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9화>
9. 어디서 개수작이야?
“점박아, 출타 준비하거라.”
“네?”
“이 약재상좀 다녀와야겠다.”
“도, 도련님, 이 밤중에 굳이…….”
점박이는 진중한 천무백의 표정을 보곤 말끝을 흐렸다.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그의 도련님은 무척 고집이 셌다.
하긴, 그래서 16년 동안 온갖 잔소리 들어가면서도 악기와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겠지.
최근에 그 고집이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점박이는 지금 천무백의 외출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면, 같이 갈 호위로 표사분을 빨리 데리고 오겠습니다요.”
“호위?”
“지금 부국주님이 아시면 분명히 못 나가게 막을 겁니다요. 이 시간에 외출이라니요. 하니 도련님도 몰래 나가시려는 속셈 아닙니까요?”
천무백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아무래도 아직 천무백을 품에 안아야 할 막내 취급하는 천유하이니, 이 저녁에 나가는 걸 쉬이 허락지 않으리라.
설령 허락하더라도 이유가 조금 미흡하다. 갑자기 약재에 독이 있으니 찾아가겠다니. 그런 건 표사들을 시켜야 마땅하다.
허나 천무백은 본인이 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평범한 독초가 아니다.
‘이런 걸 만드는 놈이라.’
강호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을 때가 왕왕 있다.
이 독초도 그렇다. 적어도 천무백의 머릿속에 있는 게 맞다면, 천무백은 확신했다.
이 독초 뒤에 무언가 있다고.
그러니 결국 은근슬쩍 나가야 하는데…….
“호위와 동행해야 다음에 발각되더라도 변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요.”
천무백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점박이를 바라봤다.
제법 똘똘하다.
“점박아, 원래대로라면 누님이나 아버님 말씀을 더 따라야 하는 거 아니냐?”
“제 발목을 치료해 준 은인은 도련님입니다. 물론 국주님과 부국주님도 절 거둬 준 은인이시지만…….”
점박이의 얼굴에선 설령 지옥이라도 쫓아가겠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천무백은 실소했다.
마치 자신을 뒤따르던 마지막 제자 놈 같지 않나.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확인만 하고 올 생각이니, 호위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
“네. 도련님.”
점박이를 내보낸 천무백은 곧장 의복을 갖춰 입었다. 발을 절지 않게 된 점박이의 행동은 무척 빨랐다. 천무백의 무복을 다 갈아입고 출타 준비를 마치자마자 땀을 뻘뻘 흘리며 점박이가 금세 돌아왔다.
“도련님, 허 단주님을 모셔왔습니다요.”
“허 단주? 뭘 단주씩이나…….”
천무백은 혀를 쯧쯧 차고 방을 나갔다.
* * *
허성.
청성표국 청월단의 단주 허성은 점박이가 급히 천무백의 호위를 맡아 줄 표사를 찾을 때 직접 나섰다.
우선 휘하에 표사들이 수련을 마치고 지친 상태이기도 했으며, 멀쩡한 녀석들은 근처 황가장의 경비를 맡고 있었으니 사람이 본인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이건 표면적인 이유였고, 그가 나선 속내는 천무백을 직접 옆에서 관찰하고 싶어서였다.
‘총표두님의 표정을 보면 예사롭지가 않았어.’
떠도는 이야기로는 천무백이 제법 무공에 재능이 있다더라는 소문도 있다.
믿기 힘들었다.
허성 역시 청성표국에 오래 있었고, 천무백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그 허약하던 철부지가 재능이 있다고?’
사실 콧방귀를 끼지 않았나.
하나 직접 실제로 본 천무백은, 한 달 전 방안에 틀어박혀 있던 천무백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 보였다.
가느다란 팔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제법 튼실한 근육옷 너머로 은근히 윤곽이 잡혔다.
그뿐인가. 얼굴엔 살짝 홍조가 돌아 생기가 넘쳤고, 두 눈에선 마주보기 힘들 정도로 맑은 기운이 흘렀다.
불과 한 달 만의 변화다.
‘이 정도 변했다면 정말 몸 쓰는데 재능이 있다는 건데? 뿐이야? 장 표두님 수련을 버틸 정도면 인내심도 강하다는 거고.’
허성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하필 천무백의 심사가 좋지 않아 절로 퉁명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데, 허성은 그저 가볍게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도련님. 갑작스러운 출타라니요. 혹 저번에 보신책 다음권이라도 구하려고 그러십니까?”
“책?”
“왜, 저번에 점박이한테 심부름시키실 때, 제가 시중에 돌아다니는 군담록(軍談)중에 재밌는 거 하나 추천해 드렸지요. 의원종횡이라고.”
천무백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허황하고 어처구니없는 군담록 따위.
수백 년간 강호를 종횡했던 천무백에게 군담록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어설펐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방안에 의원종횡 같은 제목의 어설픈 군담소설들이 많았었다. 돌아가는 대로 다 치워야겠다.
“책방에 가는 게 아니요.”
“아하, 그럼 악기점에 가십니까? 이 시간이라면 악기점은 문 닫았을 터인데.”
“아니, 약재상으로 갑시다.”
“약재상이요?”
“문 닫기 전에 갑시다. 시간이 늦었으니.”
점박이를 앞세운 천무백이 성큼 걸었다.
허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뒤를 따랐다.
* * *
“흐음. 원래 여기가 이렇게 유명한 곳이냐.”
“우리 청성표국뿐만 아니라 관에도 납품하는 곳입니다요.”
“그래?”
“그래도…… 이렇게 사람을 몰린 걸 보니, 아마 최근 역병에 대한 소문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역병이라.”
천무백은 점박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규모가 있는 약재상은 근방에서 보기 힘든 3층 건물이었다.
얼핏 봐도 건물 안에 사람이 가득해 보였는데, 밖에도 사람이 바글댔다. 어디 제법 끗발 있는 집안의 하인들도 상당해 보였다.
이런 곳에서 독초가 나왔단 말이지.
‘냄새가 난다. 냄새가.’
아주 구린내가.
천무백은 점박이를 앞세워 약재상으로 들어갔다.
약재상으로 들어가자 천무백을 본 주인이 화들짝 놀라 튀어나왔다.
주인은 약간 축 늘어진 눈매 때문에 사람이 좀 어수룩해 보였다.
그러나 이만한 약재상을 운영하니, 사람이 어수룩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이고, 청성표국의 천 도련님 아니십니까? 여까지 어쩐 일로. 몇 시진 전에 진 의원이 직접 약재를 사갔는데…….”
“그래. 내 그 약재 때문에 확인할 게 있어서 왔네.”
“약재 말입니까?”
고개를 갸웃하며 능청스럽게 반응하는 주인의 표정.
남들이 보면 특이할 게 없었다.
실제로 점박이와 허성도 특이점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천무백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새끼 봐라?’
약재 때문에 왔다고 얘기한 순간, 주인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그 너머로 사특한 기운이 느껴졌다. 천무백만이 그 짧은 찰나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천무백은 능청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주인이 조금 얼떨떨한 기색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사람이 많군.”
주위를 둘러본 천무백의 말에 주인이 헤실거리며 말했다. 누가 봐도 어수룩한 표정이었다.
“요즘 흉흉한 소문이 돌지 않습니까.”
“흉흉한 소문?”
“네네. 섬서성에서 시작된 역병이 얼마 전에 령보현에서도 환자가 나왔단 소문이 싹 퍼졌습니다.”
령보현이라면 하남성의 서부에 있었다.
섬서성과 인접한 곳이었다.
“역병이라. 그래서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어휴. 죽겠습니다요. 일단 몸을 보하는 약재를 찾는 사람들이 많으니. 안 그래도 여기가 원양현에서 최고 아닙니까? 하하! 걱정하지 마십쇼, 도련님. 제 약재상의 약재는 역병까지 물리칠 겁니다!”
천무백이 빤히 주인을 바라봤다.
사실 분위기를 잡을 때 침묵만큼 좋은 건 없었다.
천무백이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자,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해진 걸 느낀 약재상 주인이 웃음을 싹 거둬들였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그럴 리가.”
천무백은 새하얗게 웃었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네?”
“여기가 근원이잖아?”
“근원…… 이요?”
“역병의 근원 말이야. 여기서 구리고 역한 냄새가 폴폴 풍기는데?”
그 순간.
약재상 주인의 눈동자에서 사특한 빛이 다시 한번 번뜩였다.
* * *
“하하…… 하. 도련님, 그게 도저히 무슨 소리이신지.”
하나 이번에는 천무백이 나서기도 전에 허성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재빠르게 천무백의 옆을 점하면서 검집에 손을 올렸다.
이번만큼은 천무백뿐만 아니라 허성도 약재상 주인의 변화를 똑똑히 봤다.
‘살기?’
사특한 빛과 함께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살기.
이번엔 너무 노골적이어서 천무백뿐 아니라 허성도 눈치챘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와중에 천무백이 여유롭게 웃으며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손님이 왔는데, 차라도 대접하는 게 보통 예의가 아닌가?”
“…….”
한없이 여유로운 표정.
약재상 주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곤 손짓했다.
곁에 있던 직원 하나가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차를 준비하러 2층으로 내려갔다.
불편한 침묵이 계속됐다.
허성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 자세를 취했다.
그도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눈앞의 약재상 주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하물며 천무백은 어떤가.
역병의 근원이니 이상한 말을 하고, 거기에 약재상 주인이 살기를 드러낸 걸 보면 무언갈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한데 너무 위험한 게 아닌가?
이제 겨우 몸을 사람답게 단련하는 중인데, 혹 군담록을 읽다가 좀 망상에 빠지기라도 한 것이란 말인가.
허성은 여차하면 여기서 약재상 주인을 베고 천무백을 데리고 도망칠 궁리했다.
‘바로 놈을 베고 도련님을 업고 빠져나간다. 만일 놈이 숨긴 한 수가 있다면, 여기 직원들도 안심 못 해.’
그는 재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요인 보호 및 경비를 맡는 청월단의 단주답게 그는 천무백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했다.
‘은근슬쩍 손님을 내보내고 있군. 자. 정문에 둘. 2층에 하나. 1층에 셋. 3층에 둘. 흐음.’
단순 불량배인지, 아니면 내공이 있을지는 모른다.
불량배면 무리 없이 나갈 수 있겠으나…….
‘여차하면 도련님만 구해야겠군.’
그는 다소 미안한 눈빛으로 점박이를 흘겼다.
여러모로 일머리가 좋은 녀석이라 한낱 몸종이지만 다 점박이를 좋게 생각한다. 허성도 마찬가지고.
하나 절름발이인 점박이의 몸까지 내빼는 건…….
‘응? 절름발이?’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오면서 발을 절던가?
순간 생각에 빠진 사이.
차를 가지러 가던 어색한 표정의 직원이 찻잔을 들고 다가왔다.
그때였다.
“……!”
차를 가지고 온 직원이 차를 엎어 버렸다. 순간 반사적으로 허성의 손이 움직였다.
찻잔 밑에 숨겨진 새하얀 단도.
그 단도가 천무백의 목젖을 향하는 순간, 허성의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발검과 동시에 직원의 손목을 매끈하게 잘라 버렸다.
허성은 겨우 놀란 숨을 들이켰다.
하나 그건 함정에 불과했다.
‘아뿔싸!’
진짜는 바로 천무백과 마주 앉았던 약재상 주인이었다.
약재상 주인이 품에서 손목만 한 단도를 쑥 꺼내 벌떡 일어나며 쭉 찔렀다.
‘늦었다!’
직원의 손목을 자르느라 뻗어낸 검을 회수하기 전에 이미 천무백의 가슴에 칼이 박힐 터!
허성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때였다.
천무백이 일어나며 무릎으로 탁자를 벌컥 차올렸다.
푸욱!
약재상 주인이 힘껏 뻗은 단도는 나무 탁자에 막혔다.
동시에 천무백은 뒤집어진 탁자 너머로 손을 뻗었다.
“……!”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머리칼을 움켜쥔 천무백의 입꼬리가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