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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13화 (13/318)

<검신재생 13화>

13. 검을 잡을 때가 됐다

“네?”

“네가 연화루 루주하라고.”

“그게 무슨…….”

“본래 루주가 죽었으니까 2인자가 자리 계승해야지.”

“저, 저를 살려 주시는 겁니까?”

“너 하는 거 보고.”

천무백의 능청스러운 말에 능허는 무언가 짐작했다.

“절 루주 자리에 앉혀놓고 혈사문의 꼬리를 추적하시려는 것이군요.”

“이야, 생긴 거에 비해 머리는 돌아가네?”

능허는 순간 뜨거운 게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성질대로 했다간 지금 저 굴러다니는 루주 머리처럼 되리라. 능허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런데, 역병을 정말 혈사문이 퍼뜨리는 겁니까?”

“네가 술에 독 탔잖아.”

“사실 전 여기 관리만 하지, 술에 독 탄 거 처음 듣습니다.”

“얼씨구, 바로 발뺌하네.”

“아닙니다. 전 혈사문이 새로운 흑도방파인줄 알고, 원래 있던 데서 이직한 겁니다.”

“이직? 지랄한다. 원래 어디였는데?”

“흑심방 소속이었습니다.”

“……허 표사, 흑심방이 어디요?”

“하남 개봉에 자리 잡은 흑도입니다.”

“흑도? 에휴. 지랄한다. 뭔 흑도라길래 태룡방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듣도 보도 못한 흑도방파에서 이직한 게 혈사문이냐. 너도 참 한심하다.”

“…….”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개봉은 서안과 낙양과 더불어 3대 고도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도시가 아니던가.

그런 개봉을 꽉 휘어잡은 흑심방은 그저 그런 쓰레기 같은 흑도가 아니다. 주위의 정파 문파나 세가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곳이 아니던가.

그런 흑심방에서도 나름의 유명세가 있었던 게 능허였다.

흑심방을 단지 흑도라고 깔보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진짜는 태룡방을 언급한 것이다.

‘시발. 뭐? 태룡방 정도?’

태룡방이면 흑도 중에 최고가 아니던가.

마도하면 천마신교요, 정도하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요, 그리고 흑도하면 태룡방이 아니던가.

“왜 혈사문으로 이직했는데?”

“장래가 유망해 보여서요.”

“…….”

“아니, 막말로 섬서성에 기루가 삼백 개가 넘는답니다. 이제 하남성에 진출한다고 하는데, 흑도에서 잔뼈가 굵은 놈 원한다고 하고, 돈도 많이 준다는데 당연히 이직하는 거 아닙니까?”

“뭐? 섬서성에 기루가 삼백 개가 있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허 표사, 역병이 섬서성에서 시작됐다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관에서 이미 섬서성을 봉쇄한 지 오래인데, 하남뿐만 아니라 산서성과 호북성에서도 역병환자가 발생했다는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비록 청성표국이 하남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표국이어도, 표국이란 단체 특성상 정보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역병 같은 경우엔 관에서 봉쇄령이 내려질 수도 있는 변수라, 아주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봉쇄했는데도 계속 역병이 다른 성으로 퍼져나간다는 건, 전염경로가 다르다는 거지. 아니, 전염이랄 것도 없지. 일방적으로 기루에서 퍼뜨리면 뭔 수로 막아?”

천무백은 환자를 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미 400년 전 한 번 겪어봤던 혈사문의 독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 그때의 독이 역병처럼 보이게 변했다는 것일 뿐이다.

하나 전염되지 않는다. 역병이 아니라 그저 독에 중독된 증상이 틀림없다.

섬서성에서만 300개 기루면, 그리고 그 기루들이 여기 연화루에서 술에 독을 탄다면?

분명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그러기에 빨리 추적해야 하고.

천무백의 얘기에 허성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도대체 혈사문이 어떤 곳이길래 왜 사람들을 중독시킨답니까?”

“그러게 말이오. 원래 이렇게 크게 노는 놈들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자식들. 진짜 그 혈사문 맞아?

독을 보면 확실하고, 혈사문이란 이름에 반응한 루주나 약재상 주인의 금제를 보면 확실한데.

이전의 혈사문은 그저 광신도 사교에 불과했다.

다만 그 사교의 핵심 인물들이 흡정마공을 익힌 괴악한 마인들이라 문제였다.

일반 백성뿐 아니라 무림인들까지.

산사람들을 제물로 정기를 흡수하던 놈들이다. 그냥 정말 미친놈들이 맞았다.

‘소림의 중들까지 잡아서 정기를 빨아먹던 놈들이니까.’

무림공적으로 찍히는 건 당연한 일이고, 당시 천무백과 인연이 있었던 불가의 인물이 희생당해 천무백은 혈사문을 끝까지 추적했었다.

“분명 그때 완전히 멸문했었는데 말이지.”

입 안이 썼다.

분명 끝까지 추적해서 멸문시켰다고 여겼건만.

뱀처럼 살아남아 40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혈사문의 독이란 사실에 천무백이 예민하게 반응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 바로 과거의 원한 때문이었다.

‘전생을 뛰어넘어서도 복수심이 사라지지 않다니. 이러니 그 달걀 놈이 우화등선도 못 하게 하는 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사람이 오래 살면 현명해지고 삶에 초탈해진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강호의 은원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라서, 생이 끝난다고 해도 잊히지 않는다.

천무백은 그런 자신이 자조적으로 느껴지다가도, 이내 술술 털어냈다.

‘어차피 우화등선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다. 수없이 인생을 살아오며, 내가 저지른 죄악이 어디 한둘이던가.’

직전 전생에선 검신으로 추앙받으며, 마교를 홀로 막아낸 영웅이었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비단 그때뿐이 아니다.

스스로 마도의 길을 걸은 적도 있었고, 무수한 피를 흘렸었다.

‘나 같은 놈이 신선이 되면 우스운 얘기지.’

그의 목표는 하나다.

오로지 검의 끝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반드시 윤회의 굴레를 끊어내는 것.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무수한 전생을 살면서 여러 방식으로 살아봤다.

비무행을 하면서 강호를 뒤흔들었던 적도 있고, 아니면 아예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강호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않았던 삶도 있다.

‘결국, 검의 발전은 싸움 속에서 일어나는 법.’

그렇게 도를 닦는다고 해도, 검의 성장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천무백은 매번 강호에 검 한 자루 들고 몸을 던졌다.

정파 무인으로 살았던 적도 많고, 마도의 인물로 독보한 적도 있으며, 정사지간의 인물로 그 어느 편에 서지도 않은 적이 많다.

그에게 있어 정과 마, 사도와 흑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직전 전생에서 천무백이 검신으로 숭앙받고, 정파의 거두로 칭해졌던 이유?

‘그야 마교에 어마어마한 놈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그래서 그들과 싸웠다. 마교와 싸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정파의 구심점이 되더라. 때마침 마교와 다르게 정파는 인재 가뭄에 시달렸다.

마교와 끊임없이 싸우다 보니 천무백은 이전 삶보다 더 검도에 있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천마 그놈 아직도 살아 있으려나.’

그놈은 무시무시했다.

이 자식도 환생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한 놈이었으니.

‘어쨌거나, 닥쳐오는 모든 풍파에 검 한 자루 들고 싸워야 검극에 갈 수 있다. 조용히 살아서 무엇하랴.’

천무백은 우선 혈사문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능허야.”

“네.”

“연화루 맡아. 그리고 연화루 내에서 너처럼 외부에서 영입된 놈들은 회유하고, 원래부터 혈사문이었던 놈들은 다 처리해.”

“……!”

능허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똑똑한 것과 잔머리는 다른 법이다. 능허는 나름 잔머리가 굵다고 스스로 여겼다. 그래서 눈치도 빠르다.

천무백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했다.

“혈사문의 간자가 되란 말입니까?”

“왜? 싫어?”

천무백이 피 묻은 단도를 슥슥 닦았다. 능허가 흘깃 보곤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꼭 한 번쯤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그래?”

“그럼요. 어린 시절 그 유명한 암천검제가 마교에서 암약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무림맹의 간자임을 드러내면서 마교 장로들을 제거한 일화를 듣고 자랐습니다. 꿈에 그렸던 일이죠.”

“말 많아지는 거 보니 불만이 좀 있어 보인다?”

“아닙니다. 불만이라뇨. 제가 암천검제 정돈 아니지만, 뭐 까짓것 간자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치. 네 꿈을 이뤄 준 거 같아서 기쁘다.”

“에이 썅.”

능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천무백은 피식 웃으면서 허성에게 말했다.

“허 표사.”

“네, 주군.”

“오늘 일은 모두 허 표사가 한 거로 퉁 칩시다.”

“네?”

“나랑 약재상 갔다가 이놈들이 악독한 짓 하길래 해결했고, 기루는 때마침 술 마시러 왔다가 싸움이 나서 해결했다고 칩시다.”

“그걸 왜…….”

“내가 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겠소?”

“아!”

“뭐, 언젠가는 내 실력과 본모습이 알음알음 알려지겠지만, 굳이 빠르게 알려질 필요는 없지.”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당장 혈사문과 싸우기는 부담스러웠다.

당장 연화루 루주를 단칼에 베였지만, 만일 상대가 방심치 않고 전심전력으로 싸웠다면 골치 아팠으리라.

결국, 내가고수들의 싸움엔 내공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없다.

명문의 기준이 정통성 있는 내공심법이 존재하느냐에 갈리지 않는가.

‘시간이 좀 필요해.’

벌써 주목을 받으면 피곤해진다.

더구나 혈사문이란 단체라면.

그냥 악독한 집단이라면 모를까, 이놈들은 제 목숨도 도외시하는 광신도 사교집단이다.

‘원래 싸움에서 상대하는 적의 정체를 모르면 어려워지는 법.’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혈사문은 사람들을 보낼 것이다.

허성이 범인인 줄 알겠지만, 정작 그들이 상대해야 할 건 천무백이 될 터.

천무백은 이쪽으로 오는 혈사문들을 쳐 내면서 그 꼬리를 밟고 추적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저들은 섬서가 주 무대인 것 같고, 아직 여기에 시선을 집중할 수는 없을 터.’

섬서성엔 화산과 종남이 있다.

그 두 문파가 있는 이상, 혈사문은 섬서성에 거의 모든 전력을 동원하고 있으리라.

하면 시간은 있다.

‘허성을 앞에 세워 두고, 경천혼공을 준비한다.’

지금보다 더 빠르게 내공을 쌓는다.

그래야만 삼재검뿐만이 아닌, 천무백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공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허 표사.”

“네. 주군.”

“당분간 고생 좀 해야겠소. 아마도 자네를 찾아올 혈사문도 놈들이 많을 터이니.”

허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여기 능허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오히려 약간 떨어진다.

만일 연화루 루주 정도만 돼도, 허성은 자신이 장담할 수 없었다.

허나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해야 하는 일이면, 해야지요.”

이로써 일단 준비는 마쳤다.

아니, 아직 하나가 남았다.

“허 표사, 근방에 철방이 있소?”

“철방이라면, 저희 표사들에게 무기를 정기적으로 납품하는 철방이 있습니다.”

“오늘은 늦은 거 같으니, 내일 아침에 같이 갑시다.”

“철방에 가신다면, 무기를 마련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소.”

천무백의 눈이 허공에 닿았다.

“이제는 검을 잡을 때가 된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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