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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3화 (23/318)

<검신재생 23화>

23. 구린내를 폴폴 풍기는데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모시겠습니다.”

“조금 전 그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네? 전 지금 처음 각오하고 한 말인데.”

“아니. 연화루에서 들은 말 같아서.”

천무백은 뚱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허성을 바라봤다.

연화루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다.

능허는 연화루를 정상화하고 곧장 청성표국에 인수되는 준비를 시작했다.

원래 인수가 바로 되는 게 아니다.

준비해야 할 서류도 한가득하고, 이전 루주들이 공식적으론 실종됐으니 문제가 많다.

그러니 여기저기 밑으로 오갈 돈도 많다. 그 부분에 있어서 능허는 자신만만했다. 이런 일은 수도 없이 했다고.

나름 더러운 뒷공작에서 수완이 깊다고 자랑하는 꼴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놈도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 충성맹세 했는데 말이지. 에휴.”

뭔 이런 놈들만 꼬이는지.

그래도 천무백은 쳐 내질 않았다. 능허는 가진바 독기도 대단한 놈이고, 나름 눈치도 빠르고 수완도 괜찮은 녀석이다.

그리고 허성은…….

“길이 좀 보였나 봐?”

표정을 보니 알 만했다.

눈이 밝게 빛났고 얼굴엔 새하얀 광택이 감돌았다.

은은한 매화향이 그에게서 풍겼다.

“가장 앞에서 대신 검을 휘두르고, 대신 칼을 맞겠습니다. 가장 먼저 길을 열고, 가장 마지막까지 뒤를 지키겠습니다.”

“얼씨구. 어디 전쟁 나가냐. 뭘 이리 비장해.”

“그저 제 의지를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 진심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제가 대신 칼을 맞아 지키겠습니다.”

“글쎄. 그 정도로 위기에 처할 정도면 천마신교 전부 떼거리로 와야 하지 않나……?”

“네?”

허성은 눈을 끔뻑거렸다.

이제는 천무백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절대적인 신뢰를 표할 허성이지만,

방금 들은 말은 잘못 들은 거로 착각했다.

하나 천무백은 미간을 좁히며 진지하게 생각에 빠졌다.

‘저번엔 천마부터 밑에 놈들까지 싹 몰려왔을 때, 좀 살 떨렸었지. 이번 삶에서도 그만한 위기가 오려나.’

정말 살 떨렸었다.

천하의 천무백도 그때만큼은 ‘이거 좀 힘들다.’라고 중얼거릴 정도가 아니었나.

물론 그 전투에서 승리해 그 유명한 천마를 패퇴시킨 창천검신의 위명이 전 강호를 떨쳤지만…….

하나 그 순간만큼 짜릿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천무백은 그때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는 것보다 더한 위기의 순간에서 깨달음을 얻는 건 강호 불변의 진리다.

하나 누구나 그런 순간을 쉽게 접하는 건 아니다.

아니, 접하더라도 그 순간의 미세한 깨달음을 잡아내기란 쉽지 않다.

설령 잡아내더라도, 위기를 모면해 살아남는 것 자체도 힘들다.

하지만 살아남는다면, 한층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설 수 있다.

그것이 강호다.

천무백은 그런 순간이 이번 생에 다시 올까에 대해 의문이었다.

‘천마 놈이 뭐 빠지게 도망치고, 내가 죽은 후에도 40년 동안 감감무소식이라니…… 진짜로 죽었나.’

천무백이 그간 강호 소식을 모아 본 결과.

정확한 건 없었다.

그저 추측만 가득했다.

창천검신에게 치명적인 다친 천마가 끝내 사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그렇지 않다면 숱한 정파무림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리고 창천검신이 죽은 지(세간에는 우화등선으로 알려져 있다.) 40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글쎄. 강호란 또 언제, 어디서 위험이 찾아올지 모르는 곳이니까.’

천무백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달이 지고 동이 트고 있었다.

* * *

“허성이란 놈이란 말이냐?”

혈사문의 삼장로 육성은 새하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신선처럼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선 왠지 모를 사기(邪氣)가 흘러나왔다.

맞은편에 부복해 있던 척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척을 보면서 육성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이거야 원, 난생 들어본 적도 없는, 별호조차 없는 놈의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 건지…….”

구진해가 제자 둘을 이끌고 원양현으로 간 지 무려 한 달이 지났다.

한데 소식이 끊겼다.

다름 아닌 그들이 공을 들이던 연화루에서.

하남에서 규모가 가장 큰 편이고, 청루 중에서는 예악이 단연 제일이라 혈사문의 하남 거점으로 삼기에 최적이었다.

한데 원래 루주였던 놈이 사라지더니, 웬 이상한 흑도 놈이 그 자리를 꿰차는 게 아닌가.

그 사실을 조사하러 구진해가 직접 갔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척아. 허성이란 놈이 그리 강해 보였더냐?”

“아닙니다. 스승님께선 정말 여유로웠습니다. 실제로 허성도 제가 상대할 만한 무력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구 장로는 사라졌고, 연화루는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

그 말에 일전에 구진해가 먼저 보내 소식을 전하라 했던 척이 납득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스승님이 허성이란 애송이한테 당했단 말입니까?”

“허성이라…… 허성.”

삼장로 육성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이름을 되뇌었다.

여러 가지 경로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허성은 표사치곤 제법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다.

다만 전제조건이 중요하다.

‘표사 치곤.’

웬만한 무림 문파 상대로도 눈썹 하나 꿈적하지 않는 혈사문이 아닌가.

그런 육성에게 표사 치고 뛰어난 실력이란 허성이 성에 찰 리가.

구진해 정도면 진작 처리하고도 돌아왔을 시간이다.

하남성을 담당하게 된 장로는 둘이었다.

육성과 구진해.

‘그놈이 오만하긴 해도, 실력만큼은 진짜배기란 말이지.’

그가 하남에 오면서 걱정한 건 바로 소림이었다.

비록 일전의 정마대전에서 많은 힘을 잃긴 했어도, 창천검신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천마를 막아서던 건 소림이었다.

만일 창천검신이 아니었다면 소림은 멸문당했을 터.

그 정도로 끔찍한 피해를 보았다.

봉문에 들어간 지 40년이 지났건만, 소림은 다시 문을 열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젊은 고수들이 모조리 당하고, 윗세대들도 거의 다 죽어서 오히려 무공이 실전될 지경이라고 하지 않은가.

‘그래도 소림은 소림이지.’

혹여 소림이 숭산에서 다시 내려온다면, 혈사문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리라.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건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복병을 맞았다.

“청성표국의 허성이라…….”

육성은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 직접 보러 가야겠다.”

육성의 눈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 * *

누군가 본다면 세상이 말세라고 한탄을 할 광경이었다.

“섬서는 역병으로 수많은 유랑민이 발생했고, 여기 하남에도 서서히 역병이 퍼지고 있거늘, 선비들은 풍류를 핑계로 술과 여자를 찾고, 한참 일해야 할 젊은 양민들은 그저 계집의 분 냄새 한번 맡고자 숱한 재화를 뿌리는구나!”

하남 원양현에서 학식 높기로 유명한 선비가 연화루를 보고 터뜨린 한탄이었다.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연화루는 하루하루가 성황이었다.

물론 기루 장사가 불황과는 관련이 없긴 하다.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했을 때도 기루는 등을 올렸으니까.

하나 연화루의 밤은 다른 기루보다 더 밝았다.

웬만한 부호가 아니고서야 입장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다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니, 지나가던 사람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여기가 왜 이리 사람이 몰리오?”

“아, 기루에 사람들이 왜 몰리겠나.”

“기녀들 때문이오?”

“그래. 연화루 기녀들 외모 덕택이지.”

“연화루 기녀들이 아름답단 소린 내 풍문으로 들은 적 있으나, 이 정도란 말이오? 다른 기루들은 방이 텅텅 빌 정도인데?”

“그만큼 여기 기녀들이 아름다운 거 아니겠소?”

바로 연화루 소속 기녀들의 외모 덕택이었다.

본래도 아름다운 외모로 소문이 자자했으나, 근래 연화루를 한 번 갔다 온 사람은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내방에, 옆방에, 그 옆옆방에도 하남 제일미가 있다오!”

돈 많은 한량에게도 소문이 금방 퍼졌다. 심지어 하남제일청루라는 얘기가 있으니, 선비들과 시와 노래를 논한다는 핑계로 연신 찾아들었다.

일석은 분주하다 못해 바빠 죽을 지경인 연화루의 경비를 서면서도 눈을 연신 부라렸다.

“어이! 거기 형씨! 새치기하다간 골로 가오!”

비록 천무백에게 벌벌 떨며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 해도, 흑도에서 구른 일석은 험상궂은 외모에 남을 제압하는 험한 분위기가 있었다.

“응?”

그때였다.

길게 늘어선 줄 왼쪽으로 당당하게 걸어오는 노인이 있었다.

백의를 입은 노인은 백발과 수염, 그리고 눈썹까지 새하얀 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입가에 띤 은은한 미소 덕분인지, 이야기 속의 신선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한데…….

‘이거 묘한데?’

일석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사실 그는 감이 꽤 좋은 편이다.

등초가 능허 앞에서 기녀들을 희롱할 때, 그라고 왜 음심이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다만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톡톡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하여 그냥 뒤로 한 발짝 물러서 가만히 있었다.

‘결국, 그게 내 목숨을 연명했지.’

자신과 비슷하게 감이 좋았던 세 명, 이석, 삼석, 사석도 그렇지 않았나.

한데 지금이 그랬다.

그때처럼 묘한 불쾌감이 등 뒤를 타고 흘렀다.

“진천문의 완세검(緩世劍) 육진령이시다!”

줄을 선 군중에서 누군가 노인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그 별호에 일석이 흠칫했다.

진천문의 작은 소문파의 주인이자 검으로서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검사.

화산의 속가제자 출신으로, 화산에 찾아가면 오히려 귀빈 대접을 받는다는 유명한 이였다.

‘완세검 육진령? 저자가 대체 왜?’

하나 완세검이란 걸물이 떴으니, 가만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연화루를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허허, 내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 하남성에 들렸다가 유명한 청루가 있다기에 와 봤네. 혹여 새벽이 더 깊어지기 전엔 들어갈 수 있겠는가?”

육진령이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묻자, 일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찝찝했지만, 정파의 유명한 인물이니 무슨 일 있겠는가.

‘참. 나 같은 흑도 놈이 정파라고 하니 오히려 안심하다니.’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혈사문이란 사교 단체를 조심하라는 것.

아무리 봐도 신선처럼 생긴 이 완세검이 혈사문과 관련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면, 대접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대협.”

“그래도 되겠는가?”

“물론이지요. 연화루를 찾아 주셔서 더없는 영광입니다.”

일석은 직접 육진령을 안내했다.

복도를 걸으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놓던 육진령의 말에 대충 맞장구치던 일석은, 순간 들려온 이름에 흠칫했다.

“혹시, 청성표국의 허성이란 자를 아는가?”

“허성…… 표사 말입니까?”

“그러네.”

“어찌 완세검 대협께서 일개 표사를 찾으시는지…….”

“나 역시도 화산의 속가문인 진천문 출신이고, 듣자하니 청성표국의 허성이란 자도 속가문 태량검문의 제자라고 들었네. 하니 인사라도 나누며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고 전해 주게.”

일석이 허성을 모를 리가 없다.

그 괴물같이 무섭던 애송이를 늘 곁에서 호위하는 표사가 아니던가.

일석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때마침 위에는 허성이 와서 능허의 방에 같이 있었으니까.

방에 들어가 조용히 앉은 채 기다리던 육진량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고, 제법 늠름한 표정의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를 본 육진량의 얼굴에 살짝 놀란 기색이 비쳤다.

‘일류 초입이라 들었건만, 능히 절정에 이른 것 같이 보이는데?’

순간 그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구진해를 죽이긴 부족하다. 물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미욱한 후배가 강호의 선배이신 육진량 대협을 뵙습니다. 청성표국의 표사, 허성입니다.”

허성이 포권을 취하는 순간.

육진량의 전신에서 강렬한 기운이 쏘아졌다. 아니, 쏘아 보내려고 했다.

단순에 허성을 압박해 진실을 캐내려 했던 것.

하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쏟아내려던 기세를 갈무리하여 급히 집어삼켰다.

“……!”

저벅.

나직한 발걸음 소리.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인 허성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걸음에 순간 육진량의 가슴이 요동쳤다.

저벅.

두 번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올 땐 단전이 뒤끓었다.

그가 숨겨져 온 사기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상극이다!’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새하얀 눈썹 아래 드러난 눈동자가 거세게 진동했다.

자신의 내공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마치 피를 토하듯이. 만나서는 안 될 걸 만난 것처럼.

눈앞의 허성이?

아니다.

허성의 등 뒤로 들려오는 발걸음의 주인.

낮지만, 그러나 단호한 듯한 어조가 육진량의 귀에 꽂히는 순간, 그의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었다.

“정파 무인치고는, 구린내를 폴폴 풍기는데?”

천무백의 새하얀 웃음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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