다.
천벌!
그 단어를 떠올리자 몸이 파르르 떨렸다.
관아의 포졸들도, 정마대전 이후 봉구현에서 자취를 감췄던 정파의 무관들도 하지 않았던 일을.
저 청년이 해 줬다.
하물며 대화를 들어보니, 일자무식인 장 씨가 보기에도 지금 흑랑단을 공격하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장 씨의 마음에 한가락 희망이 떠올랐다.
“협객!”
그랬다.
스스로를 협객이라고 한 사람 중에, 진짜 협객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똑똑히 기억했다. 정주보고 자신이 협객이라고 외치던 모습.
그러니, 그는 나섰다.
흑랑단은 무려 이백 명이 바글거리는 집단이다.
저 청년이 대단해 보이는 건 안다. 하지만 일반 양민에 불과한 장 씨는 무공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없다. 다만 고작 홀로 이백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아니까. 그는 미친 듯이 떨리는 마음을 잡고 나섰다.
“대, 대협. 혹시 흑랑단을 공격하시려는 겁니까?”
물론 긴장은 했다.
협객이 아니라면?
그냥 양민을 죽이는데 거리낌 없는 무도한 무림인이라면?
그런 불길한 예상은 천무백에게 다가간 순간 모조리 사라졌다.
천무백의 입가에 띤 잔잔한 미소.
그건 근처 사찰에서나 볼 수 있던 고승의 미소 같기도 했으며, 동자승의 해맑은 웃음 같기도 했다.
하니 불안한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제야 장 씨는 깨달았다.
‘협객이다!’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진짜 협객말이다.
천마를 물리쳤다던 창천검신 같은, 그런 협객.
그러니 장 씨가 외쳤다.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아니, 같이 가겠습니다! 흑견 놈들에게 당한 건 나니까, 직접 갚아야죠!”
그 말에 한쪽에 있던 애꾸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나 청년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했다.
“흑랑단이 있는 곳까지만 안내해 주세요. 그들을 상대하려는 마음은 내 고맙게 여기고 받겠지만, 이건 칼 찬 사내들의 싸움이오.”
“……!”
“하나 길 모르는 외지인에게 안내를 해 준 것만으로도, 어쩌면 내가 진다면 당신에게 흑랑단 놈이 보복할 수 있는 일이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니 안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기를 낸 것이오. 자랑스러워해도 좋소.”
“……알겠습니다.”
장 씨가 무언가 치미는 감정을 꾹 참고 부랴부랴 움직였다.
굳이 말하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주방장과 점소이가 밖으로 같이 나왔다.
객잔에서 일어난 소란을 듣고 거리에 나와 있던 다른 상가의 주인들도 상황을 듣곤 손에 식칼이니, 도리깨니, 갖가지 연장들을 들고 나왔다.
일종의 군중심리일지도 모른다.
하나 어찌 됐든, 그간 흑랑단에 억눌러왔던 분노가 일시에 터져 나온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며 능허는 미간을 좁혔다.
“이거 조용히 처리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조용히?”
“시끄러워지면 지금 혈사문놈들이 증거고 나발이고 다 소각하고 튀지 않겠습니까?”
“양민들이 들고일어났다고 혈사문애들이 튄다고?”
“네?”
“지금 이 소란 말이다. 어디서 들어온 외지인이 혈사문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냐, 아니면 양민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냐?”
그 말에 능허는 입을 쩍 벌렸다.
솔직히 말해 아까 장 씨가 길을 안내하겠다는 걸 수락할 때 능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속전속결로 혈사문 애들 다 처리하고, 여러 자료들을 긁어모아 와야 하지 않겠나.
더구나 위험한 일이다. 이런 위험한 일에 양민들이 끼어 들어서 무슨 도움이 되겠나.
그러나 지금 이해가 갔다.
“그러네. 양민들이 소란 일으킨 거로 생각할 테고, 이걸 제압하려고 사람들 내보낼 테고, 그렇다고 양민들이 일어난 거니 자료들 소각하고 튀진 않을 거고. 와. 씨. 나보다 잔머릴 더 잘 굴리네?”
“잔머리가 아니라 계책이다.”
“그게 그거죠.”
“조만간 날 잡자.”
“네?”
“여름이 막바지니, 몸보신 할 겸 개를 잡아야겠다.”
“죄송합니다.”
천무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장 씨가 양민들 앞에 서서 소리쳤다.
“협객이 그 흑견 놈들의 정주를 무참히 벌하셨소! 그리고 이제 흑견 놈들 본거지로 가서 혼쭐을 내준답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기까지 협객을 보호하고 안내합시다!”
천무백은 장 씨가 외치는 협객이란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협객으로 보이냐, 능허야?”
“뭐 제 눈엔 개자식…… 아니 협객이죠. 이게 협객 아니면 뭐겠습니까. 목적은 달라도, 뭐 결과는 이들에게 이로운 거니까.”
“흑도를 때려잡으면 협객이냐?”
“보통 협객소리 듣는 게 흑도 먼저 치는 겁니다.”
“그럼 넌 흑도 협객이냐?”
“오. 그거 괜찮네요. 그럼 주군은 하남협객하면 되겠습니다.”
“비단 내가 협객이겠느냐?”
“네?”
천무백은 거리를 가득 메우는 양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협객행이고, 저들이 진짜 하남협객이겠지.”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용기를 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협객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