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5화 (25/318)

<검신재생 25화>

25. 다 아는 방법이 있어요

무인에게 단전은 어떤 존재일까.

‘전부지.’

천하의 외공고수도 내공 공부를 해야만 한다.

단전을 만들어 내기를 쌓아야 외공도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무공을 익힌다는 건, 보편적으로 단전에 내력을 쌓는 게 기본이다.

하니 단전이 파괴된다면 무인이 느낄 공허함과 상실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으리라.

두 눈이 파르르 떨리는 육성이 그랬다.

“마, 말도 안 돼…….”

단 한 번의 탄지공으로 단전에 큰 구멍이 뚫렸다.

구멍이 뚫린 수준이 아니다.

파괴력에 갈기갈기 찢겼다.

찢기고 뚫린 틈으로 수십 년간 쌓은 그간의 모든 공력이 줄줄 흘렀다.

“하나 궁금한 게 있다. 혈사문인데 정체 숨기고 화산의 속가제자가 된 거냐? 아니면 속가제자로 살다가 벽에 막혀서 흡정마공에 혹해 가지고 혈사문에 넘어간 거냐?”

대답은 없었다.

초점 잃는 눈동자로 마치 흘러내리는 내력을 주워 담으려는 듯 헛손질하는 추레한 노인네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뭐, 대충 감이 잡히긴 하네.”

천무백이 냉소를 지었다.

“벽에 막혔을 거야.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 겪는 벽 말이야.”

순간 뒤에 있던 허성이 흠칫했다.

허성은 입술을 좁히며 천무백과 추레한 노인으로 폭삭 늙어버린 육성을 번갈아 바라봤다.

천무백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아무리 노력해도 깨지지 않아.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비무를 펼쳐도 나아가질 못해.”

“…….”

그때야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던 육성의 핏발선 눈이 천무백을 향했다.

허성은 헛숨을 들이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치 신선 같은 풍모를 보였건만 지금은 추레하다 못해 기괴했다.

광택이 넘치던 피부는 목내이처럼 비쩍 말랐다. 보기 좋던 백발과 새하얀 눈썹, 수염은 모두 기운을 잃고 뻣뻣해졌다.

정광이 감돌던 동공엔 온갖 음욕과 폭력성, 그리고 욕망이 깃들었다.

“고작 애송이인 네가 뭘 안다고 감히 지껄이는 게냐!”

“뭐, 빤히 보여. 그런 놈 한둘 본 게 아니거든.”

“닥쳐! 닥치란 말이다!”

“벽에 막혔고 좌절했고, 그러다 보니 핑곗거리를 찾게 돼.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속가제자네? 어? 화산의 매화검을 못 익혔네? 응? 그래서 내가 벽을 못 깨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겠지.”

허성은 묘한 감흥에 휩싸였다.

분명 육성을 조롱하는 말이다. 한데 날카로운 비수가 폐부를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하. 그러다 보니까 화산이 스승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개같이 느껴지는 거야. 어? 이왕이면 매화검도 알려주고! 일대제자들부터 배우는 내공심법도 알려 줬으면 얼마나 좋아? 이놈들 때문에 내가 재능을 못 살린다 여겼지. 그런데 혈사문이란 놈들이 흡정마공으로 네가 좌절했던 벽을 아무렇지 않게 뚫어 버리네? 혹한 거야.”

허성은 침음을 삼켰다.

‘내가 주군을 뵙지 못했다면, 어쩌면 저 인간처럼 됐을지도 모르는구나.’

물론 지금이야 혈사문이란 단체가 얼마나 극악한 사교인지 잘 안다.

그렇지만 저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천무백의 말처럼 하지 않으리란 자신이 있을까.

허성은 대답을 쉬이 내놓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도 저렇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웃긴 일이로구나. 나 역시도 일찍 결혼했으면 주군만한 자식이 있을 터인데……. 단숨에 핵심을 꿰뚫어 보는 저 통찰력은, 도저히 나이가 믿기질 않아.’

소름이 살짝 올라왔다.

천무백의 무서운 점은 여러 가지다. 끝을 알 수 없는 무공의 경지며, 상황을 이끌어 나가는 주도면밀함이며,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이한 매력까지.

하나 그중에서도 허성이 가장 무섭다고 생각한 건 바로 저 통찰력이다.

‘통찰력은 오성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쉬이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건 오로지 경험만으로 가지는 거니까.’

괜히 강호에서 노인을 조심하란 말이 나온 게 아니다.

제아무리 가진바 내력이 부족하더라도,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은 노인은 숱한 경험이 있다. 거기서 나오는 통찰력은 모든 지혜를 담고 있다.

한데 고자 열여섯의 천무백에게서 그것이 보였다.

“이렇게만 보면 씁쓸하지 않아? 허 표사?”

“네……?”

“벽에 막혀 발버둥 치다가 마공에 손댄 거 말야.”

“그거야…….”

솔직히 말해 영 공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 역시도 비슷한 길을 밟고 있었으니까.

천무백은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발악하는 육성을 바라봤다.

“이런 놈들은 정말…….”

많이 봤지. 많이 봤어.

수도 없이 많았다.

혈사문이 세를 떨쳤던 이유 중 하나가 정파며, 사파며 제법 괜찮은 고수들이 투신했던 탓이 크다.

그들이 가진 흡정마공의 위력은 그만큼 유혹적이었으니까.

어쩌면 육성과 같은 사례는 강호에 수도 없이 많다.

설령 흡정마공이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도, 벽을 만나 좌절하고 거기서 끝나는 무인의 삶은 중원에 얼마나 많던가.

그렇다 하더라도.

“공감은 하는데, 이해는 못 한다. 쓰레기야.”

빠악!

천무백의 발길질이 육성의 어깨를 박살 냈다.

“그러면 의가 어디 있고, 협이 어디 있더냐? 응? 다 막혀서 개나 소나 흡정마공에 기대면 말이야.”

빠악!

이번에는 무릎이 폭삭 부서졌다.

“아무리 강호가 삭막해져도, 의와 협이 있어야 강호란 존재가 살아남는 거야.”

마지막 손목까지 발에 밟혀 부서지자 천무백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마주 앉았다.

“자. 뭐 그쪽부터 의협을 논하기 힘든 상대니, 나 역시도 그러면 안 될 거 같고. 일단 알고 있는 거 하나부터 얘기해 볼까?”

천무백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고통에 신음하던 육성은 미소를 보고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초연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천무백을 조롱하는 듯한 미소였다.

“알려 주고 싶어도 알려 줄 수가 없구나!”

“허. 넌 구진해와 다르네. 금제가 걸린 걸 아는구나?”

“금제? 역시…… 그놈들이 금제를 걸었군.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터이니. 나도 몰랐다. 그저 추측한 것뿐이지.”

“구진해보단 똑똑한 놈이군. 근데 아무것도 없이 연화루에 쳐들어온 거 보면 멍청한 거 같기도 하고.”

“모든 정보를 조사해서 나온 결론이다. 설령 허성이란 놈이 구진해를 이겼다고 해도, 난 구진해보다 강하니까.”

“강호에서 정보는 늘 3할이 숨겨져 있다는 거 몰라?”

“그 3할이 너였군.”

“그리고 그 3할이 일을 바꾸는 법이지.”

천무백의 냉소에 육성은 피를 토하며 웃었다.

“오늘 어린놈에게 강호를 배우는구나.”

“그게 강호니까.”

“그렇지. 그게 강호지. 하니 어떻게 하겠나? 난 말해 주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는데.”

육성이 실실 웃었다.

이미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어차피 살아날 수 없다.

아니, 살아난다고 해도 사는 게 아니다. 단전은 찢어졌고 내력은 흘러내렸고 팔다리가 다 부서졌다. 이제 구걸이나 하며 살아야 하는 노인이나 다름없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천무백에게 복수?

어림도 없다.

‘이 새끼. 장로들 서너 명이 덤벼들어도 상대 못 해!’

절대적인 무력의 체감.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제야 육성의 눈에 허리춤에 걸린 검이 들려왔다.

“애송아, 너 설마 검을 쓰더냐?”

“보는 눈은 있군.”

“허허허!”

검을 쓰는 검객의 손에 검이 쥐어지지 않았다.

한데도 고작 손가락 몇 번에 단전이 찢어졌다. 주먹질과 발길질에 팔과 다리가 부서졌다.

그 압도적인 무력차이에 대한 실감이 이제야 들었다.

‘장로들? 아니, 문주가 와도…….’

안 된다.

이놈은 안 된다.

‘하면 그놈들은?’

그 몸서리쳐질 정도로 끝을 알 수 없던 괴물 같은 놈들은?

문주도 벌벌 떨며 허리를 숙이던 그 피 냄새 짙던 놈들은 어떨까?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경지의 고수들 싸움은 함부로 예측하기도, 할 수도 없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육성은 그놈들 중에 하나. 가장 귀신같이 느껴지던 놈을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애송아. 네가 어떤 기연을 맞아 고강한 무공을 가진지 모르겠지만,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다.”

나이에 비교해 가진 능력이 뛰어나다.

기연이든 뭐든, 그래서 기고만장하겠지.

하지만 강호는 넓다. 그 피 냄새나던 놈 중에 귀신이 하나 있다. 그라면, 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애송이에게 큰 교육을 해 주리라.

그런 무시무시한 귀신이 있다는 걸 금제 때문에 말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로 육성은 오히려 안타까웠다.

“때론 모르는 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가 있지.”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다 아는 방법이 있어요.”

“……?”

“구진해가 금제에 머리통이 터져나가는 꼴을 봤는데, 내가 이런 상황이 올 걸 예측을 못 했을까.”

아니, 예측은 했겠지.

그렇지만…… 예측한다고 해서 뭐? 금제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육성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오를 무렵.

천무백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천무백의 두 동공이 새하얗게 빛났다.

* * *

“손님, 죄송하지만 기루 내부에 큰 변고가 생겼습니다. 추후 다시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화루가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졌다.

방을 잡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논하던 한량들은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벌컥 화를 냈다.

원래 사람이란 게 술이 들어가면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길 들어오려고 내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다짜고짜 나가라고?”

“장사를 이딴 식으로 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몇몇 손님들은 불쾌한 기색이긴 했지만, 연화루의 뜻대로 나갔다. 하나 소수의 손님은 거의 난장을 피웠다.

“죄송합니다만, 현재 변고가 생겨 손님들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함이니, 추후에 방문하시면 더 좋은 대우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니까 그 변고가 뭔…… 크흠.”

난리를 피우던 사람들은 능허의 살벌한 애꾸눈을 보고 급히 꼬리를 말았다.

제법 한가락 한다는 왈패들도 능허를 보곤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했다.

독안사란 별호처럼 그의 인상은 험상궂다 못해 지독한 편이었다.

최근엔 조금 유해졌다지만, 씹어 내뱉듯이 하는 말은 겉으론 정중한 존댓말이나 느껴지는 건 거의 반협박 수준이었다.

“니런 썅. 하여튼 장사는 자기가 하나? 내가 하지? 아주 제멋대로야. 멋대로.”

능허는 신경질을 내며 천무백이 있는 최상층을 바라봤다.

완세검 육진량이 오고 나서 위에서 강렬한 기파가 느껴졌다.

눈치 빠른 능허는 곧장 눈치챘다.

“이럴 줄 알았지. 정파 놈들, 겉으론 고귀한 척 다하면서. 응? 겉으론 정파무인이고 뒤로는 혈사문의 쓰레기였다 이거지.”

그로서도 충격적인 일이다.

비록 섬서를 근거지로 활약하는 완세검이라지만, 하남까지 별호가 알려진 건 그만한 명성이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만일 혈사문이란 단체가 강호중원에 드러나고, 완세검이 혈사문 소속이란 게 알려지면 꽤 볼만 하리라.

“아니, 그건 그거고. 다짜고짜 손님을 다 빼라니.”

도대체 뭘 하려고?

당장 그가 눈을 부라려도 제법 한가락 하는 무공을 익힌 놈도 몇 있었다.

그들은 능허가 찾아와도 옆에 기녀를 끼고 도저히 일어나질 않았다.

‘썅. 한판 붙어?’

아직 익숙지 않은 왼손을 쥐락펴락하면서 나가지 않는 몇놈과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끄아아아아아아악!

“……!”

그때, 최상층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신경전을 펼치던 무인 몇과 능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독히도 처절한 비명소리였다.

마치 죽기 직전에 내뱉는 비명처럼.

지옥의 끊임없는 염화에 타오르는 귀신이 내뱉는 비명이 저러하지 않을까.

동시에 최상층이 울리면서 칼날 같은 기파가 1층에 있던 능허에게까지 느껴졌다.

-끄아악, 끄아아아악!

“이, 이만 가 보겠소!”

계속된 비명은 사람의 가슴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버티던 놈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급히 빠져나갔다.

능허는 그저 멍하니 최상층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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