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4화>
24. 자기소개하던지.
“······.”
육진량, 혈사문의 삼장로 육성은 어안이 벙벙했다.
‘뭐였지?’
육성은 약간은 건조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정중한 얼굴의 허성과 뒤에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을 바라봤다.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거라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건 분명 극도로 정순하게 가공된 내기였건만······.
그리고 구린내 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모든 게 꿈같은 잔상처럼 느껴졌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사람 좋아 보이는 청년이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일종의 인지 부조화가 온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육성은 다시 눈을 부릅뜨며 허성과 청년을 쳐다봤다.
‘정보가 잘못됐다. 허성 저놈, 절정이다. 하지만 구진해를 이길 정돈 아니야. 또······ 제법 훌륭한 내력이 느껴지지만 조금 전 그것과는 아니었는데.’
눈동자를 굴러 그 뒤에 나타난 청년을 바라봤다.
그를 보는 순간 육성의 얼굴이 한층 복잡해졌다.
혼란스러웠다.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청년, 그러니까 천무백을 보고 느껴지는 모든 것의 총합이었다.
느껴지는 내력은 한 줌 조차 없다.
‘무공은 전혀 익히지 않는 그저 평범한 양민인데. 분명 그런데.’
확신이 서지 않는다.
50년.
육성이 겉으로는 진천문의 정파무인으로, 뒤로는 혈사문의 삼장로로 강호를 전전한 지가 무려 50년이다. 웬만한 사람이 장수한 나이만큼 강호 경험이 깊었다.
그러니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공자는 누구시오?”
“아, 안녕하십니까. 청성표국의 천무백입니다. 명성 높은 육진량 대협이 오셨고, 제 호위인 허 표사를 찾으신다 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천 공자라·····혹여 무공에 뜻을 두셨는가?”
천무백이 다소 부끄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진천문이 있는 섬서까지 제 소문이 퍼지지 않았나 보군요. 무공에는 소질이 없고 그저 예악을 좋아해 이렇듯 기루를 전전하며 시와 음악을 논하는 한량입니다.”
천무백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육성은 점점 긴장이 풀렸다.
허성은 곁에서 천무백의 화술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능수능란하게 육성의 경계심을 허물어뜨렸다.
다짜고짜 들어오면서 구린내가 폴폴 난다고 했는데, 그 말을 그저 잘못 들은 거로 여기게 할 정도로 아주 능숙한 화법이었다.
‘아니지. 나한테 경고한 거 였나?’
순간 허성의 눈가가 파르르 떨었다.
완세검 육진량!
진천문이라는 아주 작은 문파의 이름이 강호에 알려진 건 바로 완세검 육진량 덕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찾는다 했을 때 얼마나 설렜던가.
하물며 같은 화산의 속가제자라고 하니, 그 위명 높은 완세검과 친근감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비공식적으로 천무백의 곁에서 호위를 맡게 된 허성이 긴장을 풀어버렸다.
순간 등골이 섬찟하며 머리칼이 쭈뼛 섰다.
‘그래, 경고였군.’
천무백이 나타나며 이상한 말을 운운하던 순간.
한없이 자애로워 보이던 육진량의 얼굴이 급변했다. 정확히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독한 사기.
아주 잠깐이고 곧바로 사라졌지만,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역한 사기가 풍겼다. 오래 방치된 시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취 같은 지독함이었다.
결코, 정파의 공명정대한 명성을 떠올리기 어려운, 사기였다. 마치 일전에 본 혈사문의 구진해처럼…….
그제야 허성은 경계심을 가득 띄우고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살폈다.
‘보지도 않고, 그저 멀리서 저 숨겨온 사기를 느꼈단 말인가?’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건만, 오히려 알아갈수록 천무백의 진짜 끝은 어디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물며 언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냐는 듯이 능청스럽게 대화를 이끄는 모습을 보라!
저 강호경험이 풍부하고 노회한 육진량이 스스로 착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능수능란하지 않나.
‘이전에도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능력이 있었건만, 이제는 마치 그 능력을 이용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군.’
원래도 천무백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을 타고난 사람이다.
처음 그를 본 사람도 호감을 느낄 정도니 오죽하겠나.
한데 최근의 천무백은 과거보다 더했다.
마치 자신의 타고난 매력을 알고, 그걸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육진량을 구워삶는 것도 그렇고, 늘 서로 티격태격하며 거의 매일같이 구박하는 능허도 은근히 천무백을 좋아하지 않은가.
심지어 자신의 오른손을 망가뜨린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허성 자신도 천무백을 위해 어느 순간부터는 목숨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차례 몸이 떨렸다.
이것이 의도한 바든, 설령 아니든, 천무백에 대한 경외와 동시에 두려움이 들었다.
“그렇군요. 그래요. 정말 멋진 이야기입니다. 창천검신이 마교와 일전을 벌일 때, 곁을 함께 하다니요!”
“허허. 천 공자가 내 얼굴에 금칠하는군. 난 그때 그저 어린 화산의 제자였고, 먼발치서 압도적인 무위를 구경하던 게 다였네.”
“역시 너무 겸손하십니다.”
육성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살짝 들뜬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천무백을 보니, 마치 손주처럼 느껴졌다.
‘내가 잘못 보고, 잘못 들은 게 분명하구나.’
저 얼굴을 보니 경계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놀라운 일이다. 노회하기로 혈사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육성의 경계심이 순식간에 허물어진 것이다.
‘쓸 만하군.’
하나 그 순간에 천무백의 눈은 빛났다.
사람들은 흔히 천무백의 매력을 타고난 기이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천무백은 달랐다.
‘상단전의 효능 중 하나지.’
상단전의 특징 중 하나가 외기를 이용하는 데 타고났다는 점이다.
즉, 몸 안에 쌓인 내기만을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단전이 개발되면 개발될수록 바깥의 기의 흐름에 더 밀접하게 관여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었다.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열려 있는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외기를 감정에 따라 움직여, 주위 사람들에게 은근히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이한 기질이 있다며 놀라워할 뿐이었다.
‘나름 성공적이야. 절정에서도 수위급인데도, 잘 통하는군.’
이미 진즉 천무백은 눈앞의 육성이 정파 인물이 아닌 혈사문의 사람이란 걸 눈치챘다.
아니, 정확히는 연화루에 들어올 때부터.
기분 나쁜 불쾌함이 느껴지는 끈끈한 내력이 느껴졌다.
일전의 구진해와 같은 느낌이었다. 흡정마공을 사용하여 빼앗아 쌓인 내력의 특징 중 하나였다.
오감에 예민하고, 상단전의 개방으로 외기에 예민한 천무백으로선 당연히 곧장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육성이 아무리 감춰 둔다고 해도, 그 지독한 악취를 천무백은 맡았다.
그런데도 곧장 검을 쓰지 않은 건, 바로 일종의 시험이었다.
‘강호 경험도 제법일 테고, 노회한 느낌도 강하고, 기운을 갈무리하는 능력도 좋아. 구진해보단 더 실력자야.’
그래도 통했다.
의도대로 외기의 흐름에 관장하면서, 상대의 경계심을 허무는 데 성공했다.
하물며 맨 처음 천무백이 이상한 말을 했건만, 그것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아니면 스스로 착각했다고 여기게 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절정을 넘어선 이들에겐 쉬이 통하지 않겠지.’
일견 보기에는 천하제일의 무공으로 보이나, 그것도 아마 여기까지가 한계선일 확률이 높다.
내력이 깊어질수록, 고수일수록 자신의 감정에 초탈해진다.
하물며 외기의 흐름에도 민감하니, 천무백이 외기에 관여하는 순간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고 경계하리라.
‘이것도 나름 체계적으로 만들고 개발하면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는데.’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하나 지금은 그것이 급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무공을 창안하는 건 차차 하기로 하고, 천무백은 우선 눈앞의 육성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마교를 은근히 언급했는데도 전혀 금제의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맞장구를 치며 맞춰 준 건 시험한 것도 있지만, 은근히 정보를 캐내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중에 천무백은 일부러 마교를 언급했다.
만일 혈사문의 뒤에 있는 놈들이 마교라면, 금제가 발동할 낌새가 느껴져야 하니까.
한 데 아녔다.
‘하긴, 마교 놈들도 천마를 신으로 모시는 놈들인데 뱀을 신으로 모시는 광신도 놈들을 뭣 하러 지원할까.’
천무백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가장 유력한 예상 중 하나가 탈락한 것이다.
‘하면, 내가 모르는 곳일지도 모르겠는데.’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진다.
맨 처음은 그저 모습을 드러낸 혈사문을 처리하면 그만일 줄 알았건만…….
‘하긴, 강호가 언제 늘 뜻대로 되는 것이던가.’
천무백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차피 칼끝을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선 강호의 모든 풍파에 직접 검 한 자루 들고 몸을 던져야 했다.
그것이 조금은 나중의 일인 줄 알았건만, 천무백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미 풍파 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군.’
두렵거나 뒤로 물러날 건 없다.
천무백이 순간 미소를 싹 거둬들이자 방 안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말없이 육성을 빤히 쳐다봤다.
그제야 분위기가 요상해지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육성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이만 지겨운 가면은 벗고, 얘기 좀 합시다. 혈사문에서 왜 또 죽으러 오셨소?”
“……!”
* * *
육성의 눈동자가 거세게 진동했다.
“천……공자?”
천무백이 귀찮은 기색으로 귀를 후볐다.
“살 만큼 살았고, 강호 돌아다닐 만큼 돌아다녔을 텐데, 아직도 감 못 잡아?”
“지금 이게 무슨 태도요!”
“허성이 구진해를 죽인 것 같소?”
구진해란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
파파팟!
육성은 곧장 좌수를 쭉 뻗었다.
천무백이 미묘하게 한 박자 빨랐다.
곧장 술상을 손목을 간단히 튕기는 것만으로 엎어버렸다.
푹푹!
육성의 좌수가 술상에 박힌 채로 천무백의 목을 노려왔다.
그전에 천무백의 오른손이 기습적으로 육성의 허리를 노렸다.
이미 뻗었던 좌수를 회수하기는 늦었던 터. 육성은 불가피하게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그저 정직하게 방어 동작을 취하며 막아냈다.
“큭!”
그 순간에 천무백의 손가락이 새하얗게 빛났다.
순간적으로 손가락 끝에 공력이 집중됐다.
비록 양은 적지만, 그 정순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육성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이거였다! 이 내력이었어! 그래, 이놈이었구나!’
흡정마공으로 쌓은 내력과는 완전히 상반된 기운.
‘무당인가? 아니면 사라진 전진이던가? 아니, 설마 소림?’
그야말로 항마(降魔)의 기운.
천무백이 일전에 깨달음을 바탕으로, 거의 새로운 내공심법으로 바뀌어 버린 경천혼공으로 쌓인 공력.
무당과 전진, 심지어 소림의 핵심까지 한데 모여 만들어진 그야말로 천혜의 심법이었다.
그렇게 쌓인 내력이니, 정순함은 일전의 경천혼공보다 더했으며 상단전에 그 어느 것보다 잘 어울렸다. 그리고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한 항마의 기운을 가졌으니…….
“끄아아아악!”
방어하려던 육성의 눈이 흰자로 뒤집혔다.
흡정마공으로 쌓인 마공이 모조리 불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바짝 마르고 단전이 쥐어짜 내는 기분.
천무백의 탄지공이 거짓말처럼 육성의 배꼽 부근을 찔렀다.
단전이었다.
쩌저저저정!
단전이 깨져나가는 순간.
육성은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누가 자신을 무시하던가.
정파에서는 완세검이라하면 화산의 장로들도 튀어나와 존중했으며, 혈사문에서도 서열로만 따지면 한손에 들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러자 천무백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니런 썅! 어떻게 이딴 놈들은 수백 년 동안 똑같냐. 응?”
“뭐, 뭣?”
“거 그딴 말 지껄이기 전에 제발 좀, 어 자기소개를 하시던지요! 썅 내가 알 게 뭐야! 꼬우면 니가 자기소개하세요!”
꽝!
천무백의 손끝이 단전을 찢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