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8화>
18. 도와주십시오!
천무백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상단전이 서서히 열리더니 내공이 잔잔히 흘렀다.
상단전 한쪽에서 묵직함이 느껴졌다.
그간 제법 내공이 쌓였다.
시간이 갈수록 경천혼공의 축기는 더 빠르고 발전됐다.
경천혼공을 끊임없이 운용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하나씩 고쳐나가면서.
오히려 천무백은 경천혼공을 완전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상단전이란 참 신비하군.’
무수한 전생에 경험과 기억이 있지만, 상단전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게 많다.
하단전이야 천무백이 스스로 깨달은 것뿐만 아니라, 무림 태동기부터 가장 많이 연구되고 쓰이는 것이니 여러모로 활용방법 등이 잘 알려졌다.
상단전은 다르다.
애당초 상단전을 이용하는 무인은 시대마다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천무백의 기억 속에서도 상단전을 활용했던 고수는 얼마 없었다.
그래서 천무백이 상단전을 활용한 내공심법을 개발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료가 거의 부족하니까. 천하의 천무백이어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상단전을 활용하는 이들은 무림인이 아닌 삶을 살았다. 가령 무당이나 도사나, 각종 영력을 느끼는 존재들 말이다.
그만큼 상단전은 영적인 힘과 관련이 있었는데, 천무백은 그 효능에 내심 감탄했다.
‘상단전을 이용한 경천혼공은, 단지 육신의 정비뿐 아니라 정신의 정비에도 큰 효능이 있다.’
타고난 감각을 소유한 천무백은 알 수 있었다.
육체는 매번 환생하면서 새로운 육을 가지게 된다.
하나 천무백의 영(靈)은 다르다.
육신은 바뀌어도 천무백의 영혼은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를 못했다.
무수한 전생을 살면서 영혼에 쌓인 탁기와 피로는 알게 모르게 엄청났다. 분명 티가 나지 않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무수한 삶 동안 천무백의 영혼도 숱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제아무리 강대한 정신력을 지닌 천무백이라도 한들, 수백 년 넘게 지속하는 지독한 윤회에서 멀쩡할 수는 없다.
매번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으니까.
아니, 천무백이니까 그나마 버틴 것이다. 하나 그런 천무백도 서서히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영에 새겨진 피로가 서서히 천무백의 정신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저번 삶부터 그걸 느꼈고, 천무백은 지금 새로운 답을 찾았다.
‘또 다른 의미로 새로 태어나는 것 같군.’
상단전을 이용한 경천혼공을 운용하면서 비단 육신뿐 아니라 영에 새겨진 탁기와 온갖 이물질들이 모두 씻겨졌다.
영이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관의 확장이었다.
천무백은 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고, 더욱더 분석할 수 있었으며, 더 멀리 보고, 예민하게 느끼고, 맡고, 모든 걸 들을 수 있었다.
‘감각이 날카롭다. 이것이 정말 좋군.’
무인에게 있어 감각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다. 천무백은 직전에 창천검신이라 불리며 입지적인 위치에 올랐던 인물인 만큼, 오감의 발달은 대단했다.
한데 지금 천무백의 어린 육신은 그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웬만한 고수들보다 더한 오감을 자랑했다.
아니, 이건 어쩌면 오감을 넘어 육감이라고 표현할 만했다.
감각의 예민함과 동시에 두뇌의 연산 속도는 더없이 빨라졌다.
마치 대장간에서 끊임없이 칼을 때리고 갈아서 더 날카롭게 만드는 것처럼 단순히 예민하다 못해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오감과 더욱 또렷해진 정신력과 집중력,
무인들의 생사결에서 중요한 요소는 수없이 많다.
내공의 힘, 정순도, 파괴력, 무공의 효능, 초식의 연계, 무공이 상관관계, 수없이 쌓아온 경험에서 나오는 임기응변, 대처까지…….
한데 그 모든 걸 살피면, 결국 도저히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과 집중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압도적인 실력 차가 아니라 서로 비슷한 힘의 상대라면, 그 약간의 정신력 차이가 서로의 생사를 바꾸기 마련이다.
또, 그런 생사결에서 깨달음의 끝자락을 잡아내는 것도 집중력이리라.
이쯤 되면 사람이 들뜰 만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세상 그 어떤 내공심법보다 더 정순한 내공을 쌓을 천고의 심법부터. 상단전의 조화까지.
하나 천무백은 단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며 성취도에 일희일비하는 건 천무백의 오래된 경험을 떠올리며 어불성설이다.
천천히, 하지만 아주 능숙하게.
천무백은 검극이란 목표 아래 끊임없이, 빠르진 않지만 무너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전진했다.
* * *
천유하는 장노가 천문경과 떠나면서 걱정 하나가 생겼다.
‘무백이가 과연 장 할아버님이 가셨는데도 열심히 할까?’
천무백의 변화는 분명 놀라웠다.
외관의 변화뿐 아니라 그가 보이는 태도와 생활방식까지.
하나 천유하로서는 그게 모두 장노의 지도가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청성표국 표사들의 수련을 책임지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천무백이 저렇게 변한 거라고 여겼다.
그러니 장노가 자리를 비우면, 천무백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했던 게 그녀의 걱정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소, 허 표사.”
천무백은 마치 기계처럼 움직였다.
수련과 식사, 악기 연주를 늘 같은 시각, 단 조금의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이어 갔다.
그럴수록 천무백의 외견은 두드러지게 변했다.
어느새 16세 허약한 애송이에서, 이젠 제법 건강해 보이는 훤칠한 청년이 되었다.
허리가 곧게 펴지고, 키가 커졌으며 어깨가 넓어졌다. 옷의 윤곽에서 점점 드러나는 탄탄한 체격은 표국의 하녀들이 흘깃거리며 얼굴을 붉힐 정도였으니 오죽하랴.
“옛날 서 부인이 정말 엄청난 미인이시더라니.”
“부국주님도 아름다우신데, 도련님도 그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으셨구만!”
표국에서 일한 지 오래된 쟁자수와 표사들이 그런 얘기를 나눌 정도로 천무백은 분명 변화했다.
그런 천무백의 변화를 모두 놀라워했지만, 그에 따른 의문이 있는 건 당연지사.
“뭐가 계기가 됐을까?”
열병을 앓고 나서 철이 들었다.
……라는 게 일반적인 얘기지만, 솔직히 그 말을 다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단순히 철이 들었다고 보기엔 천무백의 치열한 노력은 표사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하여 몇몇 이들은 조금 짓궂은 생각을 했다.
“보통 남자가 운동하고, 근육 단련하고, 원래 안하는 짓을 하면서 확 변하면 답은 하나지.”
“연모하는 여자가 생겼다거나.”
“그렇지.”
“더구나 도련님 나이가 딱 첫사랑에 가슴 아플 나이잖냐.”
“근데 표국 밖에 안 나가는 도련님인데. 반할 여자가 있나?”
그런 소문이 쟁자수들부터 시작해서 시종들, 그리고 표사들까지 암암리에 퍼졌다.
원래 천무백은 표국 사람들에게 소중한 막내 도련님이었으니까. 모두가 다 자신의 동생처럼 각별하게 생각했던 천무백이었으니 소문은 더 빠르게 퍼졌다.
여종들은 괜히 자신이 소문의 주인공일까 싶어 천무백의 수련장과 방을 기웃거리는 일이 빈번해졌다.
특히 수련장에서 천무백을 본 여종들은 점차 밤잠을 설치는 일이 많아졌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분명 잘생긴 도련님이었지만, 그땐 여종들의 감정은 그저 어리고 잘생긴 철부지 남동생처럼 여겼다.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깨끗한 무복을 입어도 몸을 쓰는 수련이다 보니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어 윤곽이 드러나는 건 예사였다.
옷 너머로 드러나는 윤곽은 어린 남동생이 아니라 남자로 느껴졌으니까.
“오늘은 내가 물 갖다 주는 날이지?”
“어머, 얘 봐라. 어제 새 의복 갖다 줘 놓고 오늘도 네가 가겠다고?”
“흥. 네가 가는 것보단 내가 심부름 하는 걸 도련님은 좋아하실 걸?”
“어쭈!”
수련장 한쪽에서 떠들던 여종들은 순간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장노 대신 천무백의 수련을 담당하게 된 허성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막내 도련님보단 더 대하기 어려운 게 청월단의 단주인 허성이었다. 여종들은 경을 칠까 싶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나 예상외로 허성은 그녀들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수련장으로 향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여종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마치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오로지 정면만 바라보며 직진했으니까.
그리고 정면에는 이미 먼저 수련을 하고 있는 천무백이 있었다.
* * *
“도련님.”
“아, 오늘은 좀 빨리 왔군. 뭐 천천히 와도 상관없소.”
천무백은 허성을 보고도 별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이미 연화루에서 본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 줬고, 천무백을 삼재검성의 후인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고 있는 허성이니, 천무백은 장노 앞에서처럼 굳이 실력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천무백은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 최선의 수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허성은 그동안 옆에서 개인 수련을 하거나, 최근에는 넋놓고 그저 천무백을 바라봤다.
한데 오늘은 달랐다.
허성의 얼굴에는 무언가 결의가 느껴졌다. 예민한 천무백은 그 변화를 단번에 눈치챘다.
“무슨 일 있소? 뭐 연화루에 혈사문 놈들이 다시 왔다거나?”
하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짜고짜 허성이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도련님,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또 뭐야 이건.”
“일전에 연화루에서 혈사문의 구진해와 싸웠을 때, 제게 해 주셨던 조언들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허성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간절했다.
처음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하던 천무백의 표정이 차츰 알 만하다는 듯이 변했다.
“제가 알던 노호출림도, 양오검도 아니었습니다. 분명 아니었습니다. 수년간 익히고 또 익혀 온 초식을 벗어난 움직임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오히려 조언대로 움직일 때, 초식이 더 강력해지고, 위력적이었습니다. 그간 수없이 벽에 막혔고 좌절했습니다. 강호에 출도해 위대한 협객이 되고자 했던 마음은 어느새 무너져, 이제는 표사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표사도 괜찮은 직업이야, 허 표사.”
그래도 표국의 막내아들인데, 그 앞에서 표사로 사는 삶을 후회하는 어조로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천무백은 떨떠름했다
하나 허성이 말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눈치챘다.
“머릿속이 혼란스럽습니다. 그간 익혀 온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기분입니다. 스승으로 배운 것 모두가 부정당했는데, 오히려 이게 더 맞는 길인 거 같아서 혼란스럽습니다!”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끓는 허성의 내기가 느껴질 정도로 허성은 혼란스러워했다.
“심마로군.”
저 지긋지긋한 심마만 없으면 나도 진즉에 검극에 닿았을 텐데 말이지.
천무백의 생각대로, 허성은 지독한 심마에 빠졌다.
모든 무인이라면 한번쯤은 부딪치는 심마.
허성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듯이 숙이며 간절히 외쳤다.
“부디, 부디 도와주십시오, 도련님!”
조아린 허성의 뒤통수에 천무백의 묘한 눈빛이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