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1화>
31. 천무백, 강호출도
“제가 방주, 능허 놈이 부방주입니다.”
“뭐 이 곰탱이 새끼야? 누가 누구 때문에 살았는데?”
천무백은 팔짱을 끼며 눈앞의 거구를 바라봤다.
능허가 살려야 한다고 했던 화웅이란 놈이었다.
“흑심방의 가장 강력한 무력대인 철호대의 대장입니다.”
“이름은 거창하군.”
천무백이 가당치 않다는 듯이 웃었지만, 속으로는 제법 놀랐다.
‘강개 따위보단 강하군. 흑심방주 바로 밑 정도.’
화웅이란 자는 말 그대로 곰 같은 체구에 흑도치고는 순박한 인상이었다.
하나 굳게 닫힌 입과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는 무척이나 진중한 성격임을 보여 준다.
실제로 간부들과의 싸움 때 화웅은 중립을 지켰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주시했을 뿐이다.
“초면인 너를 왜 내가 방주로 세워야 하지?”
나름 흥미가 생긴 천무백이 물었다.
화웅은 잠깐의 기다림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제가 더 강합니다.”
“흑도 우두머리가 무조건 강하다고 하는 건 아니지. 교활한 면도 있어야 하잖아?”
“아, 말씀 잘하셨네. 교활한 거로 따지자면 이 능허가 둘째가라면 서럽지. ……음. 뭔가 좀 이상한데?”
“권위가 살지 않습니다.”
“권위?”
“흑심방 애들 모두 능허가 귀검사랑의 수하로 온 걸 두 눈으로 봤습니다. 능허 놈이 제힘으로 차지한 게 아니라, 외부 세력을 끌어와 차지한 것입니다. 아무리 흑심방이 겉만 화려하고 속은 영 아니어도, 적어도 제 철호대는 능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허? 얌마. 누가 인정 안 해? 철호대 다 데리고 와! 한판 붙자!”
“정말로?”
“……나 좌수 검법 하나만 좀 제대로 익히고 하자.”
천무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곰곰이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화웅은 천무백의 시선에 압박을 느낄 만한데도, 기죽지 않고 쳐다봤다.
“만일 그것이 어렵다면, 직접 대협께서 방주자리에 오르십시오. 흑심방주를 단칼에 베고, 강개를 가볍게 죽였으니까요.”
그러나 천무백은 본인이 방주 자리에 오를 생각도, 능허를 부방주로 만들 생각은 없다.
몇 번 전생을 살아보니 알겠더라.
‘완장 차는 게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거든.’
해야만 하는 일이 많다. 물론 얻을 것도 많다. 권력에서 주는 것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하지만 그럴 바엔 차라리 완장을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게 낫다.
“거절한다. 능허는 방주고, 네가 부방주다.”
“알겠습니다.”
“수긍이 깔끔하군”
“저는 그저 의견을 개진할 뿐입니다. 시킨다면, 따릅니다.”
솔직히 말해 그때쯤, 천무백은 능허에서 화웅으로 갈아탈까 생각했다. 그만큼 화웅의 언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능허는 눈치가 빨랐다.
“주군! 일전에 맹세했듯 제 목숨을 다해 흑심방을 지키고 운영하며 주군을 위해 살겠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결연한 말을 쏟아 낸 능허를 보던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흑심방 간부는 전원 정리됐다.
유일하게 남은 화웅이 동의했으니 능허가 이제부터 흑심방주다.
일개 연화루의 총관에서 루주, 그리고 흑심방주까지.
능허는 그런 본인이 자랑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좀 위험하긴 하지만 이 양반 따라다니면 뭔가 술술 풀리는데?’
그런 생각을 굳힌 건 천무백의 다음 행동이다.
“능허야, 허 표사. 이것들 복용해.”
천무백이 건넨 건 두 개의 환이었다.
목함을 열자마자 풍기는 고아한 냄새에 능허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흑심방주의 금고에 있다는 청심단이 틀림없다.
“주, 주군!”
“너는 흑심방주니 적당히 힘 좀 써야 하고. 허 표사, 그쪽은 표국을 지켜야 하니 지금으론 부족해. 적어도 장 총표두급은 되어야 한다고. 먹고 수련 좀 하라고.”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능허와 허성은 감격에 몸을 잘게 떨었다.
아무리 흔한 영약도 귀하게 취급받는 게 강호다.
청심단은 엄청난 희귀품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력 한 단계는 쉽게 상승시켜 줄 영약이 틀림없다.
그걸 아낌없이 내주다니!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주군!”
허성과 능허가 동시에 부복했다.
* * *
“청심단 따위야.”
천무백은 흑심방주의 금고에서 금박으로 장식된 상자를 꺼냈다.
사실 청심단은 제법 훌륭한 영약이지만 자신이 아닌 능허과 허성에게 더 유효했다.
내력의 순도를 따지면 천무백이 압도적이지만, 아직 그 총량은 허성과 능허가 더 많았다. 하면 청심단의 모든 약기를 흡수할 수 있으리라.
‘오히려 청심단의 순도가 경천혼공의 내력보다 정순도가 현저히 낮다.’
그러니까 청심단을 천무백이 복용하면 오히려 해가 된다.
깨끗하고 정순한 천무백의 내력에 오히려 더 질이 떨어지는 기운이 합쳐지는 것이니.
그럴 바엔 둘에게 주는 게 낫다. 천무백은 여러 번 최강자 자리에 오르면서, 휘하에도 제법 많은 수하를 거느렸던 적이 많진 않지만, 꽤 있다.
수하들에게 충성을 끌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도 물질적인 건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무인에게는 영약만큼 최고의 효과를 내는 건 없다.
하니 쓸모없는 청심단은 모두 넘겼다.
대신에.
“소환단이라. 어마어마한 걸 숨겨 놨었구나.”
천무백이 상자에서 환단을 꺼냈다.
그 생김새와 향기를 어찌 모르겠는가.
소림사의 최고 영약인 대환단 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전 강호를 통틀어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영약이었으니까.
“소림이 옛날의 세를 잃긴 했어도 소환단을 구하다니. 하긴. 정마대전 때 가장 최전선에서 싸우다 무너져 무공과 영약들이 모두 빼돌려졌으니까.”
소림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천무백 본인에게는 이로운 일이다.
소환단에 담긴 내공의 정순도는 최고다. 하물며 항마의 기운이 가득한 소림의 영약이 아니던가.
정순도만큼은 최고지만, 아직은 적은 총량의 내력을 지닌 천무백이었기에 소환단은 아주 큰 선물임이 틀림없었다.
“역시,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니까.”
본래 흑심방주가 들었다면 지옥에서 경을 칠 얘기를 하곤, 소환단을 그대로 삼켰다.
* * *
천무백은 오랜만에 난처한 기분이었다.
‘누님을 설득하는 게 가장 난제라고 여겼는데.’
험악한 산은 따로 있었다.
천무백은 눈앞에 불퉁한 얼굴의 점박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점박아.”
“네, 도련님.”
“입술이 아주 댓발로 나왔다, 야.”
“저 원래 입이 좀 튀어나온 편입니다요.”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아이고, 도련님. 왜 도련님이 가시려고 하는 겁니까?”
“소림이다. 공명정대한 소림으로 가는 일이니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천무백의 말에 점박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때렸다.
“지금 소림은 우리 표국을 의심해서 국주님하고 휘하 표사들까지 싹 다 구금한 상태 아닙니까요!”
“그래. 죽이진 않았잖아?”
“아이고오!”
천무백이 태연스레 말하자 점박이는 거의 울다시피 곡소리를 냈다. 천무백은 머쓱한 얼굴로 곁에 있던 허성을 바라봤다.
“지금 소림 가는 게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
“예. 위험합니다. 지금 소림은 표행 실패를 우리 표국의 자작극으로 의심해서 국주님과 그 이하 표사들을 전원 구금한 상태입니다. 그 유명한 소림이 구금까지 할 정도라면, 우릴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단 얘기고 사라진 표물이 정말로 소림에게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내가 가도?”
“…….”
순간 허성은 말을 잃었다.
흑심방에서 보여 준 무시무시한 무력을 떠올리면 절로 소름이 돋았다.
한데 지금은 더했다.
목소리를 높인 것도, 표정을 찡그린 것도 아니다.
그저 편안한 표정에 부드러운 목소리다.
‘빨려 들어가는 것 같군.’
자신과 능허도 청심단을 먹고 엄청난 공력증진을 얻었다.
당장 그 휘하에 있는 표사들도 허성을 대하기 어려워한다. 가끔 가진 실력이 대단해 늘 자신만만하던 종 표사도 자신의 늘어난 공력을 느끼곤 감탄하지 않았던가.
천무백은 더했다.
겉에서 느껴지는 내력은 아직도 단 조금도 없었다.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격렬했고,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단지 눈빛 하나만으로 주위 사람에게 갖가지 감정을 느끼게 하다니.
흑심방을 접수한 이후 천무백은 무언가 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 높아진 느낌이었다.
“물론 주군께서 가시면 일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결백을 주장해야 하는 일이고,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게 알아차렸단 말이지.’
백색마안으로 육성의 금제를 풀어 버리고 얻어 낸 정보.
혈사문, 정확히는 그 뒤에 있는 혈귀곡에 있는 이들과 관련된 정보였다.
하나 확실치는 않았다.
‘일을 꾸민 건 혈귀곡 놈들이 맞는데…… 혈사문은 그저 그 일에 잠깐 이용한 거고.’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청성표국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천무백이 열병을 앓기 전.
그러니까 천무백이 전생을 깨닫기 전이였다.
소림의 속가문파인 송진문에서 표국에 표행 의뢰를 했다. 아직 봉문중인 소림사로.
꽤 중요한 표물이었던지, 송진문은 자기네 무인들을 표행에 동참시켰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습격을 당했다. 송진문의 무인들은 모조리 죽고 표물은 강탈당했다. 문제는 청성표국의 표사들만 살아남은 것이다.
당연히 송진문은 청성표국의 자작극을 의심했다. 청성표국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누가 봐도 우리에게 덮어씌운 겁니다!”
“그렇지.”
일부러 청성표국을 노리고?
천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청성표국은 하남에서 제법 규모가 있고, 신뢰를 충분히 쌓은 꽤 괜찮은 표국이기 하다만, 어디 엄청난 원한을 사서 없는 죄를 뒤집어 없앨 만한 곳은 아니다.
‘그냥 희생양이지.’
누가 봐도 청성표국이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송진문 무인만 다 죽고 청성표국 표사들은 살아남았으니.
‘문제는 그 표물이지.’
여기서 바로 혈귀곡이 나온다.
육성을 파헤친 결과. 혈귀곡이 표물을 강탈했고, 그일에 혈사문을 이용했다는 점이 나온다.
육성도 표물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혈귀곡에서 감췄으니까.
이례적으로 봉문한 소림사가 모습을 드러낸 만큼 중요한 표물이리라.
명문정파의 거두로서 체면이 있는데도, 조사하러 간 천문경과 표사들을 구금했으니까.
‘시간이 흐르면 결백은 밝혀지리라.’
천무백이 아는 소림은 여전히 소림이다.
태동하던 시기부터 수백 년간.
매 전생에서 쇠락과 흥성을 거듭했어도, 가끔은 교만했더라도 결국 근원은 바뀌지 않았다.
소림은 소림이다.
그들은 결국 청성표국의 결백을 찾아낼 것이다.
문제는 그 시기 동안 진짜 범인인 혈귀곡은 빠져나가리라는 점이다.
결국, 천무백은 기다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세상사 어디 그리 쉬운가.
“모든 표행의뢰가 끊겼습니다. 그간 정기적으로 경비를 맡았던 황가장과 이가장도 다른 표국에 경비업무를 맡기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바로 신뢰다.
문주가 다름 아닌 소림에게 구금당했다.
청성표국의 신용도가 어디로 가겠는가.
천무백이 연화루를 손에 넣지 않았다면, 표국의 자금줄은 벌써 메마르고도 남았으리라.
추후에 결백이 밝혀서 천문경과 표사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표국은 간판을 유지하기도 어려우리라.
‘참으로 한번 들어가면 계속 수렁에 빠지는구나.’
늘 그랬다.
강호란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었고, 들어갈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천무백은 매번 전생에서 강호의 삶을 멈추지 않았다.
강호의 풍파에 몸을 던져야 칼이 녹슬지 않는다.
그러니, 가야 했다.
천무백이 연화루를 접수하고, 흑심방을 울타리로 삼으려는 행위는 결국 천무백이 어떤 고난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기반인 청성표국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던가.
검극을 향해 가는 길은 외롭다. 지극히 고독하다. 거기서 올 고난과 고독함은 숱한 삶을 살아온 천무백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꾸준히 전진하다가, 도저히 힘이 부족해 쉬고 싶을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청성표국은 꼿꼿이 서 있어야 했다.
“내가 간다. 소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