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1화>
11. 대가리 나오라고 해!
천무백은 불현듯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전생, 그 숱한 전생들 중 아주 초창기 말이다.
철이 귀하던 시절.
아직 무공이며 내공이며 정립되지 않던, 무림의 태동기 이전.
천무백은 살기 위해서 검을 잡았다.
그를 노리는 수많은 야만인, 포악한 짐승들, 화적들로부터.
‘지금 생각하면 검이라고 표현하기도 그렇지.’
뭉툭한 철 덩어리라고 해야 하나.
짐승이나 사람을 베는 무기가 아니었다.
‘몽둥이였어. 몽둥이.’
그냥 철로 만든 몽둥이였다. 베는 게 아니었다. 적을 두들겨 뭉개는 것이 당시 시대와 기술의 한계였다.
하나 천무백은 그 짓거리를 단 한 번의 삶 동안만 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검 하나만 휘둘러도 깨달음을 얻는 법인데.’
하물며 천무백은 몇 번의 전생을 거쳐 오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다 보니 깨닫는 바가 있었다.
뭉툭한 날로도 적을 베어야 했다.
그러면 정확하고, 힘을 집중해 단칼에 베어야 했다.
단 일검에 상대의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고도의 정신력과 집중력, 완벽한 힘의 분배와 집중으로 파괴력을 만들어야만 했다.
천무백은 한 번의 생에 수십 년을 살면서 초식을 하나씩 완성했다.
당연히 그 생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었기에 하나하나의 완성도도 높았다.
고작 초식 하나에 수십 년의 연구와 노력, 경험이 녹아드는 것이다.
아무리 뭉툭한 검이어도, 날이 없는 죽은 검이어도 상대를 벨 수 있는 하나의 초식.
천무백은 그걸 세 번의 전생을 거쳐 세 개의 초식으로 완성하여 정립했다.
그때 처음으로 천무백은 검을 잡으며 끝 모를 고양감을 느꼈다. 다른 이의 손에 들리면 적을 베지도 못하는 몽둥이가, 제 손에만 들리면 희대의 명검이 된 듯 상대를 단숨에 베어 넘겼으니까.
수많은 양민이 야만인들을 피해 천무백의 곁으로 모였다.
천무백의 보호를 받던 사람 중 누군가 물었다.
“그 신묘한 검술은 대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적이 단 한 칼에 피를 철철 흘립니다.”
“우리가 쓰는 검은 적을 이렇게 깔끔하게 베지 못합니다.”
천무백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 무학이란 단어 자체가 생기지 않았던 때였다.
무공이며, 내공이며 그 모든 것들이 성립되지 않던 시기.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움집에서 살면서 겨우 농사를 하며 입에 풀칠이나 하던 야만의 시대.
천무백은 자신의 검을 바라봤었다.
신묘한 검술은 아니었다.
오로지 상대를 베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검.
단 세 번 안에 상대를 베어야 본인이 안전하니, 오로지 세 개의 초식만 연구했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베고.
단 한 번의 찌르기로 심장을 터뜨리는 검법.
천무백은 한참 생각하다 답했다.
“단 세 초식 안에 상대를 제압해야 하니, 삼재검이요.”
삼재검의 탄생이자,
삼재검성이라고 불리던, 강호무림의 태동을 알렸던 전설적인 무인의 등장이었다.
* * *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리면, 조그마한 증거로 억지로 합리화하는 경향이 사람들에겐 있다.
허성도 그러했다.
‘도련님이 삼재검성의 후인이었단 말인가?’
삼재검성의 전설은 강호에서 유명하다.
괜히 전설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무림이 태동하던 시기에 등장했던 무인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에 와서 평가하길, 당시엔 내공이란 개념이 없었으니 삼재검성도 실제론 절정에도 미치지 못한 무인이라는 게 지금의 중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삼재검성의 전설은 강호에서 꾸준히 되풀이됐다.
‘무림공적으로 몰렸던 검마도 삼재검성의 삼재검을 썼었단 얘기도 있었지.’
비단 검마뿐만이 아니다.
200년 전, 400년 전, 500년 전.
강호 역사에 숱하게 등장했던 고수 중에 삼재검성만의 강력한 삼재검을 쓴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호를 전율케 했던 고수들이었다.
‘하나같이 모두 삼재검성의 후인이란 의심이 있었지.’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성격이 좀 지랄 맞았다던가.’
그냥 포악하다기보단.
좀 갈피를 잡지 못했단 속설이 있다.
때론 불같이 탈 때도 있고, 때로는 북해빙궁의 얼음보다 차가울 때도 있다고 하고.
하여간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했는데, 하나같이 일반적인 삼재검과는 달리 삼재검성의 파괴력 있는 삼재검을 썼었다.
그러니…….
‘혹시 도련님이 정말 삼재검성의 후인이란 말인가?’
무림 태동기부터 내려져 온 삼재검성의 삼재검을 천무백이 이었다면?
그러면 지금의 상황도 얼핏 이해가 된다.
‘예악에 집중하며 방안에 틀어박혔지. 사실 도련님이 방안에서 정말 무얼 했는지 모르지 않나?’
무려 16년 동안 말이다.
아니지. 말문이 트인 시절부터 방안에 틀어박혔으니 거의 10년이다.
그동안 삼재검성의 무공을 익혔을지도 모른다.
물론 스승과 어떻게 접촉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삼재검성의 후인쯤 되면 표사들의 시선을 피해서 방 안으로 숨어드는 건 일도 아니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허성은 몸이 떨렸다.
‘하면 방금 전 어조와 눈빛 분위기도 일견 이해가 간다.’
삼재검성의 후인으로 의심되는 고수들은 하나같이 괴팍한 성정으로 유명했다.
하면 천무백이 약재상에서 보여 준 폭력적인 모습은 일견 이해가 간다.
‘그럼 장 표두님에게 무공을 배우겠다는 건, 이제 더 숨기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겠단 의미인가.’
허성은 열여섯이란 천무백의 나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잠깐. 삼재검성의 후인이라고 의심되던 검마도, 열 여섯때 강호에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그 유명한 비무행을 했었지!’
비단 검마뿐이었던가?
‘산동검호 위천악! 그 역시도 열여섯 때 산동을 검 한 자루로 제패했었다! 그도 삼재검성의 후인이란 의심이 있었고!’
허성은 전율했다.
반신반의했던 가설이 점점 머릿속에서 착착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닌가.
만일 지금 허성의 머릿속을 천무백이 읽었다면, 꽤 놀랐을 거다.
실제로 삼재검성, 검마, 산동검호.
모두 천무백의 숱한 전생들 중 하나였으니까.
비록 다소 오해가 깊었지만, 의외로 허성은 진실의 핵심을 짚은 것이다.
하여튼 이로써 허성은 천무백의 모든 행동을 이해했다.
그리고 천무백을 향한 의심을 지워 버렸다.
삼재검성의 후인이라니.
비록 표사에 불과하지만, 그 역시도 한때 무림고수를 열망했던 남아가 아니었던가.
“들어갑시다, 허 표사.”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주군!”
“……주군?”
천무백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허성은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기루 안으로 들어갔다.
* * *
‘수족이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본래의 천무백의 성정은 숱한 전생을 살아온 천무백과 맞지 않는다.
지극히 내성향이면서 오로지 예악에만 몰두하는 특이한 성정이 아닌가.
하니 천무백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화감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천무백이 검극에 도달하기 위해선 강호 풍파에 뛰어들어야 한다.
하면 기존의 천무백의 성정이라면 힘들다.
내성적이고 예악에만 관심 있던 아이가 갑자기 강호에 뛰어든다?
그것을 어찌 받아들이겠는가.
알게 모르게 천무백은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노력 중이었다.
천무백은 은근슬쩍 몸종인 점박이 앞에선 본래 성격을 드러냈었다. 말투나 분위기 같은 거 말이다. 점박이는 점점 그런 천무백의 모습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젠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녀석이니.’
발목을 치료해 준 순간부터 점박이는 단순한 몸종이 아니라 심복 그 이상이 됐다.
자신의 모든 걸 보여 줘도 문제없는.
그래서 약재상에서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다만 걸리는 게 바로 이 허 표사였는데.’
사실 여차하면 협박이라도 할 속셈이었다.
괜히 어디 가서 있었던 일 떠벌리지 말라고.
한데 스스로 알아서 주군이니 뭐니 하면서 기루에 들어가자마자 싸움을 걸어오는 놈들을 족족 베고 있지 않은가?
여러 전생을 거쳐 오며 자연스레 사람을 보는 눈도 같이 길러졌다.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며 충성하는 인물에겐 극진할 터. 직감으로 느껴졌으며 확신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게 급한 게 아니니 우선 내버려 두자. 당장은 쓸모가 있어 보인다. 혹 손해를 보일 낌새가 보이는 순간 바로 처리하면 되니.’
수족처럼 부리면서 곁에 둘 만한 사람이 있으니 천무백의 입장에서야 편하다.
천무백은 기세등등하게 덮쳐 오는 기루의 기둥서방들을 베어 넘기는 허성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혈사문이 맞긴 하는데.’
혈사문.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무림에 흉사를 일으켰던 사교 집단이었다.
뱀을 신으로 모시는 괴상한 놈들이었지.
‘이렇게 약한 놈들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기둥서방들은 단순 건달이 아니었다.
제법 내력도 쌓았다. 하나 기껏해야 이류 수준이니, 허성이 충분히 처리할 정도였다.
상황이 변한 건 다음이었다. 달려들던 기둥서방들 뒤로 애꾸눈 사내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연화루 총관 능허입니다.”
“능허?”
“예. 원래 총관이 실종되고, 저 양반이 연화루 총관을 꿰찼죠.”
“알만 하군.”
허 표사의 설명에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루를 하도 드나들어 내부를 샅샅이 아는 허성 덕택에 금세 핵심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뭐냐. 너. 청성표국의 그 표사 놈 아니냐? 뒤에 있는 애송이는 그 철부지 막내고?”
능허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허 표사! 오늘 죽으려고 온 것이요?”
순간 능허의 주위로 무시무시한 기세가 쏟아졌다.
한쪽 눈은 눈매가 쭉 찢어져서 인상이 아주 더러웠는데, 그 얼굴로 분위기를 잡고 내력을 아낌없이 드러내니 당당하던 허성이 일순 주춤했다.
그럴 수밖에.
‘허. 이래야 혈사문이지. 일류 막바지? 아니. 절정을 코앞에 두고 있군.’
허성과 수준은 엇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기세가 남달랐다.
천무백이 앞으로 나섰다.
“죽으려고 온 게 아니라 죽이려고 온 거지.”
“허. 이 빌어먹을 아가씨가 갑자기 사춘기가 오셨나.”
“아가씨?”
“얼굴도 반반하고 허리도 가느니, 우리 기루에서 기생으로 일하는 게 어때? 듣기론 악기도 잘 분다면서? 딱 기생짓 하기 좋구만.”
“와. 이거 색다르네.”
하, 어이가 없네. 어이가.
진심으로 색다른 기분이다.
“내가 살다 살다 아가씨니, 기생짓이나 하란 소리를 듣네. 와. 진짜 오래 살면 억울하구나.”
“오래 살면? 골골댄다더니, 정신이 나간 거였나?”
그때 천무백이 손가락을 퉁겼다.
상단전에서 터져 나온 공력이 손끝에 몰렸다. 천무백은 망설임 없이 지풍을 날렸다.
쌔액!
능허가 화들짝 놀라 검을 뽑았다. 그러나 지풍이 먼저 검을 뽑으려던 능허의 손목에 작렬했다.
푸악!
“끄윽!”
능허가 비명을 내지르며 피가 철철 흐르는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손목의 절반이 날아갔다.
천무백은 손가락을 튕기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자. 지금부터 한 발짝이라도 떼는 놈들은 손목이 아니라 머리가 날아간다.”
“……!”
주위에 있던 기둥서방들이 딱딱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통했군.’
사실 천무백으로서도 싸움이 길어지면 귀찮은 일이다.
이제야 겨우 근맥을 잇고, 내공을 쌓기 시작했다. 무리하면 여길 다 제압하는 건 정말 일도 아니다. 아주 쉽다. 문제는 ‘무리’하면 정말 몸에 큰 무리가 갈 수 있단 사실이다.
하여 빠르게 지풍을 날려 최소한의 내력으로 능허의 오른손을 날려 버렸다.
허리춤에 놓인 검의 위치, 발의 위치, 허리의 움직임을 보건데 놈은 오른손잡이다.
‘하면 이 녀석은 이제 허투루 덤비지 못하고.’
이 무시무시한 장면을 지켜본 기둥서방 놈들도 천무백의 무위에 질린 상태라 감히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단 한 번의 판단과 행동력으로 주위를 압도한 천무백은 왼손으로 검을 꺼내 드는 능허를 바라봤다.
스릉!
“능허야, 이제 오른손으로 칼을 못 드니, 분이나 쳐바르고 기생짓이나 하는 게 어때? 얼굴이 개떡 같아서 그것도 못 할 일이다만, 검무라도 추면 기생짓 해 먹을 만하지 않냐?”
“이익!”
“에휴, 이 자식아.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검 든다고 뭐가 되냐? 너 인마. 혈사문에서 밥 빌어먹는 놈이면 상황파악이라도 잘해야 할 거 아니냐.”
능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정체까지 눈치채고 있다니.
“원, 원하는 게 뭐요!”
“네가 여기 대가리냐?”
“뭐?”
“이거냐고, 이거.”
천무백이 엄지를 까딱거렸다.
능허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졸개 놈한테 물어봤자 나올 것도 없고. 원래 이런 건 대가리를 쳐야 되거든. 대가리 나오라고 해.”
“……!”
능허가 굳은 채 아무 말 하지 않자, 천무백은 주위에 있던 기둥서방들에게 소리쳤다.
“자. 너희들은 이제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어디 숨어 있는 네놈들 대가리를 데리고 오거나. 아니면 여기서 멀뚱히 서서 능허 이놈이 팔다리 하나씩 잘려나가면서 죽는 꼴을 보던가.”
그 말에 능허가 비명처럼 외쳤다.
“당장 루주님 모시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