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7화>
7. 너, 나 못 믿어?
“……듣기 좋구나.”
아스라이 들려오는 아름다운 선율에 천문경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매일 같이 연주 소리가 들려오니, 참. 이 시간대만 되면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는구나.”
천문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을이지는 시간.
이 시간이 되면 천문경과 천유하는 하던 업무를 모두 미뤄놓고 조용히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원래부터 이렇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됐는데, 바로 지금 들려오는 대금 연주 덕분이었다.
“확실히, 무백이는 악사가 될 자질인가 봐요.”
“귀가 즐겁고 지금껏 해 왔던 고민까지 모조리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데, 적어도 하남제일악사는 아니겠냐.”
“하긴, 이렇게 차 마시는 것도 저 연주를 감상하려고 한 거니까요.”
천유하의 말에 천문경은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한여름이라 활짝 열어놓은 문 바깥으로 표국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담장 너머에서 표사들은 선선히 부는 바람 곁에 들려오는 연주를 들으며 수련하며 쌓인 피로를 씻어 냈다.
마당을 쓸던 하인들도 잠깐 휴식이라도 맞이한 것처럼 한쪽에 자리 잡아 대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창고를 정리하던 쟁자수들도, 음식을 준비하던 찬모들도.
하나같이 얼굴에 편안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보기 좋구나.”
보기 좋다.
천유하는 표국의 모습에 절로 흐뭇해졌다.
흐뭇한 감정이 절로 이는 건 비단 아름다운 선율과 평화로운 광경 때문은 아니었다.
“매일 수련이 끝나고 음악소리가 들려오는데, 하면 정말 무백이가 열심히 제 몸을 단련하고 있다는 얘기겠지.”
“하루도 안 빠지고 열심이에요.”
“장 노인이 많이 칭찬하던데?”
“이게 진실인지 모르겠어요. 타고난 오성이라고 아주 칭찬하던데요?”
“이러다가 진짜 하남제일무인이라도 되는 거 아니겠느냐?”
“…….”
어휴, 팔불출.
천유하는 아들 자랑에 푹 빠진 아비 모습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사실 그녀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장노가 너무 호들갑 떨면서 천무백을 칭찬하기에, 살짝 의심이 들기도 했다. 열심이다 못해 천부적인 재능이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 재능은 둘째치고도, 노력하는 천무백의 모습에 천유하는 퍽 감동하였다.
그간 답답하던 천무백이 변했다. 사실 일전의 천무백도 좋다. 그녀의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막내동생이니까. 다만 무공을 익히며 변화하면서 건강해지고 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천유하는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표국은 최근 표행 실패로 큰 문제를 맞이한 상황. 온종일 머리를 감싸 매고 고민하는데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천무백의 연주 소리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잠깐이나마 머리조차 식힐 수 없었으리라.
“하면, 내가 다녀오는 사이 무백이와 남은 표국 식구들을 잘 부탁하네, 부국주.”
문득 천문경이 말했다.
굳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부국주란 호칭을 부르는 것.
천유하는 굳은 얼굴로 끄덕이며 천무백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남제일무인이든, 하남제일악사가 되든.
천유하는 들려오는 연주의 끝을 감상하면서 결심했다.
‘무백이가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도록, 이번 위기를 잘 이겨 내야 해. 반드시.’
* * *
점박이는 묘한 시선으로 대금을 내려놓는 천무백을 바라봤다.
‘대금 불 때는, 진짜 영락없는 막내도련님인데 말이야.’
만면에 가득한 미소.
곡선을 그리는 눈썹과 대금을 불면서 살짝 달아오른 옅은 홍조까지.
열병을 앓기 전에 늘 보여 주던 천무백의 모습 아닌가.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캬, 죽여주네.”
점박이는 가자미눈을 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굳이 그러지 않는데, 유난히 자신하고 있을 때는 저런 모습이 튀어나온다.
“왜. 뭐.”
“……아닙니다요.”
“흠. 저녁 먹을 시간 안 됐냐?”
“바로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요.”
“오냐!”
천무백이 분명 상전이었지만, 이전에는 상전 같은 느낌보단 철부지 막내도련님을 모시는 느낌이 아니었나.
지금도 철부지 느낌이 나긴 하는데…….
이전과는 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노인네 모시는 기분이네, 이거.’
점박이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었다.
노인네라니.
저 어린 얼굴을 보고 어찌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뭐, 차라리 지금이 낫지. 건강해지는 게 한눈에 보이니까.’
절로 마음이 훈훈해졌다.
늘 새하얗게 질린 얼굴,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팔다리. 볼 때마다 이게 다 죽어가는 노인인지, 한창 돌도 씹어 먹을 청춘인지 분간이 안 갔으니까.
몸에 붙은 근육과 조금은 자란 듯한 키, 혈색이 돋는 얼굴색과 늘 당당한 태도와 자세.
누가 봐도 확연하게 바뀌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잘되면 좋겠다!’
점박이는 청성표국이 좋았다.
자신처럼 한쪽 다리가 병신인 장애인도 거둬 주고, 먹여 주던 곳 아닌가.
점박이는 자신이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다리 한쪽이 절름발이라 청성표국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표사로 쓸 수도, 쟁자수로 쓸 수도, 그렇다고 다른 일을 맡기기엔 글자도 모르지 않나.
천문경은 분명 인자한 사람이지만, 표국을 운영하는 위치에 있는 만큼 함부로 사람을 거둘 수 없었다.
인사가 재천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청성표국 마당에서 처량하게 비 맞으며 돌아가려던 순간.
일곱 살에 불과하던 천무백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그리곤 자신의 다리를 붙잡곤 말했다.
‘형아! 우리 숨바꼭질하자!’
당시 청성표국엔 천무백의 또래가 없었다.
천무백의 어머니는 일찍이 돌아가신 지 오래였고, 천유하는 일찌감치 상재를 발휘해 천문경에게 일을 배우고 있었으니까.
하물며 험한 표사들과 쟁자수들 뿐이고, 나머지는 기껏 해야 찬모들이나 천문경과 천유하의 시종들 아닌가.
그랬다. 천무백은 심심했던 것이고, 외로웠다. 또래가 없으니까.
그래서 기껏해야 자신보다 대여섯 많아 보이는 점박이를 붙잡았던 것이리라.
특별한 이유도 아니고 그냥 같이 놀자 붙잡는 손길.
그리고 자신과 놀아 주면 피리를 불어 주겠다면서 해 줬던 연주는 아직도 점박이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이후로 점박이는 천무백의 몸종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천무백을 은인으로 여겼다.
‘도련님…….’
아무리 한낱 몸종이어도 지금 표국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안다.
최근 표물을 잃어버린 표행 실패로,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천문경과 천유하가 아주 많이 고군분투 중이었다.
뜬소문으로는 자칫 표국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 표사들이 수군거렸다.
물론 점박이는 표국이 무사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간 보아온 천문경과 천유하의 수완이라면 말이다.
그래도, 만일 일이 심각해진다면.
점박이는 결심했다. 절름발이지만, 반드시 천무백만큼은 어떻게든 업고 도망쳐서 무사하게 만들겠다고.
* * *
“무슨 전장 나가는 장군 표정을 지어?”
천무백은 굳은 얼굴로 나가는 점박이를 보곤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밥 가지러 가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음.
하긴,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먹지. 그것도 한꺼번에 많이.
청성표국의 막내 도련님으로 환생한 게 좋은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원하는 대로 식단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
이전 삶에선 고아거나, 무관에 거둬들인 제자라 주는 대로 먹거나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하나 지금은 문제없었다.
청성표국이 대형 표국도 아니고, 엄청난 부호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표국을 운영하는 만큼 잘 먹고 잘사는 편이었다.
식단 정도야 우습게 구성할 수 있단 얘기다.
‘경천혼공으로 근골을 바꾸고, 내공을 쌓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꾸준히 단련과 식단을 통해 몸의 체질과 체력을 완벽하게 닦아야 한다.’
일반적인 무인들은 내력을 중시하지만, 천무백은 내공과 외공의 조화를 중시했다.
강호에서 수없이 사선을 넘다 보면, 내력이 바닥나는 순간은 분명 온다. 또는 여러 악독한 수로 단전이 다치거나 심각한 손상을 입을 때가 분명 있다. 강호란 그런 곳이다.
그때 위기의 순간에서 절체절명의 한수를 뽑아낼 수 있는 게 바로 외공이다.
비단 이런 이유뿐이 아니다.
‘무의 종점, 검의 끝에 이르기 위해선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어.’
누구나 검의 끝.
무학의 종점에 가길 원한다.
강호에 출도하는 무림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풍운의 꿈을 꾼다.
그건 천무백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천무백은 검신으로 강호인들에게 고금제일인이란 칭호를 받았으나, 저승길을 막아선 달걀이 말한 듯이 검극에 도달하지 못했다.
함부로, 그리고 무작정 나아갈 길이 아니다.
신중하게 포석을 하나씩 깔면서 나아가야 한다.
다른 이라면 쉬이 못 할 일이다.
천무백은 수없이 많은 전생의 경험과 기억이 있다.
단순한 기억도 아니다.
단순한 삼류무인에서 검마, 검성, 그리고 검신에 이르기까지.
검에 대한 모든 무학을 그대로 담은 기억이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천무백은 하나씩 준비해 갔다.
그런 면에 경천혼공은 아주 효과적인 무공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니, 상단전이 살아 숨 쉰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였다.
대금을 부는 순간 상단전이 거세게 꿈틀거렸다.
천무백의 날카로운 감각은 본능적으로 그 순간을 느끼고, 확신했다.
바로 지금이 경천혼공을 운기할 순간이라고.
대금을 불면서 경천혼공을 운기했다.
대금의 선율에 따라 내공의 흐름이 변했다. 빠른 곡조를 연주하면 빠르게 움직이며 쌓였고, 느리고 구슬픈 곡조를 뽑아내면 외기도 마치 눈물이 스며들 듯이 상단전에 스며들었다.
그 효능은 놀랍다 못해 대단했다.
축기뿐이랴. 기존 경천혼공의 효능처럼 근골과 체질이 서서히 바뀌었다.
점박이가 느끼듯, 천무백은 외적으로 봐도 상당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점점 근육이 붙기 시작하는 팔과 다리.
꼿꼿이 펴진 허리. 손가락 한 마디는 더 커진 키.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광까지.
이 모든 게 우연히 경천혼공을 깨우치게 된 것이었으니.
‘점박이 녀석 덕분이기도 하지.’
만일 그때 점박이가 기분이나 풀라고 대금이나 불러보라고 하지 않았다면?
물론 천무백은 언젠가 경천혼공의 효능을 살릴 방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건 자만감이 아니었다. 천무백의 머릿속에 있는 거대한 지식의 보고와 수백 년에 이르는 무림의 경험은 결국 반드시 경천혼공의 효능을 끌어올릴 방안을 찾았으리라.
그래도 점박이 덕택에 그 시간을 극도로 짧게 줄였다.
천무백은 점박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도련님, 상 올리겠습니다요.”
“오냐.”
마침 점박이가 저녁상을 들고 왔다.
천무백의 시선이 잘 차려진 저녁상에서 이내 점박이의 절뚝이는 왼발로 향했다.
‘음.’
듣자하니 어릴 때 살던 마을이 산적들에게 습격당하고, 간신히 몸만 빼내다가 무너진 기둥에 발목이 돌아갔다고 했던가.
천무백은 유심히 점박이 발을 살폈다.
‘뼈가 굳은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돌려놓을 수 있겠는데?’
완전히 정상인처럼 멀쩡하게 만들 수는 없어도, 절뚝이는 건 고칠 수 있겠다 싶었다.
천무백은 수백 년 동안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러다보니 위급할 때 스스로 제 몸 하나 치료할 정도의 의술을 가지게 됐다.
그런 그에게 점박이의 돌아간 발목 정도야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내 보답할 것도 있고.’
경천혼공의 효능을 깨우쳐 준 사람이고, 옆에서 퉁명스러운 자신에게도 살갑게 대하는 녀석이니까.
“점박아, 가서 침통(鍼筒)을 갖고 오너라. 표국에 상주하는 진 의원에게 받아오면 될 거다.”
“네? 침통이요? 갑자기 왜요?”
아니, 아무리 괴팍해진 도련님이지만 갑자기 웬 침통이란 말인가?
점박이가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하자 천무백이 손을 휘휘 저었다.
“어여 갖고 오너라. 내가 오늘 네 녀석 발목을 치료해 주마.”
“…….”
점박이가 가자미눈을 떴다.
마치 ‘미쳤나, 이 양반이’하는 글자가 머리 위에 떠올라져 있는 것 같았다.
“안 미쳤다. 내 침술을 조금 아니, 발목을 고쳐 주마. 이거 어디서 못 받아? 세상에 누가 나한테 침술을 받겠어?”
“당연합죠. 누가 돌팔이 의원한테 침술을 받습니까요?”
“뭐?”
“아니, 제 발목 더 돌아가면 아예 걷지도 못 합니다. 도련님. 왜 짓궂은 장난을 치십니깝쇼.”
“하!”
천무백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곤, 별안간 진지한 눈길로 점박이를 쳐다봤다.
“야.”
“네, 넵?”
“너, 나 못 믿어?”
너무나 진지한 얼굴. 그래도 영락없이 귀여워 보이나, 막상 점박이의 얼굴은 울상으로 구겨졌다.
‘아니, 어떻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