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8화>
28. 똥개가 그래 봤자 똥개지
사람이란 참 신기한 존재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대화가 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천무백은 능허의 가자미눈을 바라봤다. 마치 글씨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 양반이 미쳤나.”
“헉!”
“맞췄지?”
“혹시 사람 속마음을 읽는 무공까지 익혔습니까?”
“너 저번에 암천검제 같은 첩자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때려치워라. 표정으로 다 보인다.”
천무백의 말에 능허는 머쓱한 듯 턱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좀 어처구니없잖습니까.”
“왜?”
“그냥 하나씩 안전하게 처리하면 되죠. 왜 굳이 일대 다수의 싸움을 거십니까?”
능허의 말에 허성이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숫적 우위를 적에게 내준다는 건 너무한 일이 아닌가.
허성이 굳이 말을 안 해도 제 뜻에 공감하는 분위기를 읽은 능허가 좀 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흑도지만, 흑심방애들 독한 놈들입니다. 정말 독해요. 이 자식들.”
“그럼 흑도 애들이 나 순해요. 이렇게 말하냐? 다 독하다고 하지.”
“아니, 막말로 똥개도 자기네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 있잖습니까. 주군이 대단한 거야 잘 알죠. 응? 근데 똥개한테 물리면, 그것도 미친 똥개들한테 물리면 약도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흑도의 무서운 점은 많다. 하나는 개방과 하오문이 서러울 정도로 많은 숫자다.
“흑심방 간부회가 열리면, 각 간부 밑에 있는 애들 다 모입니다.”
“알 만하네. 건달 놈들이 숫자로 위세 부리는 거 어디 한두 번인가.”
“그렇게 모인 숫자만 일천이 넘습니다. 그걸 다 한꺼번에 처리하겠다고요?”
이번 일은 능허로서도 중요한 일이다.
강 너머 불구경하듯 여길 수 없다.
하지만 천무백은 그저 귀찮다는 듯이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전혀 설득이 먹히지 않는 분위기였다. 능허는 조금 다급해졌다.
‘이 양반, 진짜로 하려하네?’
혼자 하는 건 상관없지.
어? 근데 나도 같이 가야 하잖아?
“좋아요. 윗대가리들 다 모인 데에서 한 번에 처리한다 칩시다. 근데 거기까진 어떻게 갑니까?”
그 물음에 천무백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됐다! 반응이 왔다!’
나름 예리한 지적이었는지 천무백에게 반응이 왔다.
“윗대가리들만 갈아엎는 게, 흑심방을 접수하기 위해서잖습니까? 어? 근데 거기까지 뚫고 가겠다고 막아서는 애들 다 죽이면, 그냥 뭐 흑심방을 아예 없애 버리겠다는 거 아닙니까?”
거기까지 말한 능허는 입을 다물고 천무백의 표정을 살폈다.
‘시발. 존나 후달리네.’
솔직히 말해 천무백이라면 능히 그럴 만한 실력자다.
‘모르겠다. 도대체 얼마나 쎈 건지.’
완세검을 단번에 처리한 걸 보면, 적어도 그보다는 우위란 얘기다.
최소한이다.
사실 능허는 미쳐 버린 완세검을 처리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차라리 고강한 무공으로 목이 잘렸으면 괜찮다.
한데 완세검의 상태는 끔찍했다. 단전이 완전히 파괴됐다. 제법 온갖 꼴을 다 봐 왔다고 생각하던 능허도 몸서리칠 정도로, 단전이 파괴되다 못해 아주 갈가리 찢겼다.
하물며 거기에 사람을 미치게 만들다니.
도저히 천무백의 무위가 짐작되지 않는다.
‘내가 본 흑심방주는 완세검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강한 작자였으니까.’
하며 천무백이 흑심방주를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리라.
물론 무공의 고하가 단지 내력의 수준만으로 가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호사가들이 누가 누구보다 강하다고 떠드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알려진 무위에 따라 대략적인 수준을 가늠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붙어보지 않은 이상 누가 더 강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게 강호다.
주어진 환경, 분위기, 그날의 몸 상태…… 변수는 수없이 많다.
‘이 양반이 완세검보단 강한 건 확실한데, 그래도 정말 그 인의 벽을 뚫고 회의장까지 간다면……?’
솔직히 모르겠다.
어디 숫자가 한 둘인가.
간부회가 열리면 간부들은 서로 신경전을 펼치기 위해 아랫놈들 다 데리고 와서 위세를 부린다. 흑심방주는 그걸 알면서도 오히려 더 권했다.
그렇게 간부회가 열리면 개봉이 꽁꽁 얼어붙으니까.
흑심방의 위세를 알리기에도 적합하지 않은가.
능허도 몇 번 간부회에 참가해 봤으니 잘 알았다. 그 수많은 인간의 벽.
하나같이 제 몸을 날려 독기 처절하게 뿌리며 버티는 놈들이다. 그런 벽을 뚫고 끝까지 간다?
한데…….
‘가능할 거 같다.’
천무백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오는 믿음인지 몰라도, 천무백이라면 가능해 보였다.
“흠. 확실히, 그건 그렇지.”
천무백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능허는 손을 번쩍 들어 환호를 터뜨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설득이 통했다.
아니,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천무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능허를 바라봤다.
“능허야.”
“네.”
“태룡방하고 흑심방을 비교하면 어때?”
갑자기 태룡방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능허는 미간을 좁혔다.
흑심방도 분명 커다란 흑도문이다.
솔직히 말해 하나의 성읍을 거의 통일한 흑도가 어디 있던가.
한데 태룡방에 비견할 바는 아니다.
태룡방은 말 그대로 강호의 흑도제일문이다.
정도하면 구파일방이요, 마도하면 천마신교고, 흑도하면 태룡방이다.
그러니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비교도 안 됩니다.”
“그렇지? 그러면 흑심방이 태룡방에게 상납도 하냐?”
“……네.”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낀 능허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태룡방은 흑도제일문을 자처하며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정파로부터 다른 흑도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굳이 따지면, 세상 모든 흑도가 태룡방 아래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야 태룡방이 일단 대가리죠. 실제로도 그만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요.”
“그래. 똥개도 지들 주인한테 짖지는 않지.”
“네?”
순간 능허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천무백이 말하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천무백이 뚱한 얼굴로 능허를 바라보며 말했다.
“똥개가 아무리 독해 봤자 똥개지.”
천무백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 * *
개봉이 떠들썩했다.
대낮부터 윤락가의 기루들은 홍등을 올렸다. 주점들은 모두 문을 열었다.
일견 보기에는 역병이 서서히 퍼지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별세상이었다.
하나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양민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채 나오지 않았다. 객잔이며 음식점 주인들도 모두 불안한 기색으로 거리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험상궂은 사람들이 연이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허리에 칼을 차거나 도끼를 찼다.
성안에는 병장기를 함부로 패용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 한데 관아의 병사들은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염병할. 또 저 흑심방 애들이 우르르 몰려왔구먼!”
“그놈의 건달들 회의가 뭐가 중하다고.”
“어허, 말조심하게 양씨. 괜히 개봉에서 흑심방 욕했다가 곤욕 치른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관아 병사들은 뭘 하나? 저놈들은 다 범죄자들 아닌가?”
“으흠. 그쪽들이야 흑심방은 무림의 일이니 관여치 않겠다고 하지 않나.”
“무림은 개뿔! 다 양쪽으로 발을 걸친 놈들인데.”
무림과 관은 표면적으로 서로 관여치 아니한다.
이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하나 관아는 무림이 태동한 이후 끊임없이 무림을 주목해 왔다.
관아가 무림을 감시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흑도였다.
흑도는 칼을 쓰지만, 태생이 뒷골목의 건달들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니 무림의 일원으로 볼 수도 있으나, 어떻게 보면 관아의 일로도 볼 수 있었다.
하니 흑도는 무림과 관아 양쪽에 발을 걸친 상태다.
관아는 그런 흑도에게 여러 뇌물을 받아왔고 적절히 억압하면서도 무림을 감시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흑도의 입장에서야 나름의 사업을 위해선 관아의 조력이 필요했으니 상당한 뇌물을 바치며 어느 정도 협력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다.
이런 흑도가 본래 정도무림에게 좋게 비칠 리가 있겠는가.
“개봉에 남사문이 있을 땐 흑심방인지 뭔지, 저 건달 놈들이 감히 어깨를 펴질 못했는데 말이지.”
“언제 남사문인가, 이 양반아. 우리 어릴 때 정마대전때 사라진 곳이잖나.”
“어휴. 빌어먹을 천마 놈. 창천검신이 아니었다면 정도무림이 아예 사라졌겠지.”
양민들은 불만에 가득 찬 눈빛으로 흑심방의 흑도들을 바라봤다.
정마대전의 여파로 정파의 세력이 눈에 띄게 약화한 지금.
흑도제일문 태룡방은 세력을 떨쳤고, 그에 힘입어 개봉에서도 흑심방이 두각을 드러냈다.
관아와 결탁.
개봉에서 견제할 만한 정파 무림 세력이 거의 전무.
하남에서 가장 큰 성읍인 개봉을 장악한 흑심방이었으니, 그들의 안하무인 함은 그야말로 끔찍할 정도였다.
흑심방의 간부회가 열리는 전각.
전각 앞의 경비를 맡은 적랑은 붉게 떠오른 기루의 홍등을 바라보며 표정을 찡그렸다.
“썅, 누구는 경비서고, 누구는 아주 마시고, 즐기고.”
“어쩌겠냐. 우리 상관이 가장 끗발이 딸려서 그런데.”
“끗발이 딸린 것뿐이냐. 등초 이 양반 성양현에 간 이후로 실종됐잖아.”
“거, 오늘 간부회 끝나면 조사하러 간다는군.”
“지랄. 잘도 가겠다. 등초 그 새끼한테 누가 의리가 있었다고.”
“능허 그 양반이 있을 땐 이쪽도 나름 끈끈했는데 말이야.”
“이미 떠나간 양반인데 뭐. 으흐흐. 이봐. 오늘 일 끝나고 적영루 가는 게 어때?”
“일이 끝나려나. 오늘 회의 길어질 거 같던데. 등초 그 양반이 해 먹던 거 다 자기들이 차지하려고 혈안들이잖냐.”
“뭐, 그거야 우리가 알 바 아니고.”
그때였다.
워낙 험상궂은 흑도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 그 누구도 전각 근처로 접근하지 않았다.
개봉의 양민들이야 당연히 쳐다도 안 봤다. 한데 전각 쪽으로 세 명이 다가왔다.
순간 경계하던 적랑의 시선이 맨 앞에 서 있는 흑의무복의 청년과 시선을 마주쳤다.
“…….”
적랑은 미묘한 압박감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청년이 말했다.
“흑심방주, 안에 있지?”
젊디젊은 미성(美聲)이었다.
하나 적랑은 그 미성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내력을 분명하게 느꼈다.
‘거물이다!’
적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내력이 부족한 자신도 느낄 정도다. 하물며 목소리에 내력이 느껴지다니. 이건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했다.
긴장한 적랑이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순간 청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태룡방에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