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9화>
19. 참 쉽다, 그치 응?
원래 모든 사람은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지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허성도 그랬다.
“어처구니가 없네.”
귓가에 꽂히는 목소리에 허성의 몸이 얼어붙었다.
목소리에는 놀랄 정도로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단언컨대 처음 듣는 천무백의 싸늘한 어조였다.
허성은 감히 조아린 고개를 들어 천무백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다. 두려웠다. 저 싸늘한 목소리의 표정이 어떠할지.
물론 따뜻하게 ‘그래! 내가 도와주겠소!’ 이런 건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혐오감?’
부르르!
그건 분명 혐오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바뀌기 전에는 늘 사람을 끌어들이는 미소를 짓던 도련님이고, 열병을 앓은 후에도 그 매력은 변치 않았다.
다소 퉁명스럽고 거칠어진 면은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자상함과 배려는 충분히 느껴졌다. 아니 그랬다면 연화루의 모든 사람을 일일이 다 치료해 줬겠는가.
하물며 몸종인 점박이의 장애마저 치료해 줬는데.
그런 사람이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검을 잡은 지 몇 년 됐어? 딱 보니까 20년은 됐지? 한 21년.”
“……25년입니다.”
“이야. 그럼 10살 때부터 잡은 거야? 근데 그 꼬락서니야?”
“……!”
“내가 보기엔 너 20년은 검을 잡은 것처럼 보여. 그 말이 뭔지 알아? 5년은 놀았다는 거요. 허표사. 응?”
천무백은 거침없이 폭언을 쏟아부었다.
본래 허성에게는 나름 하오체를 쓰며 존중하던 천무백이었건만,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데도 허성은 꼼짝할 수 없었다.
천무백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쿡쿡 찔렀다.
물론 5년 내리 검을 놓은 건 아니다.
솔직히 허성에겐 억울한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25년간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이것이 직업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5년은 족히 논 것 같다는 말에 반박할 마음이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마치 폐부를 들여다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허성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나는 정말 25년간 미친 듯이 노력했던가?’
스스로 반문하고 답을 구하자면, 아니었다.
‘벽에 막혔다. 그 벽을 넘기 위해서 난 최선을 다했나?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지. 검을 놓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처럼 치열하게 검을 쓰진 않았어.’
아랫배가 뒤집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랬다. 자신은 노력하지 않았다. 아니, 나름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치열하진 않았다.
천무백은 단지 한번 보는 것만으로 그 모든 걸 꿰뚫어 봤다.
순간 소름이 쫙 올라왔다.
그는 간신히 힘을 쥐어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턱을 바짝 당긴 채 냉혹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천무백의 시선.
몸이 짜르르하고 울리는 느낌이었다.
“대충 노력하다 벽에 막히니, 쉬엄쉬엄 놀 건 다 놀면서 한탄하다가, 그간 방탕했던 건 생각지도 않고 기회가 보이니 무릎을 꿇고 감히 구걸해?”
천무백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천무백의 눈이 번쩍였다.
“너는 무인으로서 길이, 검을 잡는 것이, 그저 구걸로만 해결되는 일인 줄 알았더냐?”
허성의 몸이 덜덜 떨렸다.
지금만큼은 그가 알던 막내 도련님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속가제자로 화산에서 수학할 때 격한 호통을 치던 장로들보다도 더 거대한 울림이었다.
하나, 그만큼 억울한 것도 있었다.
순간 울컥 치미는 감정을 그대로 토했다.
“무려 20년입니다! 20년 동안 게을렀을지언정, 단 한 번도 검을 놓은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휘둘렀고,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초식을 늘 되뇌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도련님이 조언해 줬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제가 배운 모든 게, 제 20년간 검을 잡았던 모든 것이!”
“달랐다는 게 초식이란 얘기냐?”
대꾸하는 천무백의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졌다.
허성은 얼얼한 기분이었다.
마치 무서운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다 안쓰러운 마음에 누그러지는 목소리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허성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질끈 깨물고 소리쳤다.
“화산에서 배웠고, 손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날 정도로 휘둘렀던 초식입니다. 그 모든 초식이, 도련님이 그저 전음으로 했던 것보다 현저하게 위력이 부족했지요. 20년 배운 모든 게 잘못됐다고 생각된 순간, 어떤 감정이 들었겠습니까!”
“누가 잘못됐대?”
천무백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처음엔 그저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이제는 안타까움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초식만 제대로 배우면 벽을 깨고 성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구나.”
“…….”
“참 쉽다. 쉬워. 그치, 응? 더 제대로 된 초식만 익히면 벽을 넘을 수 있다면.”
천무백이 한숨을 내쉬곤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직도 초식에 한계를 두고 있네.”
“……!”
허성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야, 이거 봐봐.”
그때였다.
천무백이 옆에 있던 목검을 하나 들더니 별안간 검을 쭉 휘둘렀다.
허성의 눈이 번뜩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천무백이 무언가 보여 주려고 한다.
천무백은 검을 몇 번이고 휘둘렀다.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아래, 아래에서 다시 앞으로.
허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무얼 하는 건가?
초식도 없다. 그냥 무작정 휘두르고 있는 검이다. 마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저 어린아이가 멋져 보이려고 검을 무작정 휘두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잘 봤냐?”
“네?”
천무백이 뚱한 얼굴로 봤다.
“이게 양오검이다.”
“그 무슨?”
허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든 말든, 천무백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에이. 오늘 종쳤네. 난 들어가서 대금이나 불련다. 들어가쇼, 허 표사.”
허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검 몇 번 막무가내로 휘둘러놓고 양오검이라니?
물론 화산의 매화검을 생각하면 양오검은 분명 격이 낮다.
그러나 화산 개파 시절부터 내려져 온 고명한 무공이다.
대성하면 능히 무인으로서 한몫을 할 위인이 된다. 화산의 속자제자들이 강한 이유가 바로 양오검 덕이 아니던가.
한데…… 양오검을 아무리 무시해도 그러지.
“대체 저게 무슨 양오…… 어?”
허성의 눈빛에 지진이 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댔다.
“……매화 향?”
은은하면서도 넓게 퍼져나가는 매화향.
그건 자신이 연화루에서 흩날렸던 향과는 달랐다.
더 고매했고, 우아했으며, 깊었다.
마치 매화로 이뤄진 정원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감상이다.
허성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
휘청이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수련장에는 수련용으로 만들어 놓은 나무기둥이 몇 개 세워져 있었다.
바로 전에까지는 말이다.
한데 지금은 모두 잘려져 있었다. 그것도 깔끔한 단면으로.
하물며 잘린 단면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매화향.
허성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시선이 천무백이 향한 방으로 닿았다.
바닥에는 발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마치 늙은 호랑이가 마지막 사냥을 위해 비장한 모습으로 뛰쳐나간 것처럼.
그러한 기세가 느껴졌다.
“노호출림…….”
그저 평범한 발걸음이었건만, 흔적은 노호출림이다.
양오검도, 노호출림도.
그가 알던 초식도, 보법도 아니었다. 그냥 검을 휘둘렀고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초식에 한계를 두고 있다고?’
순간 벼락이 내리꽂듯 강렬한 충격이 정수리에서부터 항문까지 관통했다.
허성은 그 자리에서 홀린 듯이 검을 꺼냈다.
그리고 움직임 하나, 하나에 집중하면서 검을 휘두르고 동시에 노호출림을 밟았다.
모든 걸 쏟아부으면서. 단전의 내력이 바짝 마를 때까지. 온몸의 근력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허성이 조그마한 깨달음 일부를 엿봤다면, 천무백도 의외의 상황을 맞이했다.
‘화산의 무공에 경천혼공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천무백이 급히 방안으로 들어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원래라면 정해진 수련 순서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게 천무백이다.
한데 그 규율을 깨고 방안으로 들어올 만큼,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천무백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매화…….”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양오검은 분명 훌륭한 무공이다. 화산파 개파 때부터 내려져 오는 유구한 검법이 아니던가.
그건 천무백이 아주 잘 알았다. 그의 전생 중, 같이 검을 익히던 친우 녀석이 창안한 무공이었으니까.
다만 양오검은 다른 화산의 진결무공과 달리 제법 알려져 있었다.
화산의 속가제자들이 주로 쓰는 검법이라 그렇다.
매화검에 비해선 손색이 있다.
그 대표적인 차이가 바로 이 매화였다.
천무백의 손에 피어난 기(氣)로 이뤄진 매화.
본래 양오검으로는 매화를 피워내지 못한다.
매화를 피워내는 건 매화검뿐이다. 양오검은 극성으로 익히고 무공의 요체를 깨달아도 매화향을 내는 것이 한계다.
한데…….
“경천혼공의 내력이 매화를 피워 냈다.”
천무백의 눈이 반짝였다.
상단전은 분명 영력과 관계있었다. 상단전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무림인들보단, 본래 도사, 무당 등이 대다수였다.
비록 지금 화산은 순전히 무(武)에 뜻을 뒀지만, 원래는 도를 익히던 단순한 도문이 아니었던가.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하긴. 그 녀석도 원래는 도인이었으니까.”
양오검을 창안했던 친우를 떠올리며 천무백은 머릿속을 다시 한번 더듬었다.
“도가계열 내공의 요결을 파악해서 경천혼공과 관계시켜본다면?”
새로운 생각이 번뜩였다.
제아무리 비범한 인물이더라도 감히 떠오르지 못할 생각이었다.
설령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그걸 실현한 지식이 문제였다.
도가계열의 문파가 어디겠는가?
화산과 진전교, 그리고 무당이 아닌가.
한데 경천혼공은 천무백이 자평하길, 자신의 무수한 전생 중 단연 압도적이라고 생각할 정도가 아닌가.
그런 경천혼공과 함께 어울릴 내공심법이라면, 적어도 화산, 전진, 무당의 핵심이어야만 한다.
제아무리 비범하더라도, 강호중원에서 수백 년간 구대문파의 수위를 자처하는 그들의 내공십법을 어찌 구하는가?
‘이미 있으면 되지 뭐.’
만일 누군가 천무백의 머릿속을 열어 확인할 수 있다면, 그자는 진정 이렇게 외칠 것이다.
“세상 모든 무공이 담겨 있는 장보도다!”
물론 그건 어느 정도 과장된 말일지도 모른다.
하나 실제로 천무백의 무수한 기억은 어마어마한 무공의 비고였다.
‘건원청심법? 이것도 나쁘진 않지. 육양신공, 태극신공, 무당 쪽 내공도 좋아. 다만 이것들은 양기가 좀 강한 편인데 말이지. 아니면 진전교 쪽 무공을 좀 볼까?’
구대문파의 무공을 대수롭지 않게 떠오르는 천무백을 보면 누군가는 불공평하다고 하소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무백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모든 무공을 훔친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무당에서도 있어 봤고, 화산에도 있어 봤고, 진전교는…… 뭐 걔들 망할 때 후손들 구해 줘서 보답받은 건데 뭐.’
무수한 전생. 천무백이 직접 정당하게 구한 것들이니까.
그렇게 많은 무공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천무백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익히고 있는 경천혼공에 다른 내공심법을 곁들이는 건 단순히 무공의 결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전혀 새로운 무공의 창안.
이미 무공을 창안할 수 있는 대종사의 지식과 경험, 경지를 아득히 벗어난 천무백이기에, 이 강호중원에서 오직 그만이 가능한 시도였다.
오히려 천무백은 가슴이 뛰었다.
실패한다는 두려움?
애당초 그딴 건 없었다.
분석과 분석, 거기에 경험과 방대한 지식이 합쳐졌다.
이미 실패할 확률을 최대한 줄이고 또 줄여서, 천무백은 드디어 답을 떠올렸다.
그는 별안간 소리쳤다.
“점박아! 그 누구도, 내가 나올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설령 누님이 찾아와도! 절대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상황.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자,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