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6화>
16. 너희 뒤에 누구 있어?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구진해의 양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이지 않았다!’
구진해는 바닥에 구르는 교량의 몸 잃은 머리를 바라봤다.
여전히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의문이 깃든 표정이 역력했다.
분명 교량의 손아귀에 잡힌 상황이었거늘. 어느새 검을 뽑고, 몸을 돌려 머리를 베었단 말인가.
등 뒤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구진해의 시선이 천무백에게 닿았다.
‘그저 애송이였건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놈이다. 모두가 허성을 가리켰다. 역시 상대해 본 결과 겉보기와 달리 허성의 실력은 엄청났다. 내력은 분명 자신보다 한참 아래지만, 검을 쓰는 것과 임기응변이 남달랐다.
한데 뒤에 있던 저 존재감 없던, 그저 부잣집 철부지로 보이던 놈이 언제 교량을 베었단 말인가.
“넌 누구냐.”
“빨리도 물어본다, 새끼야.”
순간 구진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천무백은 실소하며 그런 구진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참. 성격 훤히 보인다.’
사람 참 단순하네.
천무백은 상대가 검을 다루는 것만 봐도, 성향이 어떤지 짐작 가능했다. 검을 뻗고 거둬들이는 속도, 비트는 각도, 보법을 밟으며 초식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 그 상황에서의 표정과 대처.
구진해의 성격을 대충 짐작한 천무백은 그걸 이용했다.
“뭐 새끼야. 꼬우면 덤벼.”
“이노옴!”
천무백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구진해의 검이 천무백의 목을 향해 쏜살같이 떨어졌다.
하나 검은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째앵!
“……!”
구진해의 눈이 부릅떠졌다.
기습 공격이지만 그만큼 위력적이다. 단 한칼에 베기 위해 전심으로 쏟아낸 검격이다.
하나 그걸 검을 곧추세워 평평한 검면으로 막았다.
손목이 시큰했다. 엄청난 반탄력에 순간적으로 검을 놓칠 뻔했다.
“이익……!”
천무백이 천천히 검면으로 구진해의 검을 밀어냈다.
구진해와 시선을 마주친 천무백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새끼야. 나이 처먹을 만큼 처먹었으면, 표정 관리는 하고 기습해라. 어? 누가 봐도 나 기습합니다! 하는 표정 짓고 공격하냐?”
구진해의 표정이 다시 딱딱해졌다.
단 한 번의 충돌.
그 충돌만으로 손목에서 전해져오는 둔중한 충격에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았다.
아니, 사실은 짐작도 못했다.
‘아무런 내력도 느껴지지 않건만!’
그게 문제였다.
분명 단 한 줌의 내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공을 사용하면서 느껴지는 기의 공명 같은 것도 전혀!
그런데도 막혔다. 내력을 실은 자신의 일검이.
“자. 너는 금제 안 걸렸지? 장로라면서?”
“……!”
“그럼 우리 깊은 얘기를 해 볼까? 능허야, 술상 좀 차려 오거라.”
능허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간소한 술상이 올라왔다. 딱 술과 잔만 있는 상.
“뭐 해? 앉아, 새끼야.”
“…….”
구진해는 떨떠름한 얼굴로 술상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팔짱을 꼈다.
“공자, 공자는 도대체 누구요. 누구길래 화산파 무인을 호위로 두고, 혈사문에 대해 아는 거요.”
“얼씨구, 이젠 애송이에서 공자로 격이 올라갔네.”
“공자는 화산에서 오셨소?”
“내 검에서 매화향이 느껴지긴 하더냐?”
“그건 아닌데…….”
매화향은커녕, 내력도 못 느꼈지.
“그리고 새끼야. 술상에 앉았으면 웃어른 잔부터 채워야지.”
빠득.
구진해의 콧구멍이 크게 벌름거렸다.
살갗이 파르르 떨리고 목에 핏대가 올라왔다.
“이 자식이 정녕……!”
째앵!
하나 구진해는 절대 분노를 터뜨릴 수 없었다.
어느새 천무백이 술병을 들고 그대로 구진해의 머리에 깨뜨렸다.
순간 정신이 멍해진 사이. 천무백이 외쳤다.
“왼쪽 뺨!”
천무백이 외치자마자 머리가 혼란한 가운데서도 구진해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간 무공을 익혀오며 몸에 새겨진 일종의 반사반응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그런 반사 속도를 아득히 뛰어넘는 괴물이란 점이다. 이미 천무백의 손바닥은 구진해의 고개가 휙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컥!”
이빨 몇 개와 피가 우수수 술상에 흘렀다.
“오른쪽 뺨!”
구진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짜악!
여지없이 오른쪽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남은 이빨 몇 개가 우수수 쏟아졌다.
“새끼가. 막으라고 알려 줘도 못 막냐. 그 나이 처먹을 동안 대체 뭘 수련했냐?”
그 말에 구진해의 눈이 뒤집혔다. 그는 곧장 바닥에 놓인 검을 세우며 천무백의 눈을 노리고 찔렀다.
“그래. 너도 막으라고 알려 주네. 딱 봐도 어디로 올지 보인다, 야.”
“……!”
눈을 노려오는 저 수는 허초다.
진짜는 왼손. 검으로 시선을 빼앗고 왼손으로 명치를 찔러오는 저 조공이다.
천무백은 고개를 모로 꺾으며 검끝을 가볍게 피했다. 동시에 손을 뻗어 구진해의 왼손을 붙잡고 그대로 비틀었다.
우두두둑!
“끄아아악!”
일그러진 얼굴로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는데도, 천무백은 비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손목이 완전히 돌아가서 너덜거릴 때야 손을 놨다.
그제야 구진해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술상에 얼굴을 처박았다.
“자. 구진해야. 살고 싶냐?”
“……!”
“살고 싶겠지. 혈사문이 뭐라고 목숨 바쳐? 어차피 너 지금 돌아가도 의심받아서 죽임당할 게 뻔한데? 안 그래?”
“그, 그건”
“다 알아 인마. 어차피 너 흡정마공의 제물이 될 게 뻔한데 말이야.”
구진해의 눈이 부릅떠졌다.
흡정마공은 적어도 장로급 이상부터 아는 극비가 아니던가.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태연자약한 얼굴로 미소지는 천무백.
남들이 보기엔 썩 매력적인 미소와 외모였지만, 이 순간만큼 구진해는 두려웠다.
“내가 웬만한 건 다 알아. 너희들이 무슨 뱀을 신으로 모시는 거 하며. 흡정마공하며. 그런데 말이야. 이건 하나 궁금하거든. 왜 술에 독 타서 역병인 것처럼 꾸며서 퍼뜨리냐? 응?”
원래 혈사문은 이런 짓까진 하진 않았다.
그저 납치해서 독을 먹이고, 흡정마공하기 좋은 신체를 만든 뒤에 수뇌부들이 아주 쪽쪽 빨아먹었지.
하여 천무백은 처음 역병이 퍼진다고 했을 때, 혈사문과 바로 연관 짓지 못했었다.
하나 그에게 이것은 시간문제였다. 핵심을 바로 꿰뚫어 보았다.
400년이 흘러도 이들이 만든 독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던 것. 다만 역병처럼 보이게, 구토와 설사, 정신 혼미 등의 병상이 나타나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어째서 이런 변화를 꾸민 것인가.
“말하면, 살려 줄 건가?”
“솔직히 말하자. 너 살려 주기 힘들어. 진짜로. 응? 여기 능허 말 듣기도 전에 기루 애들 몇 명이나 죽였냐. 그전에, 너도 장로잖아. 흡정마공 몇 번 써먹었을 거 아냐? 그래도, 아는 거 다 말하면 정상 참작할 여지는 있다. 이거야.”
“독을 퍼뜨리는 이유, 알고 있는가?”
“흡정마공에 적합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
“맞다. 그게 답이다.”
“……미쳤냐?”
처음으로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실 생각은 했지만, 쉬이 믿기 어려운 사실이니까.
“섬서성 전체를 역병으로 쑥대밭 만들어 놓고, 그 양민들의 정기를 다 흡수하겠다고?”
“그렇다. 섬서뿐만 아니라 호북, 하남성까지. 우리의 일차 목표는 그러했다.”
“허. 수십만, 수백만 양민의 정기를 흡공하겠다?”
“그래. 과거에는 관아의 시선을 피해 일부만 납치해서 흡정마공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무척이나 느리고, 제물을 구하기도 어려웠지.”
“그래서 역병처럼 퍼뜨렸다. 이건가?”
“맞다. 역병이 퍼지면 가장 먼저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천무백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혈사문의 속셈이 보였다.
“역병이 퍼지면, 혼란이 가중되지. 여러 고을은 봉쇄하고, 역병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난민들이 발생하고, 관의 행정력이 약해지고, 정파 녀석들도 어쩔 줄 몰라 하지. 우리가 그 상황에서 대놓고 수십 명, 수백 명을 납치해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해.”
“알 만하군.”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허성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고, 흑도에서 잔뼈가 굵은 능허도 ‘뭔 이런 개새끼들이 다 있냐’하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혈사문의 행동은 악독하다 못해 개 같은 짓거리였다.
하나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전부일 리가 없지.
“근데 생각해 보니 말이야, 그게 꼭 진짜 이유 같지 않거든?”
“뭐라?”
“마치 세상을 혼란으로 뒤덮어 놓고, 정파와 관이 혼란해서 어떤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단 말이야.”
“……!”
“마치, 누군가 세상에 나오는 걸 준비하는 밑 과정이라고 보이거든. 그 와중에 흡정마공 써먹는 거야 일석이조인 거고. 안 그래?”
구진해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천무백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자. 말해. 너희 뒤에 누구 있어?”
* * *
“저, 도련님이 하신 겁니까요?”
“뭘.”
“지금 머리 터진 거요.”
“내가 손도 안 대고 사람 머리 터뜨리는 기술이라도 있는 줄 아냐.”
“그럼 왜 갑자기 머리가 터집니까?”
“난들 아냐.”
“염병, 자기가 해 놓고 또 아니라고…….”
“넌 나에 대한 신뢰가 아주 부족하구나. 신뢰가 부족할 땐 처맞으면 되는데.”
“우리 어머니보다 더 강하게 신뢰하는 분이 도련님입니다.”
“은근슬쩍 기어오르는데 조심해라, 능허야. 내가 관상을 볼 줄 아는데, 넌 나무막대기로 장강혈(長强:항문)부터 정수리까지 꿰뚫려서 죽을 관상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주제넘었습니다. 반성하겠습니다. 부디 그 관상이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다시 보니 맞아 죽는 거로 바뀌었네.”
“안 죽는 건 없습니까?”
“아직은.”
“최선을 다해 관상을 바꾸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우선 시체부터 치워라.”
“새집처럼 깔끔히 치우겠습니다.”
허성은 멍하니 천무백과 능허의 만담을 바라봤다.
속으로 실소가 나올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만담이지만, 상황이 상황이지 않은가.
허성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구진해의 시신을 바라봤다.
어깨 위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체.
조금 전을 떠올린 허성은 몸이 절로 떨렸다.
천무백의 질문을 받고, 구진해의 입이 뻐끔거리는 순간 갑자기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그대로 빵! 하고 터져 버렸다.
“도대체, 어찌 된 겁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허성이 물었다. 천무백이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제요.”
“예? 하지만, 지금껏 여기서 본 혈사문 애들 금제하고는 다르던데요?”
“맞소. 혈사문에서 건 금제가 아니니까.”
머리가 터져나가기 전 구진해 표정을 보아하니, 그 역시도 모르고 있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금제인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혈사문의 배후.
그 정체를 캐물었을 때 금제가 발동했으니, 그것도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에 숨겨놓은 거면, 엄청난 금제가 틀림없다.
천무백이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런 금제가 넓디넓은 강호중원에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당장 떠오르는 금제술은 몇 가지 없다.
그중에는 이미 실전되고, 사라진 단체와 문파의 것들도 있으나 배제할 순 없다.
부활한 혈사문처럼 그들 역시 언제 다시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저, 도련님…… 하면 어떻게 하실 요량입니까?”
“뭐. 짐작 가는 건 있소. 다만 확신하기가 어려웠던 건데, 대충 돌아가는 꼬라지 보니 알 만하네.”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강호 경험이 수십 년뿐 아니라 수백 년에 이르면, 대충 감이 온다.
“수련에 좀 더 힘써야겠네.”
천무백은 고개를 돌려 능허에게 말했다.
“능허야, 이거 치우고, 이제 치료 시작하자.”
“네, 넵! 알겠습니다! 저 먼저 치료받겠습니다!”
“뭐하냐.”
“네? 당연히 저 먼저 치료 받아야하는 거 아닙니까?”
“난 인간 말종에 사람 패 죽이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서 말이다. 능허야. 가서 기녀들하고 밥, 청소하는 아주머니들하고, 힘쓰는 애들하고. 넌 가장 마지막이다.”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삐쳤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