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2화>
32. 강호 선배로서 말해 주마
“안 돼.”
“하면 누가 갑니까?”
“부국주인 내가 가야지!”
“그러면 표국은 누가 지킵니까?”
“네가 지키고, 내가 가는 게 맞아.”
“누님.”
“무백아!”
천무백은 뚫어져라. 천유하를 바라봤다.
요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함이 가득 내려앉은 천유하의 얼굴은 전과 달리 많이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아버지가 구금당했는데.’
비단 아버지뿐이랴.
표사들 절반이 구금당했다. 당장 소식을 전해들은 표사의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와 대성통곡을 하지 않았는가.
그건 한 사람이 감당해 내긴 어려운 압박감이다.
한데도 천유하는 이겨 냈다.
천문경이 구금당했단 소식을 전해 듣고, 딱 하루 앓아누운 게 전부였다.
그녀는 다음 날 일어나 바로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그 모습에서 천무백은 천유하의 강렬한 의지를 느꼈다.
만일 그녀가 계속 청성표국을 지켜 준다면야, 천무백의 의도대로 될 게 분명했다.
‘언제든 돌아와서 쉴 수 있는 곳.’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면 된다.
지금은 천무백이 표국을 위해 움직일 때였다.
“저는 표국 업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소림으로 가 구금당한 아버지와 표사들을 구하는 건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누님, 각자 가진 바 재능이 있고 재주가 있기 마련입니다. 누님은 표국을 운영하는 천부적인 재주가 있지만, 저는 다른 재주가 있죠. 지금처럼요.”
“……?”
천유하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이내 그녀는 이해하고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천무백의 입가에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
그 미소를 보자 걱정과 고통으로 달아오르던 가슴이 빠르게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묘했다.
저 미소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마음까지 뺏었지만, 지금은 좀 더 달랐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기운.
그런 기운이 주위를 감싼 느낌이었다.
물론 천유하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를 수밖에 없다.
‘소림의 내공은 마(魔) 앞에선 용처럼 날뛰나, 선한 사람들에겐 한없이 편안하지.’
비록 소림의 내공은 아니지만, 그 방향성이 틀린 게 아니다.
천무백의 경천혼공은 기본적으로 도가와 불가의 내공을 바탕으로 했다. 거기에 흑심방에서 소환단을 복용했으니 그런 기운이 한층 더 강해졌다.
“확실히…… 초면부터 널 윽박지를 사람은 없겠구나.”
천유하는 다소 힘 빠진 목소리로 고갤 끄덕였다.
어쨌건 이건 가서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일이다.
상대는 소림이니 강호가 치를 떨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천무백은 물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항마의 기운이 더 강해졌으니, 마인이 보면 치를 떨면서 칼을 들고 덤비겠지만 말이지.’
그리고 이번 강호행에 있어 마인을 만날지도 모른다.
적어도 혈사문의 흡정마공은 마공이고, 그 뒤에 있는 혈귀곡도 천마신교의 한 갈래거나 아니면 새로운 마인들로 추정된다.
그러니 이번 일은 단순히 소림에게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도 단순한 것도 아니지만.’
그 소림이 구금했다.
공명정대하고, 아직도 강호인들에겐 40년 전 꼿꼿이 서서 정마대전의 최선두에 있던 소림으로 기억에 남았다.
그런 소림이 구금했을 정도이니 확실히 의심할 만한 증거가 있으리라. 그러니 해명이 쉬운 일도 아니다.
다만.
‘소림이라…….’
천무백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림 방장보다 소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천무백의 눈이 반짝였다.
* * *
능허가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었다.
“거 이해가 하나도 안 되는데.”
“뭐가.”
“주군이 가는 거야 당연한 일이죠. 암. 그렇고 말고요. 근데 나는 왜 가?”
“능허야, 너 묘하게 반말이랑 존댓말 잘 섞는다.”
“주군, 장유유서란 게 있는데.”
“어린놈이 말이 많구나. 혓바닥이 짧은 것 같으니 아예 뽑아 주랴?”
“그러니 주군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
주위에 있던 청월단 소속 표사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모두 능허가 어떤 자인지 안다.
시간이 날 때 가끔 연화루에 방문했던 적이 있는 표사들이 아닌가.
연화루의 전 총관이자, 현재 연화루주.
이전에는 흑심방 소속의 악랄한 흑도였다더라. 정도는 알고 있다.
인상도 아주 험악해서 굳이 친해지고 싶은 상대도 아니다.
‘도련님이 연화루를 통째로 들고 왔다더니.’
‘그 소문이 정말 진실이었나보군.’
‘어떻게 저 능허 놈을 구워삶았지?’
‘구워삶은 정도가 아니야. 주군이라고 하는 거 봤어?’
솔직히 능허가 툴툴대긴 했지만, 천무백이 눈 한번 부라리자 비 맞은 똥개처럼 꼬릴 마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너희들, 준비는 맞췄나?”
그때 허성이 다가와 말했다. 허성의 말에 표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쟁자수는 없다.
이건 표행이 아니니까.
표사들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준비를 완료했다.
“숭산으로 간다. 우리의 임무는 도련님을 보좌하며 안전을 지키는 것. 우리가 평소 하는 일을, 좀 더 집중해서 한다고 생각해라.”
“알겠습니다.”
허성을 비롯한 청월단 표사 네 명.
표사 다섯에 천무백, 그리고 능허까지.
“준비됐어? 허 표사?”
“네.”
“가자고. 시간이 많지가 않아.”
* * *
“천무백이 능허와 함께 원양현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천무백의 마차가 표국을 나와 원양현을 벗어날 무렵.
인근 야산에 있던 척은 수하의 보고에 입술을 깨물었다.
“육 장로님하고 스승님이 당했다. 허성이란 그 표사 놈이 아니야. 천무백, 그놈이다.”
“정말……그 녀석이 맞을까요? 멀리서 지켜본 게 전부지만, 내력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냥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척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혈사문의 삼장로 육성과 스승님인 구진해가 당했다.
처음엔 허성이라 의심했지만, 사실 그것도 확실치 않았다.
허성은 최근 분명 더 강해져 보였지만, 전에는 절대로 육성과 구진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아니, 강호니까 무슨 변수가 생겨서 이길 수는 있다. 그래도 저토록 상처 하나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또 육성과 구진해가 죽었는데 소리 소문도 없이 은폐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은 완벽하게 죽여 버렸단 얘기다.
허성의 능력으론 불가다.
그런 의심의 시선으로 지켜보던 척의 눈에 들어온 건 바로 천무백이었다.
“스승님과 육 장로님이 죽은 곳이 연화루였고, 천무백이 연화루와 연관된 시점부터 능허가 총관이 됐다.”
“…….”
“그리고 최근엔 흑심방에 태룡방의 귀검사랑이 능허와 나타나 흑심방주와 부방주를 죽이고 능허를 방주로 삼았다고 했다. 하지만,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귀검사랑은 제자를 두지 않고 죽었어. 그러면 귀검사랑이 누굴까? 아주 젊어 보이는 청년, 소년이라고 했는데?”
“……천무백이란 말입니까?”
“그래. 그는 내력을 숨기고 있는 것뿐. 아마 육 장로님과 스승님을 죽인 건 그놈이다.”
척의 분석에 수하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한량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척은 확신했다. 정황이 그러했다. 능허가 흑심방주에 오르기까지. 천무백의 행적이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죽인다.”
육성과 구진해도 당한 마당이니 척이 천무백을 어찌할 수는 없다.
기껏해야 능허나 죽일 정도이리라.
“하지만 강 위에서라면 다르지. 어리석은. 물에 빠지면 절대고수도 한낱 수적 따위의 작살에 가슴이 뚫릴 법이거늘.”
척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준비됐느냐?”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척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따스한 햇살이건만.
왠지 모르게 그의 기분은 영 어두웠다.
그때였다. 한참 전부터 천무백을 감시하던 수하가 황망한 얼굴로 달려왔다.
“일행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뭐?”
“두 패거리로 갈라져 한 패거리는 그대로 숭산으로 직행하고, 나머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척의 미간이 좁혔다.
이번 일은 정해진 계획대로 이뤄져야 한다.
변수는 용납할 수 없다.
“천무백이 소림으로 갔나?”
“아닙니다. 허성이라 표사와 휘하 표사들이 소림으로 향했고, 천무백은 능허와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습니다.”
“목적지는?”
“아직 어디로 가는지 확인이 불가합니다.”
“……허성 놈들은 버리고 천무백을 추적한다.”
“예!”
척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하늘에 태양은 찬란하게 떴건만, 그의 마음은 먹구름이라도 드리워진 것처럼 어두웠다.
* * *
표사들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청성표국이 있는 원양현을 벗어난 순간부터 그들의 긴장도는 높이 올랐다.
최근 역병이 퍼지고 있단 소문에 유랑민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노리는 산적이나 수적들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천무백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마치 근처 명승지로 유람을 나가는 사람처럼 가벼운 기색이었다.
그 모습에 표사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이전의 천무백이 세상사 관심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이긴 했다.
하나 그런 도련님이 국주와 표사들을 구하겠다고 직접 소림에 가겠다 자처했을 때 얼마나 놀랍고, 감격했던가.
이번 일에 참여하게 된 표사 셋은 모두 허성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많았다.
모두 천무백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할 때부터 봐 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천무백이 최근에 무공을 익히고, 연화루까지 떡하니 들고 오니 얼마나 놀랐던가. 거기에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직접 나서는 모습에 걱정하면서도 은근히 속으로 감탄을 금치 않았다.
한데 지금의 표정을 보니 약간의 불길함이 피어올랐다.
‘설마 이걸 단순히 유람이라도 생각하는 건 아니지?’
‘소림에 가서 말 몇 마디면 일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듣기론 군담패설을 즐겨 읽는다 했는데……. 이건 단순히 패설이 아닌데 말이야.’
표사들 사이에서 그런 우려가 충분히 생길 만했다.
천무백이 바뀐 모습을 보여 줬다지만, 표사들에겐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오히려 무공을 익힌 게 더 독이 되지 않았을까.
허성이 옛날에 군담패설을 몇 개 사 줬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표사들 사이에선 혹여 군담소설을 보고 저도 대단한 무림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일종의 호승심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겠는가.
하물며 소림이다. 그런 소림에 가는 일이니 일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고 가는 거라면?
하나 다행인 건 허성이 천무백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여기에 능허가 왜 끼어든 것인지 알 길은 없다만, 장노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허성이 함께하니 위기의 순간에서 몸을 빼낼 수는 있으리라.
한데 표사들의 우려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드러났다.
“여기서 갈라진다.”
“네?”
표국을 출발해 원양현을 빠져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천무백이 말을 멈춰 세우곤 선언했다.
갈라지다니.
왜 여기서 나뉜단 말인가?
“허 표사, 잘 부탁해.”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명을 완수하겠습니다.”
“아니, 굳이 죽을 필요까진 없고. 허 표사. 강한 놈에게 죽을힘을 다해 도전하는 게 강호의 낭만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거 개죽음이야. 알겠어?”
“……알겠습니다.”
허성은 감명받은 표정으로 휘하 표사 셋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 곧장 소림으로 간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애당초 목적지가 소림이니까.
하나 표사들은 말에 담긴 속뜻을 깨닫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도련님은 어디로 가신다는 얘기입니까?”
“자세한 것은 가면서 얘기해 주겠다.”
허성은 담담하게 말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게서 순간 흘러나오는 압박감에 표사들은 더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허성은 나머지 표사들을 홀로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 있었으니까.
그 사이 천무백은 능허와 함께 말머리를 틀었다.
“아니, 소림으로 안 가고 어딜 갑니까?”
“소림으로 간다.”
“지금 이쪽은 숭산 방향이 아닌데? 거참. 지도 볼 줄 모르면 거 조용히 있지.”
“허 표사가 먼저 가고 우린 뭐 하나 처리하고 간다.”
“뭐요?”
능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천무백은 달리던 말을 천천히 늦췄다.
그리고 능허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강호 선배로서 말해 주마.”
“뭐라고요?”
천무백은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려도, 괘념치 않았다.
“날 노리는 적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상댈 보고 생각해야지. 나보다 강하면 뭣 빠지게 도망쳐야지.”
“나보다 약하면?”
“에이, 약한 놈이 왜 날 노려.”
“강호에선 무공의 고하를 떠나 언제든 무공을 익히지 않은 한낱 범부에게도 죽을 수 있다는 고언을 몰라? 너 흑심방주 계속할래?”
“불초 후학이 강호 선배의 고견에 세이경청하겠나이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이놈 버릇 한번 언제고 고쳐 줘야겠는데.
뭐, 지금 버릇 고쳐 줘야 할 건 능허가 아니지.
“약한 놈이 상대의 강함을 모를 때, 아니, 조금 애매하게 알고 있을 때. 그러면 떼거리로 몰려가지 않겠느냐.”
능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흑도들의 방식이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강하면 건들지 않는다.
한데 상대가 조금 애매하게 강해 보인다?
그러면 있는 머릿수로 단번에 덮친다.
흑도의 방식이라지만, 사실 흑도나 강호나 별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그제야 능허는 순간 머릿속이 번쩍하고 울렸다.
얼마 전, 연화루를 통해 얻은 몇 가지 정보.
“설마……?”
“상대가 누군지도 아는데. 심지어 이젠 어디 있는지도 대충 짐작 가는데.”
천무백의 미소가 진해졌다.
“당하기 전에 먼저 쳐 부숴야 하지 않겠느냐?”
능허의 몸이 살짝 떨렸다.
지금.
“혈사문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