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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17화 (17/318)

<검신재생 17화>

17. 뭐, 밥값은 되겠지

‘여길 떠야겠어.’

유설은 연화루를 떠날 생각을 최근 가졌다.

이제 갓 청초한 방년의 나이였지만, 유설은 연화루에서 1년의 세월을 보냈다.

사실 지난겨울부터 그녀는 연화루를 벗어날 생각을 심중에 품었다.

본래 연화루는 푸른 등을 걸어놓은 청루(靑樓)였다. 청루는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재주와 미소를 파는 곳.

유설은 그중에서도 현을 잘 다루기로 유명한 예기(藝妓)였다.

한데 겨울부터 연화루가 달라졌다.

기존 연화루주는 실종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마치 강시처럼 생겼던 신임루주가 들어왔고, 누가 봐도 험한 얼굴의 흑도패들이 대거 들어왔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은 어디선가 창기들을 상당히 들여보냈고, 연화루 문 앞에 붉은 등을 달았다.

매춘하겠다는 홍루(紅樓)로 변모했다.

물론 유설은 아직 웃음은 팔았을지언정, 몸을 판 적은 없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압박이 거세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어.’

유설은 복도를 거닐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희미한 핏자국을 보고 몸서리쳤다.

어제저녁부터 일이 이상해졌다.

시체 같던 루주는 갑자기 또 실종되고, 이번엔 유명한 흑도 건달이었던 총관 능허가 루주가 됐다는 게 아닌가.

‘없어진 사람이 너무 많아.’

특히 왠지 모르게 음침하기 짝이 없던 기둥서방들 모두 사라졌다. 남은 기둥서방들은 험상궂긴 해도, 음침한 느낌은 없는 건달들이었다.

유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죽은 거야!’

대체 이 연화루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오늘도 갑자기 기녀들을 모두 방안에 들여 보내놓곤, 밖에선 비명과 괴성만 들려왔다.

기녀들 모두 서로 껴안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유설뿐만 아니라 본래 예기였던 이들은 하나같이 같은 마음을 품었다.

‘어떻게든 연화루를 벗어난다!’

기적을 옳기는 게 쉽지는 않지만,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나 그러기도 전에 능허가 최상층 방으로 불렀다.

듣기론 최상층에 손님이 하나 있다고 했으니, 유설은 왠지 모르게 섬찟했다.

“왜 이렇게 굼떠? 빨리빨리 안 와?!”

최상층에 올라가니 능허가 예의 애꾸눈을 부라렸다.

온갖 짜증이 묻어나는 어조.

유설은 자라목이 되어 움츠렸다. 기세 좋게 일 그만두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능허의 살벌한 눈을 보니 말이 목에서 턱턱 막혔다.

“뭐 해? 당장 안 들어가?”

“저…… 저, 무슨 일인가요?”

겨우 용기를 쥐어짜 물었다. 능허는 짜증을 내려다 떨리는 목소리에 잔뜩 겁먹는 눈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안 잡아먹는다. 안 잡아먹어. 안에 늑대 새끼보다 더 흉악한 개새끼가 있긴 한데…….”

“다 들린다, 능허야. 내가 네놈 관상을 다시 보니 개한테 물려 목이 뜯겨 죽을 팔자더구나!”

“……썅.”

방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목소리에 능허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는 ‘귀는 존나게 밝아요.’ 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설은 능허의 그런 모습을 처음 봤다.

전 시체 같던 루주 앞에서도 할 말은 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바로 꼬리를 만 것이다.

‘목소리는 되게 어려 보이는데.’

대체 안에 누구지?

유설의 얼굴에 살짝 호기심이 떠올랐다.

“뭐, 하여튼 의원이다. 의원. 다 너희 치료해 주러 온 거니까. 들어가서 치료받아.”

“치료요? 전 아픈 게 없는데……”

“아 썅! 걍 들어가서 받으라면 받아! 똑같은 말 여러 번 하기 귀찮다!”

능허가 다시 눈을 부라렸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되는 상황. 목이 아팠다.

유설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최상층의 방은 연화루에서 가장 넓었다.

넓은 방에 딱 한 사람만 들어서 있으니 분명 텅 빈 느낌이 들어야 했다.

한데 그러지 않았다.

유설은 병풍 앞에 앉아 있는 천무백을 바라봤다.

피곤한 기색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 하나 눈에 띄는 피로가 천무백의 외모를 가리진 못했다.

세상 모든 게 귀찮은 듯한 눈빛이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감히 접근하기도 힘든 그런 류의 분위기였다.

유설이 땅에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자 천무백이 살짝 귀찮은 어조로 말했다.

“뭐 해? 이리와.”

“네? 네.”

유설은 쭈뼛거리며 천무백의 앞에 앉았다. 술상을 두고 마주 앉은 게 아니라, 그냥 서로 보고 앉았다. 한데 천무백의 옆에 호리병이 하나 있었다. 알싸한 주향이 올라오는 걸 보니 술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비단금침이 깔린 게 아닌가.

‘난 창기가 아닌데……!’

유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누워.”

“네?”

“말 두 번 하게 하지 말자. 응?”

“네, 네.”

유설은 정자세로 누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 천무백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에휴. 뒤집어서 누워. 엎드려서 누우라고.”

“…….”

스륵.

“……!”

유설이 몸을 뒤집자 천무백이 곧장 옷을 허리춤까지 접어 올렸다.

새하얀 허리를 난생처음 외간남자에게 보인 유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저는 예, 예기인, 인데요.”

“뭐? 하!”

유설이 울먹거리자 천무백은 탄식을 터뜨렸다.

“능허 이 새끼 좀 족쳐야겠네. 도대체 설명을 어떻게 하는 거야? 치료하려는 거다, 아가야.”

“아가요?”

유설이 그 낯선 호칭에 고개를 휙 돌리자, 불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은침이 보였다.

“어…… 진짜 의원이세요?”

“의원? 그래, 그래. 의원이야. 정기검진이니까 조용히 받고 가자, 아가야. 응?”

“네, 네.”

유설은 무안한 기색으로 다시 고개를 바닥에 박았다.

천무백의 손이 닿자 순간 유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나 이어 따뜻한 기운이 허리를 타고 온몸에 퍼졌다.

그제야 유설은 모든 긴장이 풀리고 몸이 편안해졌다.

천무백은 몇 번 허리를 톡톡 두들기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어린 애가 온갖 병은 다 갖고 있네. 허리도 살짝 뒤틀렸고, 장도 안 좋고. 너 아침에 일보는 것도 힘들지?”

“네?”

“변비잖아.”

“……!”

유설은 새빨개진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부끄러운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천무백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침을 놓았다.

순식간이었다.

거침없이 시침을 마친 천무백이 말했다.

“다 끝났다. 일어나.”

“벌써요?”

“오냐. 그리고 이거 한잔해.”

“술이요?”

“약주다. 시침해서 독기를 한데 모았고, 그걸 마시면 나중에 다 소변으로 배출될 거야.”

“네.”

“그리고 아침에 뒷간 가는 게 즐거워질 거다. 가 봐라.”

유설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이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나오자 세상 모든 짜증이 담긴 듯한 얼굴의 능허가 있었다.

“의원 맞지? 용하더냐?”

“네? 어…… 그러고 보니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안색도 확 좋아졌는데. 하. 은근 자상한 구석이 있네, 저 양반.”

“안색이요?”

“뭐라 표현하기 힘든데 확 밝아졌네. 아무튼, 들어가고 다음 소향 올라오라고 전해라.”

“네.”

왠지 모르게 들뜨는 마음에 유설은 내려가다 말고 멈춰 섰다.

“저…… 혹시 안에 의원분 누구인가요? 의원이라기엔 너무 어려 보이던데.”

“청성표국의 개새…… 아니 청성표국의 막내아들이시다.”

“아!”

들어는 봤다.

타고난 미공자라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밖에 나오는 일이 없어 소문만 듣고 얼굴은 보지 않았던 터.

그래서 미공자란 소문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곰보 얼굴에 다리 저는 병신이 아니냐라는 쓸데없는 얘기가 기녀들 사이에서 돌았었다.

한데…….

‘소문이 진짜였구나.’

유설은 왠지 모르게 붉어지는 얼굴을 푹 숙인 채 급히 내려갔다.

* * *

“제가 없는 동안 허 단주가 도련님의 수련을 도와드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장 표두님.”

장노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여러 얘기가 있습니다만, 적어도 도련님은 제가 본 수련생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입니다. 재능이며, 그 치열한 노력까지. 하니 끝까지 정진하십시오. 하면 모를 일이지요. 저 천마를 패퇴시킨 창천검신보다 더 위대한 무인이 될지.”

“……그러면 좋겠네요.”

천무백이 잠시 뜸들이다가 이내 씩 웃었다.

장노는 그 웃음을 뒤로하고 말에 탄 표사들을 바라봤다.

시간이 급한 일이니, 국주인 천문경마저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있었다.

“국주님, 총표두 장청 외 비룡단 표사 38인 준비 완료됐습니다. 출발하시겠습니까?”

“흐음.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장 표두.”

천문경은 말에서 내려 다시 표국의 정문 앞으로 다가왔다.

정문 앞에 있던 천유하가 걱정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아버지, 아니 국주님.”

“유하야.”

“네.”

“아빠가 좀 안아 보자.”

“…….”

사이좋은 부녀지간이었지만, 표국 사람들 앞에선 공과 사를 지키던 천문경이었다. 그런 천문경도 이번 일을 앞두곤 긴장되는 표정이었다. 천유하는 피식 웃으며 안겼다.

“내가 없는 동안 표국 운영을 잘 부탁하마.”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요즘 일도 없는데요, 뭘.”

“하하. 그래. 그리고…… 우리 막내아들!”

“음.”

천문경은 천무백을 품에 안고 깜짝 놀랐다.

요즘 안색이 좋아졌고 뭔가 늠름해진 느낌이었는데, 안아 보니 예전과 달리 아주 듬직해지지 않았는가.

그 어린아이가 말이다.

“아비 없는 동안 누님을 잘 지켜다오, 아들아.”

조금 어색한 표정의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이거 챙겨가세요.”

“응?”

천무백이 건넨 건 환약이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진 의원과 얘기해 몸에 좋은 약재를 섞어 많은 환약입니다. 어떤 병이라도 물리칠 효능이 있으니, 혹 긴 여정 중에 병이 나시면 이 약을 복용하세요.”

“무백아……!”

천문경이 감격에 젖은 얼굴로 다시 천무백을 꽉 끌어안았다.

그 강렬한 애정표현에 천무백은 어색해하면서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내가 저 나이 땐 과묵했는데 말이야.’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긴 하네.

천문경은 한참이나 천무백을 안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대부분 걱정이었다. 결국, 시간이 지체되자 천유하가 나섰다.

“국주님, 이제 출발하셔야겠는데요?”

“어? 으흠흠. 알겠다. 다녀오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장 표두, 출발합시다!”

이로써 표국 인원의 절반이 빠져나갔다.

실패한 표행에 이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라, 천문경이 직접 나서는 조사.

천무백은 웬만해선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나, 급한 건 하남에 있는 혈사문이었으니 천문경을 믿었다.

아니, 정확히는.

‘장노지.’

장노의 숨겨진 무위는 절정급.

특히 숨겨진 마공을 전부 드러낸다면, 저번에 부딪혔던 혈사문의 구진해도 상대가 안 되리라.

“허 표사, 수련하러 갑시다.”

“네? 아, 알겠습니다.”

깊은 상념에 빠졌던 허성이 급히 달려왔다.

하나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그가 정신 줄이 딴 데 팔렸다는 걸 의미했다.

천무백이 미간을 좁혔다.

뭐, 사실 상관없다.

허성이 겉으로만 스승이지, 실제로는 천무백이 알아서 스스로 수련하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 연화루에 가서 능허에게 몇 가지 얘기 좀 전달하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연화루가 원래 청루였다면서? 그러면 다시 청루로 바꾸기로 합시다. 허 표사하고 표사들에게 좀 아쉬운 일일 텐데 말이지만.”

“음, 굳이 바꾸시는 이유가 혹 있으신지요? 사실 연화루 정도 되는 거대한 기루면, 창기와 예기가 본래 같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청성표국에서 운영하는 기루가 홍루라고 하면 내 면목이 없잖소.”

“네? 운영이요?”

“어차피 시간 지나면 차츰 내가 연화루의 주인이란 게 알려질 게 뻔한데. 이왕이면 표국에서 운영하는 게 낫지 않소. 안 그래도 표국이 요즘 재정이 힘들다던데.”

천무백은 조금은 피곤한 기색으로 집무실에 들어가는 천유하를 바라봤다.

일전의 표행 실패로 거의 모든 표행이 줄줄이 취소되고, 심지어 역병이 돌면서 봉쇄령까지 내려지니, 청성표국은 표행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

표국이 표행을 하지 않는다?

하면 재정적으로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연화루 정도면, 뭐 내 밥값 정돈하겠지.”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그가 수없이 전생을 살아오며 느낀 게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주어진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로지 무학에만 매달려 주위의 모든 환경을 외면한다면.

“무학의 끝, 검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더군. 참 재밌는 일 아닌가. 생사결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일상생활을 지키고 영위하는 것이 검의 끝에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란 게 말이지. 참 이래서 검이란 게 아직도 어렵구나.”

허성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뜻 모를 말이긴 했으나, 그 안에 느껴지는 쓸쓸함의 크기가 너무나 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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