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7화 (27/318)

<검신재생 27화>

27. 얼마나 편해?

“썅. 썅. 썅. 쌰앙!”

능허는 방으로 돌아와 연신 상스러운 소리를 내뱉었다.

“흑심방을 접수하라고? 니미럴. 흑심방이 무슨 동네 객잔인 줄 아나.”

흑심방 대가리를 하라고?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나. 이 양반이 진짜.

“……쉬울 거 같기도 하고.”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능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백을 떠올리니, 그 양반이라면 혼자서 흑심방을 깨부수고도 남으리라.

“아니지. 그게 아니지. 부수는 거하고 접수하는 것과는 다르지.”

천무백이 요구한 건 접수다.

흑심방 세력을 온전히 흡수하란 얘기다.

하기야, 어차피 흑심방을 때려 부숴도 그 자리에는 새로운 흑도들이 나타날 거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단한 놈이 하나 있다면, 흑심방처럼 세력을 결집하리라.

개봉의 흑도세력을 통일한다면?

지금의 흑심방이 그렇듯 외부로 힘을 투사하기 마련이다.

개봉과 지척인 원양현. 거기에 하남제일청루란 별명이 있는 연화루는 충분히 탐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니 흑심방을 깨부수고 아예 접수하란 얘기다.

물론 흑심방 전체를 접수하는 건 말처럼 쉬운 얘기가 아니다.

“잘게 쪼개서 연합을 만든다…….”

차선으로 제시한 게 흑심방을 잘게 쪼개고, 극 단체의 수장에 능허와 천무백에게 가까운 인물을 앉힌다.

능허가 일종의 흑도 연맹을 이끄는 자리에 서는 것.

물론 그 뒤에는 천무백이 있다.

“흐음.”

흑심방에는 아직도 친한 동생들이 많다. 그중에는 벗으로 여기는 이도 있다.

“흑도가 가장 무서운 건 모두가 형제처럼 뭉칠 때라고 했지.”

천무백이 한 얘기가 맞다.

흑도는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가 끊임없이 다툼을 벌이는 강호에서 큰 세력을 일구진 못했다.

한데 간혹 흑도가 강호에 두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 지독한 악바리들이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며 하나로 뭉칠 때였다.

“내가 친한 놈들을 각 단체 대가리로 앉히면. 그리고 대가리들이 적어도 서로를 형제처럼만 생각하면, 흑심방 대신 만들어질 연맹이 더 끈끈해질 수도 있지.”

물론 다 이론일 뿐이다.

우선은 흑심방을 어떻게 깨부술지 생각해야 하지 않나.

능허가 걱정이 태산이지만…….

“에휴. 천하 태평하게 악기나 갖고 오라니.”

대금이나 불고 잔다는 천무백의 천하 태평한 모습을 보니 화는커녕 어처구니가 없었다.

“루주님.”

그때, 방에 들어온 기녀에 능허는 순간 말을 잃었다.

기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로 사실상 부루주의 역할의 설영이었다.

이립(而立:30세)을 몇 년 전 넘은 나이.

기녀로서 은퇴한 그녀였지만, 한때 하남성에 자자했던 외모 탓인지 주름살은 늘었을지언정 미모는 빛을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능허는 신기했다.

‘어째, 더 예뻐진 거 같냐.’

그러니까 여기 연화루에 처음 올 땐, 아름답긴 하지만 다 시든 꽃이었다.

기녀 자리를 은퇴하고, 겨우 애기 기녀들에게 예악을 가르쳐주는 일만 하던 역할이었으니까.

한데…….

“그러고 보니 다 예뻐졌지, 킁.”

“네?”

“아, 아니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능허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설영은 그런 능허를 빤히 쳐다보다 살포시 웃었다.

그 모습에 능허는 괜히 마음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에휴, 늙어서 웬 주책이냐.’

최근 연화루에 가면 하남제일미가 방마다 있다는 소리가 괜히 도는 게 아니다.

심지어는 밥하는 찬모를 보고 이제 은퇴한 기녀 아니냐고 물어본 한량도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그전에도 미모가 뛰어난 아이들이었지만, 최근엔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피부가 밝아지고, 얼굴에 있던 잡티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뿐이랴. 다들 한층 생기가 돌았고 건강해진 듯 보였다.

본래 여자가 웃으면 예쁘게 느끼는 사내들이 많다. 다 생기 있게 웃고 다니니, 예쁘다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능허는 이게 어디서 원인이 되었는지 깨달았다.

‘천무백 그 양반이 애들 치료해 준 이후로 다 이렇게 됐지?’

그날 이후로 연화문의 소문은 하남성 전체에 자자했다.

실제로 기녀들도 서로 얼굴을 뜯어보며 왜 이리 예뻐졌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날 천 공자님이 애들 치료해 준 이후로, 다 얼굴이 밝아졌어요. 뭔가 기발한 치료가 아닌가 싶어요. 다들 피부도 엄청 좋아지고 말이죠.”

“흠. 그 양반이 단지 치료만 해 준 게 아닌가 보네.”

“말투는 툴툴대도, 은근히 배려심이 깊은 분이니까요.”

“배려심은 니미럴……, 여하튼 설영아. 혈귀곡이란 곳에 대해 조사 좀 해 보자.”

“혈귀곡이요?”

“위험한 놈들은 분명하니, 굳이 캐물으려고 하지 말고. 그 뭐시냐. 장대인 있지 않냐? 그 양반이 낙향하기 전에 제법 황도에서 끗발 있었다면서?”

“지금은 끈 떨어진 신세라지만, 황도에서 삼십년 넘게 구른 인맥이 어디로 사라지진 않죠.”

“그 양반 통해서 강호 쪽에 새로 나타난 신흥문파, 또는 신흥 사교 같은 거 있는지 은근히 구해 보자고.”

“네.”

“물론 위험한 일이니까 억지로 할 필욘 없어. 그냥 자연스럽게, 응? 애들 위험하지 않게 말이다.”

“……훗.”

설영이 웃자 한참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능허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 죄송해요. 루주님도 일전에 총관 시절 때와는 많이 변하셨네요.”

“변해? 내가? 이 독안사 능허가 말이냐?”

“애들 안전 걱정하는 거, 안 그러셨잖아요.”

“그야 지금은 내가 루주잖냐.”

“그니까요. 변하신 거죠. 애들한테 책임감이 생기신 거니까요.”

“…….”

“저도 감탄했어요. 그때…… 그 흑심방에서 온 괴한한테, 우릴 지켜주겠다고 피 흘리면서도 나서던 모습이요.”

“그야…… 뭐. 그야.”

능허는 대답지 못했다.

천무백 앞에서도 뻔뻔하게 대꾸하던 능허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 그는 마음 한쪽에 생기는 묘한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평생을 흑도판에서 구르며 피를 보고 살아온 그에게는 조금은 낯선 감정이었다.

능허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루주고, 내 연화루다. 물론 천공자 그 양반이 진짜 주인이긴 하지만, 응? 내가 대가리니까. 내 새끼들은 내가 책임져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능허는 무언가 깨달을 것만 같았다.

지금 천무백이 행하는 행동.

자신이 자릴 비우기 전에 흑심방을 정리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공감이 됐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거란 말이지.’

능허가 본 천무백은 무언가 목표가 확실해 보였다.

그 목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도달하기 위해 걸리는 건 모조리 치워버리려고 했다. 일단 혈사문이 그렇다.

또 기반을 착실히 닦으려 노력했다. 연화루를 비롯해 청성표국이 현재 천무백의 바탕이다.

‘그 양반, 어리긴 어린데. 하는 짓 보면 훨씬 노회해 보인단 말이야. 그런데도 어떤 목표에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려고 한단 말이지.’

솔직히 말해 혈사문이 뭔 상관인가?

허성은 천무백이 정의감에 불타 정체불명 스승의 유지를 따라 협객행을 자처한다 생각했다. 능허는 아니다. 눈치 빠른 능허는 천무백이 고루한 정파 놈들처럼 정의심 운운하는 양반이 아니란 걸 알았다.

단지 혈사문은 천무백에게 걸리적거리는 것 중 하나에 불과했다.

또 자신의 목표를 위해 만들 기반을 위협하는, 거슬리는 존재일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뒤를 돌아보지 않게끔 안정적인 기반이 필요하다 이거지.’

그랬다.

‘지킬 게 생기면, 마음가짐이 달라져. 목표를 향해 한층 더 전력질주하게 되고 말이야. 그게 책임감이든, 뭐든. 그래서 천 공자, 그 양반이 흑심방까지 처리하려는 건가?’

혈사문에 이어 흑심방. 그리고 혈사문의 뒤에 있는 혈귀곡이란 단체.

능허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남들이라면 강호의 일에 휘말리기 꺼린다

한데도 천무백은 거리낌 없이 한몸을 던진다. 그만한 실력이 있는 건 다른 문제다. 그 대단한 배짱과 배포에 능허는 솔직히 말해 부러웠다. 그리고 좀 멋있어 보였다. 한창이나 어린 천무백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도대체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능허는 표정을 굳혔다.

뭐, 그 양반 목표가 뭔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쨌거나 천무백과 한배를 탔다. 그리고 연화루를 관리하는 주인은 바로 자신, 능허다. 능허도 천무백과 마찬가지다.

‘그 양반이 자기 기반 지키려고 뛰어다니는 것처럼, 나도 내 새끼들 지키려면 그래야지.’

그는 눈앞의 설영을 바라봤다.

흑심방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다시 연하루를 노릴 건 자명한 일.

그때 천무백이 없다면 혼자 막을 수 있을까?

애들을 지킬 수나 있을까?

“니런, 썅. 그래, 내 새끼들이지. 내 새끼들 지키려면 내 손으로 싸워야지. 암, 천 공자 그 양반 말대로 죽자 살자 달려들어야지.”

능허의 눈이 불타올랐다.

* * *

천무백은 뚱한 표정으로 능허를 바라봤다.

“왜 빤히 쳐다봅니까?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너 능허 아니지. 새끼야. 인피면구 벗어 봐.”

“그래, 아니다. 개자식아.”

“능허 맞구나.”

“네.”

“…….”

허성은 이 둘의 기묘한 조합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천무백은 허성에게도 개봉에 가서 흑심방을 정리하겠단 뜻을 밝혔다.

능허와 달리 허성은 속내론 당황했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따랐다.

천무백은 능허와 허성의 차이점을 보며 피식 웃었다.

허성은 능청스럽긴 해도, 정파의 고루한 무인이다.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일하지 못해 답답한 면이 있어도, 생각보단 충성을 먼저 생각하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반면 능허는 전형적인 흑도다.

충성이란 감정보단 이득을 따진다.

그래서 천무백은 이번 일에 능허가 적극적일까 염려했다.

흑심방을 차지하는 건 이로운 일이다. 하나 능허에겐?

솔직히 그놈의 능력만으로 흑심방을 관리하는 게 가능할까?

그건 본인이 잘 알 거다. 힘들다는 사실을.

그러면 굳이 능허는 일을 벌일 필요가 없다. 위험성을 감수하고도.

한데 전혀 예상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그니까, 이때 개봉에 흑심방 간부들이 다 모이니, 하나씩 꼬여서 처리하자?”

“네.”

“흠.”

천무백은 팔짱을 꼈다.

제법이라는 눈빛으로 능허를 바라봤다.

이놈, 제법인데?

능허 같은 유형이 마음먹고 적극적으로 달려들면 일이 수월해진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도 제일 나은 방법을 찾아내니까.

아직도 흑심방에는 능허와 연결된 사람들이 많다.

최근 흑심방이 사업 확장으로 새로운 이권이 생겼는데, 그 이권을 관리할 간부를 새로 뽑는다고 한다.

흑심방주의 권력이 크긴 하지만, 각 간부를 무시할 순 없다. 조금이라도 무시당하고 차별받는다 여겨지면, 여차하면 들고 악바리처럼 달려드는 게 흑도니까.

그러니 모든 간부가 개봉으로 모인다고 한다.

그전에, 길목에 서서 하나씩 처리하거나, 또는 한 명씩 꼬여 낼 테니 처리하자는 의견이다.

“크!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 계책 아닙니까?”

“얼씨구.”

“한 명씩 불러내서 막 윽박지르는 겁니다. 이쪽 편에 서라고. 응? 제가 그쪽 전문 아닙니까.”

“이쪽으로 안 넘어오면?”

“그때 처리하면 되죠.”

“흠, 어떻게 생각해? 허 표사.”

“칼은 주인이 휘두르는 대로 쓰이는 법입니다.”

“고지식하긴.”

“크으. 저런 고지식한 양반이 차라리 낫죠. 괜히 일 벌이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상관보단 말이죠.”

빠악!

“억!”

능허는 붉게 달아오른 이마를 매만지며 꿈틀거렸다.

천무백의 딱밤이 작렬했다.

“왜, 왜 때린 겁니까?”

“가끔 때려 줘야 정신 차리는 놈들이 있어서.”

“하!”

“여하튼, 나쁜 생각은 아닌데…….”

천무백은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허성도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비록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지만, 그 역시도 능허의 계책이 제법 괜찮아 보였다.

어차피 흑심방을 부수고 없애는 게 목표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접수하려면, 기존의 사람들도 이끌어 가야 한다.

하니 굳이 힘들게 일일이 처리하기보단, 이쪽으로 전향시키는 게 낫지 않은가?

“귀찮잖아?”

“네?”

“한 명씩 언제 불러서 그 지랄을 해? 더구나 이쪽으로 설득한다고 해도, 능허야. 그놈들이 네놈 말을 철두철미하게 따를 것 같더냐?”

“그건…….”

“적어도 각 단체의 2인자나 밑에 애들한테 윗자리를 넘겨야지.”

“하면 다……?”

“그래. 굳이 따로 하나씩 처리할 필요가 없다. 간부회의가 언제라고 했지?”

“사흘 후입니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거기서 한꺼번에 물갈이하자고. 흑심방주까지 싹. 얼마나 편해?”

순간, 방안엔 지독한 정적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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