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2화>
12. 도대체 누구야 너?
능허의 처절한 외침에 기둥서방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천무백이 휘파람을 불었다.
“빠르다 빨라.”
“너, 이래놓고도 무사할 줄 알아?”
“너는 그러면 끝까지 목 뻣뻣이 들고 반말 찍찍대면 무사할 줄 알아?”
“무사할 줄 아세요?”
“염병한다. 뭐 하냐. 안내 안 하고?”
“안내?”
“기루에 왔으면 손님 대접해야지. 총관이란 놈이 왜 이렇게 감각이 없어? 그러니까 술에 독이나 타지. 병신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능허는 겨우 마지막 말을 삼켰다. 만일 내뱉었다가 왼쪽 손목도 날아갈지 모른다는 위험을 느꼈다.
‘방안에 틀어박혀 악기만 줄곧 불어 댄다더니. 정신 줄이 나간거야? 뭐야?’
차라리 미친놈이면 낫지.
그 미친놈이 자신도 모르게 지풍을 쏘아 손목을 터뜨릴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
기존에 알려졌던 천무백의 소문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진짜 동작 느리네. 느려 터진 거 보니 발모가지 쓸모없으니 날려도 되냐?”
“제기랄!”
능허는 침을 꿀꺽 삼키곤 몸을 돌렸다.
천무백은 능허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허성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천무백에게 꽂혔다.
계단을 계속 오르고 길게 나타나는 통로에 접어들자 허성이 감탄을 터뜨렸다.
“최상층에 올라오다니…….”
“최상층?”
“네, 도련님. 여기는 예약을 해도 들어올 수가 없는 곳입니다. 듣기로는 원양현 최대부호인 조 상인도 헛물을 켰다고 하던데.”
“뻔하네. 능허야, 너 함정으로 지금 유인하는 거지?”
흠칫!
“그러다 너 저승으로 유인된다?”
“다른 데로 모시겠습니다.”
능허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봐도 꼬맹이 애송이인데.’
겉으로 보이는 건 분명 10대 애송이다. 제법 근육이 붙은 게 있지만, 아직은 호리호리하다 못해 가느다란 몸선을 보면 계집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쁘장한 놈이다.
괜히 능허가 처음이 기생 운운한 게 아니다.
남색을 좋아하는 놈들도 있으니, 미동으로 꾸며서 갖다 놓으면 제법 인기 있겠다 싶었다.
하나 그런 외모와는 다른 속내에 치가 떨렸다.
툭툭 튀어나오는 삼류잡배 같은 어조는 둘째치고도, 단숨에 상황을 휘어잡는 능력에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시건방진 어조라고 그저 무시할 수가 없다. 대화의 맥을 툭툭 끊는 듯하면서도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오니 정신이 없을 정도다.
뿐이랴. 고작 몇 가지 단어만으로도 상황을 유추해 내 함정을 피하는 저 판단력은?
‘무림에서 여자와 아이, 노인을 조심하라더니. 아아. 능허야, 자칫하면 오늘이 네 제삿날일지도 모르겠구나!’
능허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천무백과 허성을 방으로 안내했다.
중앙에 술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 고풍스러운 매화가 그려져 있는 병풍이 있었다.
“지랄한다. 지랄해. 화산에서 보면 울겠다. 술에 독이나 타서 역병 터뜨리는 사교도 놈이 매화를 논해?”
“…….”
“어쭈. 표정 봐라. 허 표사, 이놈 표정 보십쇼. 여차하면 한 대 칠 표정 아닙니까?”
“제가 혼 좀 낼까요, 도련님?”
“아닙니다. 술에 독이나 타는 놈에게 무슨, 인마. 가서 술상이나 내와라.”
“…….”
천무백은 의외로 허성과 죽이 잘 맞았다.
평소에서 능청스럽고 서글서글하기로 유명했던 허성이다. 천무백이 변화를 삼재검성의 진전을 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한 허성은 천무백의 행동에 더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뭐 하냐, 능허야.”
“네. 술은 어떤 거로…….”
빡!
“그런 것도 내가 알려 줘야 하냐. 하 이 새끼. 진짜 감각 없네. 너 총관 자리 마작으로 땄냐? 아니지. 술에 독 잘 타는 거로 땄지? 알아서 준비해 와. 내가 여기에 어떤 술이 있는 줄 알고 주문해?”
천무백이 별안간 손을 뻗어 뒤통수를 후렸다. 능허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나 그러면서도 속내는 경악스러웠다.
‘시발! 뭐가 이렇게 빨라?’
손이 움직이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만일 손에 칼이 들렸다면?
인식하기도 전에 목이 잘려 죽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능허는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그럼 대령하겠습니다.”
능허가 황급히 나가자 방엔 천무백과 허성 단둘이 남았다.
천무백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상단전을 활성화했다.
일을 쉽게 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
허성은 눈을 크게 떴다. 방안을 가득 메우는 압도적인 기세.
짐작은 했다만, 예상을 벗어나는 수준이 아닌가. 단순히 날카로운 칼날 같은 기세가 아니었다.
이 방안에 중원오악이 모두 들어선 것처럼,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끔찍할 정도로 몸서리쳐지는 정적이 내려앉은 채.
천무백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허 표사.”
“네, 도련님.”
“오늘 있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치 마시오.”
“……!”
“허 표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천무백이오. 청성표국의 막내아들 천무백. 본래의 나와 다르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난 변하지 않았고, 이것이 원래 내 본모습이요.”
허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나, 사정이 있으니 이 모습은 오직 허 표사만이 본 것이오. 그러니, 오늘 본 것, 느낀 것, 모두 허 표사만 알고 있어야 하오.”
천무백의 어조는 진중했다. 말투 역시 존댓말에서 아랫사람에게 말하는 하오체였다. 하나 그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허성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아주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허성은 겨우 입을 열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천무백은 말없이 허성을 바라봤다.
“혹시, 스승님의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스승님?”
“그간 알려진 모습은 모두 위장이었던 거 알겠습니다. 그저 예악에만 몰두한 것처럼 꾸민 뒤, 아무도 모르게 방안에서는 무공을 익히신 것이지요.”
천무백은 여전히 무심하게 허성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 너머의 속내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뭔 소리야? 단주라길래 좀 똑똑한 놈인 줄 알았는데 얘도 이상하네?’
천무백으로서는 황당할 노릇이다.
갑자기 자기 혼자 착각하고 오해하다니.
물론 그 오해를 굳이 수정해 주진 않았다.
‘뭐, 그렇다고 따로 진실을 말해 줄 순 없잖아?’
천무백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스승이신 은거기인께서는 정파의 인물이겠지요. 하나 앞서 언급했듯이 혈사문이란 단체가 역병을 고의적으로 퍼뜨리는 것이 사실이라면, 주군께선 스승의 유지대로 이걸 막기 위해 드디어 숨겨 왔던 진면목을 드러내신 것 아닙니까?”
“허!”
천무백은 순수하게 감탄을 터뜨렸다.
자기 멋대로 추리해 놓고 ‘이게 맞지?’같이 반짝이는 눈을 보라.
천무백이 대답하지 않자 허성은 제 생각이 맞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벽에 가로막혀 한낱 표사로 살아가고 있으나, 저 역시 한때 정파무림의 영웅을 꿈꿨던 무인으로서, 화산의 속가문파에서 사사받은 무인으로써, 도련님의 협객행을 따르겠습니다.”
“…….”
천무백은 허성의 말에서 몇 가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산 속가문파 출신이었군.’
비록 능청스럽고 장난기 있는 성격이지만, 그것만큼 정의심에 불타는 성격이었다.
나름 명문정파의 속가 출신으로, 마음에 정파 무림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 있었다.
그런 허성의 눈에 천무백이 어떻게 비쳤겠는가.
‘몰래 은거기인으로부터 무공을 배우다가, 혈사문이란 사특한 단체가 역병을 고의적으로 퍼뜨리는 걸 확인하고, 못 참고 본모습을 드러낸 거로 생각하는 것이군.’
그 대단한 상상력에 천무백은 손뼉이라도 쳐 주고 싶었다.
뭐, 그래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어쨌거나 혈사문 때문에 이렇게 과격한 모습을 드러냈으니.
허성은 이제 자신의 말이라면 믿고 따를 터.
하니 그저 은은한 미소만 띄워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허성은 그런 미소를 보고 자신의 오해를 더 확실하게 굳혔다.
때마침 방문이 열리고 능허가 들어왔다.
술상을 가지러 간 것과는 달리, 그는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이 훤히 드러났다.
천무백은 그 뒤에서 험악한 인상으로 나타난 사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리가 나오셨네.”
사내는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눈구덩이가 깊었다. 양 볼이 쏙 들어가고, 창백한 빛이 감도는 게 마치 시체를 보는 것 같았다.
“뭐냐. 이 기생오래비 같이 생긴 놈을 못 당해서 날 부른 거냐, 능허?”
“뭐냐. 이 무덤가에 굴러다니는 시체같이 생긴 놈이 니들 대가리냐? 능허?”
“…….”
연화루 루주는 자신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천무백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엔 기루를 습격하고, 혈사문에 대해 아는 놈이 나타났다길래 설마 소림에서 알아차렸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애송이도 아닌, 그냥 어린애 아닌가?
그것도 무공이라곤 익힌 것 같지도 않은.
그는 오히려 곁에서 눈빛을 불태우는 허성을 바라봤다
‘저놈 정도면 능허 이놈을 기습으로 이렇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능허를 쳐다보니, 능허는 저 어린놈을 감히 눈도 못 마주치고 있지 않은가.
루주는 어이가 없었다.
제법 흑도에서 실력도 한가락 하고, 경험도 많은 놈이라 이쪽 지방을 장악하기 위해 혈사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능허가 고작 어린애 상대로 쩔쩔매다니.
“넌 뭐냐. 뭔데 혈사문을 알고 있어?”
“몰라.”
“뭐?”
“이젠 네가 알려 줘야지. 궁금한 게 많아.”
“이 개자식이…….”
루주가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들며 쇄도했다.
2장(丈:6m)은 족히 될 거리가 눈 한번 깜짝일 사이에 줄어들었다.
가공할 신법이었다.
허성이 급히 검을 내질렀다.
째앵!
허성의 검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깨져나갔다. 루주는 전혀 방해받지 않은 것처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어쨌거나 혈사문을 알고 있는 놈, 반드시 죽여야 한다!’
수백 년 전에 사라진 그 이름.
그 이름을 누군가 떠올리고 기억해 낸다는 것만으로도 위험이다.
만일 근처 소림이나 여타 다른 명문정파의 귀에 들어가면 일은 복잡해질 터.
루주는 여기서 천무백의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단숨에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픽!
칼끝이 천무백으로부터 한 자(尺:30cm)까지 도달한 순간.
천무백이 술상 위에 올려뒀던 단도를 휘둘렀다.
쭉 찔러져 오는 검끝을 밑으로 내려치면서 공격을 흘려보냈다.
“……!”
루주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검을 흘려보냄과 동시에 천무백의 단도가 마치 뱀처럼 꿈틀거렸다.
루주의 검을 부드럽게 타고 올라가면서 단숨에 루주의 손목을 잘랐다.
스걱!
“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루주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천무백은 그대로 놈의 가슴팍을 발로 밀어내 쓰러뜨리고 루주의 목을 지그시 밟았다.
“자.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된 거 같은데.”
단 한 번의 숨을 내쉴 정도로 짧은 순간.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지켜보던 능허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내가 저런 놈하고 드잡이질하려 했다니! 죽으려고 작정했었구나!’
지풍으로 자신의 손목을 날릴 때부터 무공이 고강한 건 알았지만,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니 느낄 수가 있었다.
루주는 적어도 능허보다 두 수위의 실력자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흑도에서 굴러다니며 잔뼈가 굵던 능허가 고개 숙이고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리라.
한데 그런 루주를, 무언가 특별한 무공을 쓴 것도 아니라 단지 공격을 흘려보내고 그대로 손목을 잘라냈다.
그 쾌속한 모습에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자. 말해. 혈사문에 대해 모두.”
천무백의 어조가 깊게 가라앉았다.
하나 그 순간, 천무백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뭐야. 이 새끼도 금제 걸렸어?”
루주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붉은 빛.
약재상 주인을 캐물을 때 나타나던 금제의 전조였다.
“옛날 혈사문은 이런 금제를 걸진 않았는데. 하긴, 옛날엔 이렇게 양지로 튀어나오지도 않았지.”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 광경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능허.
그러고 보니 능허의 눈에는 금제의 전조가 나타나지 않았다.
“야. 넌 혈사문도 아니냐?”
“저, 저는 외부에서 영입됐습니다. 조만간 혈사문의 본문으로 가서 입교 절차를 밟을 예정이었습니다.”
“많이 변했네. 혈사문이 외부 인물도 받아들이고. 아, 그래서 금제를 거는 건가?”
400년의 세월을 지나 모습을 드러낸 혈사문은 많은 게 변해 있었다.
외부 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커질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비밀 유출 우려가 커진다. 그걸 막기 위해 금제로 억압하는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천무백은 다른 발상이 떠올랐다.
그는 무심하게 능허에게 말했다.
“살고 싶냐?”
“네.”
“정말?”
“정말, 살고 싶습니다.”
쾅!
단 한 번이었다.
애석하게도, 능허가 총관에서 연화루의 루주가 되는데, 본래 루주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하기도 전에 머리가 바닥에 굴렸으니까.
“이제부터 네가 여기 대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