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4화>
14. 오늘 검을 들고 오길 잘했군
다행히도 연화루에서 벌어진 사건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천무백이 연화루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가 초저녁인지라 기루에 손님이 별로 없었다는 점도 유효했다.
그저 늘 흔히 있는, 흑도들의 싸움 정도로 소문이 퍼졌다.
천무백에 의해 강제로 루주 자리에 앉게 된 능허가 처절할 정도로 무마한 결과였다.
덕택에 사람들은 천무백과 연화루와의 접점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 치밀하게 조사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러나 진 의원 때문에 천무백이 의술에도 조예가 있다는 사실이 퍼졌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점박이와 진의원이 관아에 약재상을 신고했고, 관아에서도 약재상에서 독초를 버젓이 팔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점박이는 입을 다물었지만, 진 의원은 모두 이게 우리 도련님 덕택이요, 하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런 탓에 천무백은 아침에 철방에 가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천유하가 불렀던 탓이다.
“확실히 많이 보기 좋아졌네.”
“열심히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장 표두께서 칭찬 많이 하시던데. 재능이 있을 뿐더러 노력도 열심히 한다고.”
“할아버님께서 그저 좋게 봐주신 거지요, 누님.”
천유하는 조용히 찻잔 너머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다부진 얼굴.
의복 너머로 느껴지는 전체적인 몸의 윤곽.
천유하는 이 아이가 그 조그마했던 막둥이가 맞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열여섯이 넘으면 남자가 되어간다더니.’
하긴, 원래 저 나이 때 몸이나, 정신이나 성장하던 시기가 아닌가.
늘 품안의 막내라고만 여겼건만, 결국 녀석도 클 때가 온 것이다.
“점박이의 발을 고쳐 줬다면서?”
“십 년 동안 제 곁을 지켜 준 녀석입니다. 매번 발을 저는 게 안타까워, 그간 책을 읽어오다 치료법을 발견했습니다. 하여 진 의원과 의논해 시침했고, 운이 좋아 치료가 잘됐습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는 답변.
천유하는 감탄을 터뜨렸다.
‘진 의원도 무백이가 독학으로 의술을 익힌 것 같다고 했지.’
설마, 의술이 책으로 독학한다고 절름발이를 치료할 수나 있나 의아했다.
그러나 무백이의 담담한 답을 들어보니, 감탄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든 10년 넘게 파고들면, 대가가 되는 법이라더니.’
천무백을 바라보는 유하의 눈빛에는 대견함이 깃들었다.
무려 10년이다.
10년 전이면, 천무백이 코흘리개 시절. 그때부터 점박이의 발을 보고 안쓰러운 감정으로 공부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끝내는 발을 치료해 줬다. 천유하는 지금껏 자신이 천무백을 너무 철부지로 여겼다고 생각했다.
‘하긴,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녀석이었지.’
천유하는 찻물을 들이키곤, 한편에 놓았던 선물을 앞으로 지그시 내밀었다.
“장 표두가 비룡단을 이끌고 아버님과 내일 표행을 조사하러 갈 거야. 알고 있지?”
“네, 누님.”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국 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최근 표행 실패로 그 건을 조사하러 국주인 천문경이 직접 가리라는 소문은 자자했다.
“장노가 같이 가니, 아버지는 걱정하지 마렴.”
“네.”
“저번에 무공을 익히겠다면서 했던 말, 기억해?”
사실 천무백의 기억력은 온전하다 못해 망각을 모르는 수준이었다.
무수한 전생의 기억을 늘 품고 살면서, 그는 머릿속의 기억을 정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잠깐 생각할 시간만 있으면, 무림 태동기 이전의 첫 번째 전생의 소소한 습관까지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천무백이니 천유하의 물음에 곧바로 답이 나왔다.
“무공을 익혀야 누님과 표국을 지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게 그저 철부지 녀석이 홧김에 내뱉는 말인 줄 알았어. 하지만 네 모습을 보니 진심이더구나. 그래서 준비했다. 아버님과 장노가 출타한 지금, 표국을 지키려면 검이라도 한 자루 차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검…….”
천무백은 눈을 빛냈다. 비단으로 잘 싸인 건 바로 검이었다.
여기에 이정도 수준의 검이 있다니.
“누님의 선물이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비단을 헤친 채 드러나는 검의 자태에 그저 넋 놓고 바라보는 천무백을 보며, 천유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야. 무슨 군담소설에 나오는 전설의 명검 같습니다.”
“……하.”
천무백은 천유하의 선물에 넋을 놓았다.
아니, 누구나 그럴 법했다. 비단을 벗겨 낸 검의 자태는 그야말로 반짝이다 못해 화려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으니까.
검집에는 금박으로 용과 봉황을 비롯해 여러 신수가 새겨져 있었다.
그 각인이 얼마나 예술이던지, 숱한 명검을 봐 왔던 천무백마저 감탄을 터뜨릴 정도가 아니던가.
누구나 한번 보면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화려했다. 칼자루에는 금실이 달려 있었고, 검두에는 화려한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천무백은 처음 외견만 보고 의전용 검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근데, 이거 쓸 수는 있는 겁니까요? 어디 권력자 집의 벽에 걸려 있을 법한 검인데요.”
점박이마저 관상용 검이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점박이가 조심히 눈치를 봤다.
“부국주님이 그냥 사기당한 거 아닙니까요?”
“그건 아니다.”
천무백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릉.
점박이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섬뜩한 빛이 반짝였다.
“검은 좋은 검이다.”
화려한 외관에 눈을 빼앗겼지만, 검 자체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검이었다. 보검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디 가서 명검 대우는 받을 만한 검이었다.
날카로운 예기는 당장이라도 강철이라도 벨 것처럼 섬뜩했다.
검신에 그려진 물결무늬는 단순히 화려한 장식이 아니었다. 담금질하면서 나타나는 무늬였는데, 천무백은 이 무늬를 아주 잘 알았다. 바로 직전 전생에서 제법 명장으로 유명했던 이의 특징이 아니던가.
‘육 장인의 검이 이러했지. 그는 이미 죽었을 터인데, 그의 제자가 만든 검인가?’
그와 비교해 손색이 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한 검에 속했다.
‘아마도 겉의 화려한 장식은 누님이 따로 주문하신 것이겠지.’
동생에게 최대한 화려하고 좋은 선물을 해 주려 했던 천유하의 모습이 상상되어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거 차고 다니실 겁니까요?”
“좋은 검이니까.”
“음.”
“왜?”
“아뇨, 그냥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철부지가 있어 보이려고 화려한 검 차고 다니는구나, 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라.”
겉에만 비단으로 감싸면 되니 큰 문제는 없다.
“도련님, 허성입니다. 연화루에서 능 총관, 아니 능 루주가 찾아왔습니다.”
점박이와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던 그때, 문밖에서 허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다소 딱딱한 얼굴의 허성과 곁에 능허가 서 있었다.
능허와 사내는 다소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련님! 능허가 인사 올립니다!”
“지랄한다. 지랄을. 능허야, 아예 대놓고 날 찾아오면, 청성표국의 막내아들이 연화루 루주를 죽인 개새끼다. 라고 광고하는 꼴 아니냐?”
“그래서 허 표사를 찾아왔습니다.”
“에휴. 말을 말자. 허 표사, 이놈을 내 앞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뭐요?”
“그게…… 도련님이 아셔야 하는 이유라 부득이하게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뭔데? 능허야.”
“도련님, 살려 주십쇼!”
“엉?”
이 새끼가 왜 이래?
천무백이 떨떠름한 얼굴로 다짜고짜 무릎을 꿇는 능허를 바라봤다.
“내가 니를 죽인다고 한 적은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뭐 사고 쳤냐?”
“그, 술에 독을 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혈사문 애들이니까.”
“이번에 연화루를 정리하면서, 원래부터 혈사문이던 놈들은 싹다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자식들이 본래 술하고 음식을 떼 오던 놈들이지 말입니다.”
“응.”
“그리고 제가 연화루로 이직했을 때부터, 그 술과 음식으로 하루가 멀다고 회식을 했죠.”
“하여튼 흑도 새끼들. 술 하면 사족을 못 써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말입니다.”
능허가 마른침을 삼켰다.
“술에 역병을 퍼뜨리는 독이 들어가 있다면…… 저희 모두 이미 중독된 거 아닙니까?”
어…… 그러네?
천무백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능허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그러고 보니, 좀 창백한 것 같기도 하네.
확실히 그렇다.
천무백은 능허의 얼굴을 살펴봤다. 증상이 어떻더라. 역병으로 보인다고 하니까, 보이는 증상도 달라졌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천무백이 아는 하나는 같았다.
“오늘 아침부터 안 서냐?”
“……!”
능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에휴, 새끼. 그러니까 술 좀 작작 처먹지.”
연화루에서 계속 죽어라 퍼마셨으니, 중독되고도 남았을 거다. 다만 증상이 보이는 게 꽤 걸리니까.
‘보아하니 하남성에 이미 중독된 자들이 많겠군. 조만간 역병이 하남성에서도 제대로 퍼졌다고 난리가 나겠어.’
하면 하남성은 큰 혼란이 도래하리라.
‘섬서는 아주 쑥대밭이겠군. 혈사문이 원하는 게 무엇인가. 혼란을 일으켜서 무얼 하려고 하는 거지?’
본래 혈사문은 몰래 사람들을 납치하거나, 무지한 양민들을 종교로 유혹했던 놈들이다. 이렇게까지 역병으로 혼란을 일으키던 놈들은 아니었다.
다만…….
‘이 독이 말이야. 놈들이 쓰는 흡정마공에 쓰기에 적합하게 만드는 준비단계였지.’
천무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섬서성의 모든 양민을 중독시키고, 하남성도 중독시키고, 강호 중원의 양민들의 정기를 모두 빨아먹겠다는 건가? 미친놈들.’
만일 그렇다면, 이놈들은 400년 전보다 더한 놈들이 분명하다.
“살려 주십쇼! 그러고 보니 요 며칠간 아침에 일어나는데 잠잠했습니다.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했는데…….”
“내가 어떻게 알고 치료해?”
“듣자 하니 도련님이 신의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몸종이 지닌 장애를 침술 한 번에 치료했다고…….”
“섬서성엔 치료방법이 알려진 것 같지만, 거기까지 다녀오기엔 너무 늦습니다.”
천무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허성 역시 입술을 질끈 깨물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무백의 눈이 샐쭉해졌다.
“허 표사도……?”
“……그렇습니다. 근래 피곤한 거로만 생각했는데.”
“에휴. 일단 연화루로 갑시다. 한꺼번에 모아놓고 다 치료해야지.”
“감사합니다!”
천무백은 점박이를 방안에 남겨 놓고 능허와 허성을 앞세워 연화루로 향했다.
연화루는 제법 멀었다. 그러나 모두 어느 정도 내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도착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화루 근방 가까워졌을 때, 천무백이 불현듯 멈춰 섰다.
허성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능허야.”
“네.”
“너희 애 중에 벌써 중독증상이 크게 나타나서 피 토하는 놈들 있냐?”
“어…… 아니요. 증상을 보이는 놈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 동생 놈이 우리도 중독된 거 아니냐고 얘기 꺼내기 전까진 생각도 못 했죠.”
천무백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근데 왜, 혈향이 짙냐.”
“……네?”
천무백이 연화루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피 냄새가 짙구나.”
“……!”
“오늘 검을 들고 오길 잘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