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3화 (33/318)

<검신재생 33화>

33. 협객행

혈사문이 하남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천무백을 노리는 가운데.

천무백이라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일전에 육성의 금제를 풀고 캐낸 정보.

연화루를 통해 들어오는 관아와 상인들의 수많은 이야기. 거기에 하남에서 가장 큰 도읍 중 하나인 개봉을 꽉 잡은 흑심방을 손에 넣으면서, 천무백은 혈사문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꼬리다.

“본거지는 섬서죠. 섬서까지 가겠다는 뜻은 아니죠?”

능허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 하나의 경계를 넘는다는 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쉬운 의미가 아니다.

능허도 흑도판을 굴러다녔지만, 그의 영역은 하남성이었지, 그 이상을 벗어나 본 적은 거의 없다.

그만큼 넓은 땅덩어리의 중원이 아니던가.

대개의 사람은 본인이 태어난 마을에서 평생을 살다가 죽는 세상이었으니까.

“지금은 아니다.”

능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말뜻을 다시 되새기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은 아니란 얘기.

하면 나중에는 섬서로 가겠단 의미가 아닌가.

“염병. 그땐 나 데리고 가지마쇼.”

“흑심방주 하기 싫어?”

“흑심방주고 나발이고, 혈사문 애들 살벌한 거 알잖소.”

“능허야.”

“네.”

“혈사문은 무섭고 난 안 무섭냐?”

“섬서까지 보필하겠습니다.”

“뭐, 그거야 나중 일이고. 우선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자고.”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 섬서로 가서 뒤집어엎고 싶은데 말이지.’

사실 천무백은 맨 처음 그런 마음을 먹었다.

하나 혈사문의 뒤엔 혈귀곡이란 단체가 있다.

괜히 혈사문을 완전히 쳤다간 그들이 꼭꼭 숨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더구나 지금은 급한 게 그게 아니지 않은가.

우선 소림으로 가서 표국 사람들을 구출하는 일.

그것이 먼저다.

하나 천무백이 허성을 먼저 보내고 갈라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첫째는 연화루와 흑심방의 정보망에 혈사문의 움직임이 잡혔다는 점이다.

이미 육성을 통해 하남의 혈사문 근거지가 어디인지 파악해 놨던 터.

하여 흑심방을 접수한 이후 혈사문을 감시했다.

그 결과 혈사문의 수상한 움직임이 잡혔다.

“그간 조용히 있던 애들이 대거 움직였단 말이지.”

“그렇죠. 봉구에 있던 놈들이 정주, 공의, 언사, 신밀, 등봉으로 다 퍼져나갔으니까.”

혈사문의 하남 근거지는 바로 봉구현이었다.

한데 혈사문의 무인들이 각각 다른 지역으로 급히 움직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이동한 곳이 모두 숭산으로 가는 길목에 선 도읍들이었다.

하면 뭐겠는가?

당하기 전엔 쳐야지.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는데.

멍청하니 당할 때까진 기다릴 순 없잖아?

“곧장 봉주로 가서 다 엎는다.”

놈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세력을 결집해 천무백을 쳐도 이길 가능성이 크지 않다.

한데 그들은 숫자를 찢어 놨다. 제 딴에는 천무백의 이동 경로에 숨어 있다가 습격할 속셈이었지만, 그거야 모르고 있을 때 효과가 있는 법이다.

아니, 그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상대를 잘못 재단하고 숫자를 나누면, 각개격파 당하기 마련이지.”

물론 저들이 단순히 숫자만 나눈 건 아니리라.

아마도 나름 비장의 수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건 모두 천무백이 일반적인 무인.

그러니까 육성과 구진해를 이길 만한 실력자라고 가정했을 때의 준비다.

‘조금은, 되찾았다.’

천무백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일전에 흑심방주와 부방주를 처리하면서 느꼈다.

서서히 예전의 무위에 가까워지고 있노라고.

물론 아직 한참 멀었다.

다만 미미했던 성장이 서서히 눈에 보였다.

처참했던 몸뚱이는 이젠 제법 틀이 잡혔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가 과거 허약하기 짝이 없던 천무백이라고 생각지도 못하리라.

아직 천무백의 눈에는 차지 못하지만, 근맥이 단단해지고 근질이 유연성 있게 변하면서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은 한층 예리해졌다.

매일같이 경천혼공을 운공하니 상단전에 쌓인 내공의 양도 이젠 쉽게 무시 못 할 양이다. 하물며 얼마 전 복용한 소환단도 거의 완벽하게 녹여 냈다.

‘어쩌면 운이지.’

사실 영약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건 어렵다.

대부분 영약의 5할은 흩어지고, 나머지 5할만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어도 최고로 효율을 뽑아냈다고 하지 않는가.

천무백은 8할 이상을 본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숱한 전생을 살면서 영약을 수없이 복용해 봤으니 그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었다. 거기에 경천혼공의 바다 같은 무한한 포용력은 외부의 내공을 흡수하는데 거리낌 없었다.

하니 지금의 천무백은…….

“혈사문을 하남성에서 지운다.”

그만한 자신감을 드러낼 만했다.

“어휴. 난 몸이 피곤해서. 싸움은 못 할 거 같은데.”

능허가 은근슬쩍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넌 빠져라, 라는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다. 그냥 툭 던져 본 말이다.

한데 천무백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래. 싸움은 내가 하마.”

“네?”

“대신 넌 다른 일 좀 해야겠다.”

순간 능허는 불길함을 느꼈다.

가장 위험한 게 싸움 아니겠는가.

강호에선 말이다.

한데 그걸 본인이 자처하고, 대신 시킬 일이 있다?

불길함이 쭈뼛 섰다.

“있는 대로 모든 걸 긁어모아.”

천무백이 혈사문을 먼저 노리는 이유였다.

첫째는 당하기 전에 먼저 치는 것.

둘째는 바로 증거 확보다.

지금 당장 소림으로 가도 사실 해명을 설득시킬 방도가 없다.

청성표국의 자작극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그에 반박하는 충분한 증거자료가 필요하다.

혈사문과 혈귀곡의 공작이란 증거.

그런 증거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비록 이번 일이 혈귀곡이 벌였고, 혈사문은 그저 칼에 불과했다고 하지만.

혈사문도 음흉한 집단이다.

분명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리라.

“놈들이 자료를 소각하고 튀기 전에, 내가 애들 상대하는 동안 그것들 다 모아.”

“바꿉시다. 우리 역할.”

“너 손 하나 못 쓰잖아. 마음 넓은 내가 대신 싸워줘야지.”

“그런 양반이 흑심방 때 온몸에 피 철철 흘러넘칠 때까지 앞에 세워 뒀나.”

천무백은 능허의 툴툴거림을 듣고도 가볍게 웃어넘겼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자료일수록 놈들은 인멸하려 노력하리라.

하면 그 사이로 뚫고 들어가려면, 아무리 천무백이 모든 시선을 끌어도 능허 역시 싸울 수밖에.

하나 뭐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흑심방주 그만두던가.”

“진짜 그만둡니다?”

“연화루주 자리도.”

“내가 이 빌어먹을 혈사문하고 왜 얽혀서 썅. 어휴.”

* * *

“이런 쓰레기 같은 식재료를 쓰라고?”

봉구현의 객잔을 운영하는 장 씨는 이를 악물었다.

객잔에 오랜만에 외지에서 온 손님이 있는데도, 그는 분기를 참지 못했다.

“우리 객잔이 아무리 고급객잔은 아니어도, 이딴 쓰레기를 식재료로 쓸 순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이 미친놈들이 언제 적부터 식재료 공급망까지 장악해서 지랄이야?”

장 씨는 주방장의 말에 가슴을 텅텅 쳤다.

여기 봉구에서 대를 이어 운영하는 객잔이다.

하여 나름 이 객잔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어디 높은 관원들이나 명문세가 사람들이나 중요한 인물을 받는 객잔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봉구현을 방문한 외지인들이 가장 먼저 찾는 꽤 괜찮은 객잔이다.

이게 바로 장 씨의 생각이었고 자부심이었다.

한데 그 자부심이 근래 무참하게 깨져 나가고 있었다.

“개같은 흑견 놈들!”

“쉿! 주인아저씨. 그런 말 막 하면 안 돼요!”

옆에서 눈칠 보던 점소이가 황망한 얼굴로 손가락을 코에 갖다 댔다.

그리곤 급하게 객잔을 살폈다.

다행히 봉구현에 역병이 퍼진단 소문 이후로 객잔에 손님은 뜸했다.

안에는 일행 하나가 있었다.

점소이는 그들을 조심스레 살폈다.

둘 다 옆에 칼을 찬 사람들이다.

칼을 찼다고 다 무림인은 아니지만, 사실상 구할 이상은 무림인이다.

어린 소년, 아니 청년으로 보이는 남자는 무척이나 잘생겼다.

점소이는 봉구현에서 저 정도로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작은 동네니까 소문이 진작 났을 법한 외모다. 아마 외지인이리라. 옆에 칼을 차긴 했으나,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 덕분인지 그가 험한 강호의 무림인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화려한 칼 장식을 보아하니…….

‘어디 부잣집 도련님인가?’

한데 호위로 보이는 남자가 좀 그렇다.

눈 하나 없는 애꾸눈이지만, 그 애꾸눈에 담긴 불만은 마치 세상의 모든 불만이란 불만은 다 담은듯했다. 험악한 인상은 둘째 치고 오른손마저 없는 걸 보면 길거리에서 마주칠까 두려운 외모였다.

‘저긴 그 흑견들 중 하나처럼 생겼는데.’

허봉과 장 씨들이 흑견이라고 부르는 놈들은 바로 이 근방을 꽉 잡은 흑랑단이란 흑도방파였다.

사실 장사하는데 흑도가 꼬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진 별일 없었다.

언제부터였던가. 섬서에서 역병이 퍼지고 있단 소문이 들릴 무렵에, 기존 흑랑단의 우두머리들이 싹 갈려 나갔단 소문이 퍼졌다.

그 이후로 흑랑단은 변했다.

“어디 우리 객잔뿐이야? 기루에 술도 흑견놈들이 공급해, 약방의 약도 걔들이 공급해. 식당이란 식당의 식재료들은 다 지들이 공급해.”

“아니 공급이라 그렇다 칩시다. 공급선까지 장악하는 흑도놈들은 내 처음 보지만, 아 그럴 수 있다 쳐요. 근데 어디서 개쓰레기 같은 저질 재료를 들이대면서 돈은 더 받습니까?”

“이러면 장사 다 망합니다!”

“안 그래도 손님 없는데!”

와중에 봉구현에도 역병 환자가 생겨나고 있으니 그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다.

“흑랑? 지랄. 흑견 새끼들. 쓰레기통에 주둥이나 쳐박는 놈들이 무슨 강호의 협객을 자처해?”

“어이. 장씨!”

그때였다.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에 장 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비단 장 씨뿐만이 아니다. 주방장도, 어린 점소이도.

모두 안색이 죽었다.

장 씨는 객잔으로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를 보며 식은땀을 흘렀다.

“어, 정 대협 오셨습니까.”

덩치가 우람하다 못해 산만한 체격의 사내가 씩 웃었다.

“정 대협이라니. 어디 개새끼한테 대협이란 칭호를 붙이고 그래? 장 씨?”

장 씨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모습에 정 대협이라고 불렀던 사내, 정주는 씩 웃었다.

고작 흑랑단의 중간 간부였던 그는 지금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이 됐다.

‘하여간. 그 음침한 놈들 덕택에 말이지.’

어느 순간 중간 간부들 위의 우두머리들을 슥삭 처리한 음흉한 놈들.

그놈들은 단지 흑랑단을 접수하고 딱 하나만 요구했다. 주변 상가의 공급망을 장악하라는 것.

사실 흑도가 식재료 공급망 같은 거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보호비 명목으로 돈만 뜯어내는 게 더 효율이 높으니까.

한데 정주는 여기서 기회를 엿봤다.

새로운 우두머리들은 흑랑단의 운영에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정주는 자신이 직접 공급망을 장악했고, 저질의 식재료와 약을 공급하면서 또 가격도 올렸다.

거기서 얻는 차익은 다 고스란히 정주의 주머니에 들어갔고, 그 돈으로 밑에 애들에게 술을 퍼먹이고 여자를 안겨 주니 그는 중간 간부에서 단숨에 높은 자리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응? 장 씨. 우리가 어! 이렇게 보호도 해 주는데 말이야.”

꽝!

정주의 주먹질에 탁자 하나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우리는 말이야. 협객이라고 협객! 어? 그런데 뭐? 흑견? 흑겨어어언?”

“아이고오! 정 대협! 이 노인네가 그만 망언을 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정주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이전에도 흑도로서 거칠 게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행패를 부리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꽈앙!

정주는 눈앞에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부쉈다.

돈도 쌓았겠다, 그 돈으로 영약까지 사 먹었으니 그는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

“응? 우린 협객이란 이 말이야. 그런 협객들을 대접하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그런 개소리를……!”

“협객 다 뒈졌나.”

“…….”

순간 정주는 눈을 끔뻑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미처 신경도 쓰지 못했던 객잔의 탁자였다.

정주는 빤히 쳐다보는 청년의 얼굴을 보고 두 가지 생각을 했다.

‘거 참 잘생긴 놈이네. 근데 재수가 없어.’

더구나 황당한 건, 그저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이는 놈이 한마디 했다는 거다.

“능허야, 네가 보기엔 저게 흑도의 협객이냐?”

“어휴. 흑도에 협객이 어딨습니까. 다 똑같은 개새끼들이죠.”

“너도?”

“전 그나마 말 잘 듣는 개새끼로 해 주십쇼.”

“개 인건 잘 아네.”

“니런 썅.”

정주는 갑자기 저들끼리 대화하는 놈들을 보며 말을 잃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건, 자신들을 가리켜 개새끼 운운한 것이다.

그것도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정주의 눈이 벌게졌다.

“어이, 너 애송아. 지금 넌 내가 누구인지 알고 감히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넌 누구냐? 어?”

정주가 당장이라도 칼을 쓸 것 같이 살기 범벅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 얘기에 천무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협객이다,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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