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화 (3/318)

<검신재생 3화>

3. 경천혼공

청성표국의 국주 천문경은 오랜만에 당황스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천무백이 깨어났단 소식에 부랴부랴 표국에 오니,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장녀, 천유하가 상기된 얼굴로 쪼르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뭐? 막둥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네. 제가 이런 거로 왜 거짓말하겠어요?”

“허어. 그럴 리가.”

“아이, 진짜라니까요. 그 녀석이 갑자기 분위기 잡으면서, 강해져야만 누님과 우리 표국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막 이러는데…….”

천유하가 방금 있었던 일을 쏟아내자 천문경의 표정이 일순 샐쭉해졌다.

“다시 말해 보아라.”

“네? 아, 무백이가 막 말이죠. 딱 무릎 꿇고, 담담하게 웃으면서 누님과 우리 표국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는 데 와. 순간 얘가 벌써 장가갈 때가 됐나 싶었다니까요.”

“허.”

천문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아빠? 왜 그러세요?”

“무백이 이놈이…….”

“어, 혹시 무공을 익히겠다고 해서 그러신 거예요? 물론 무공을 익히는 게 좀 위험하긴 하지만”

“어째서 제 아비는 쏙 빼먹었지?”

“네?”

“왜 제 누님하고 표국만 지키겠다고 말한 거야? 애비는 안 지켜?”

천문경은 뚱한 시선으로 입을 꾹 오므렸다.

“아빠,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는 무슨!”

천문경은 못마땅한 것처럼 팔짱을 꼈다. 그 모습에 천유하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청성표국을 이만큼 이끌어 온 천문경은 천유하에게 있어 존경스러운 아버지이자, 대단한 사람이었다.

한데 그런 천문경은 표국 사람들이 모두 ‘막내바보’라고 할 정도로 팔불출이었다. 천문경의 반응에 천유하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천유하가 비롯해 엄하게 대한다고 해도, 사실 그녀도 막내바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다 문득 천문경이 팔짱을 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백이 그놈이 말이다. 갑자기 무공을 익히겠다면서 표국을 지키겠다고 한 거. 혹시, 지금 표국 상황을 눈치챈 거 아니겠지?”

“음. 설마요. 무백이 깨어난 지 이제 하루 지났고, 그전에도 아빠가 집에 있는지 표행을 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표국 일에 관심이 없었는걸요?”

“잠깐만. 그건 표국 일이 아니라 애비한테 관심이 없는 거 같은데?”

천유하는 뜨끔했지만 애써 말을 돌렸다.

“아무튼, 표국 상황은 잘 모를 거예요. 아니, 확실한 건 그건 모를 거예요.”

천유하의 확신 어린 어조에 천문경은 다시 팔짱을 끼곤 눈을 가늘게 떴다.

“하면, 무백이가 왜 갑자기 저러는 거 같느냐?”

“글쎄요. 정말로 한번 아프고 나니 정신 차린 것일 수도 있고요.”

“요번처럼 크게 앓은 적은 처음이지만, 그전에도 늘 골골거리던 애가 아니냐.”

“사실 어떻게 알겠어요. 그나마 추측해보면, 음 멋있어 보여서가 아닐까요?”

“멋있어 보여서?”

천문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무백이 나이가 이제 열여섯이잖아요.”

“열여섯…… 그게 무슨…… 아. 하긴 그 나이대라면.”

“사춘기가 왔을 수도 있죠.”

“사춘기라.”

“보통 그 나이대 소년이면 다 그렇잖아요. 멋있는 거 좋아하고. 하물며 애는 표국에서 본 사람들이 늘 칼 차고 다니는 표사들인데 말이죠.”

“하면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

“네. 안 그랬으면 왜 꼭 집어서 무공을 배우겠다고 했겠어요? 그냥 운동하겠다고 했겠지.”

천문경이 그럴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표국 일도 가르쳐보는 게 어떻겠냐?”

“표국 일이요?”

“무백이가 표국 일에 재능이 있으리라곤 여기진 않지만, 나는 자칫 이게 잠깐의 외유에 불과할까 봐 걱정되는구나.”

천유하는 사사로이는 천문경의 딸이었지만, 표국의 부국주기도 했다. 표국과 관련된 일이라면 누구보다 엄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표국 일에 아무런 재능이 없다.

무공? 지금이야 익힌다고 하지만, 표사들처럼 쓸 만한 수준이 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리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근골로 가능이나 할까?

아니면 쟁자수?

그건 싫다. 쟁자수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막냇동생을 단순히 짐꾼으로 부릴 바엔 그냥 하고 싶은 악기나 실컷 연주하게 하는 게 낫다.

하면 실무 협상을 비롯해 표행을 총괄하는 건?

애석하게도 이쪽에도 재능이 없다.

음악과 그림, 예술엔 엄청난 흥미를 보이고 재능마저 있지만, 숫자엔 영 젬병이고, 누군갈 통솔하거나 지휘하는 것도 하지 못한다.

하면 따로 표국 일을 맡길 만한 게 없다.

그러나 천유하는 천문경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가 됐다.

오랜만에 방 밖으로 나와 무언가 해보겠다는 막내다.

매일 방에 틀어박혀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면…….

천문경은 이대로 막내가 변하길 원할 것이다.

천문경도 진지하게 표국 일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표국에서 일하면서 천무백이 차츰 바뀌길 원하는 것이리라.

천유하는 한참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무슨 일을 맡길지는 좀 더 생각해 봐요. 하지만, 그전에 일단 무백이가 확실히 건강 좀 챙긴 다음에요.”

“그래, 그건 그래야지.”

“지금 몸 상태면 아무것도 못 맡겨요. 안 그래도 본인이 무공을 배우겠다고 했으니까, 최소한 건강은 챙기고 일 맡겨요.”

“알겠다. 장표두는 내가 얘기하마.”

천유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사춘기 동생의 잠깐의 흥미가 아니길 바랐다.

무공을 익히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것이 도움이 된다면야.

‘조금이라도 바뀌면 좋겠어.’

* * *

점박이는 하루 이틀 사이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니, 무공 배우는 거야 좋다는 말입니다. 근데 너무 이른 거 아닙니까요, 도련님. 병상에서 일어났는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무공은커녕,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밖에 하지 않았던 천무백이다.

갑작스레 무공을 배우겠다니. 말투부터 하는 행동까지. 영 갈피를 잡기 힘들다.

“어차피 할 일인데, 미룰 게 뭐가 있어? 봐봐. 온몸의 근육이 찌뿌듯해.”

“근육이요? 어디요?”

근육은커녕, 만지면 순두부처럼 말캉말캉한 피분데.

한번 콕 찔러보고 싶다.

천무백 본인도 근육이 없다는 걸 아는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음. 잘 찾아보면 어딘가 있겠지.”

아주 잘 찾아야겠는데.

“갑자기 근육은 왜 그러십니까? 무공도 갑자기 배우신다고 하시고…….”

“내 평소 몸이 안 좋아 아버지와 누님에게 걱정만 끼쳤으니, 단련 좀 할까 그렇다.”

“허.”

점박이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굉장히 멋진 모습 아닌가.

다만 그것이 지금까지 천문경의 오냐오냐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악기만 연주하며 세월을 축내던 과거가 아니었으면 좀 진실성이 있었겠지.

뭐, 아무래도 좋다.

‘그래도 실성한 것보단 이게 낫지.’

점박이는 비록 툴툴댔지만,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막내도련님을 아주 좋아했다.

좀 불경스럽지만, 친동생처럼 느껴지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나.

그런 천무백이 달포 동안 열병으로 쓰러졌을 땐 정말 세상이 다 무너지는 줄 알았다.

스스로 몸을 단련하겠다고 하니, 그 열정이 언제까지 갈까 의문이기하다만 뭐 나쁘지는 않다.

점박이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천무백은 본인만의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검극이라, 검극.’

검신으로서 전생을 마무리할 때, 더는 오를 경지가 없으리라 여겼다.

자신도 검신이란 허명에 취했었는지 모른다.

강호에서 하도 검신이라 찬양을 해대니, 진짜 유일한 경지에 오른 것처럼 타성에 젖었던 거였지.

한데 다시 목표가 생겼다.

전생의 경지를 넘어서, 그 위에 또 다른 경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검의 끝.

저승길을 가로막는 달걀을 꺾을 때, 비로소 검극의 자리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터.

그러기 위해선 우선 몸부터 만들어야 한다.

“끙. 이 빌어먹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몸뚱이.”

“어허. 도련님, 그런 말 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시꺼! 쓰레기 같은 몸 보고 쓰레기 같다고 하지!”

“……어휴. 사춘기가 이상하게 오시네.”

“뭐?”

“아닙니다.”

점박이는 천연덕스럽게 무복을 준비했다.

천무백은 묘한 시선으로 점박이를 바라보다 이내 동경에 얼굴을 비췄다.

햇빛 한 점 보지 않아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점박이가 근육이란 말에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가느다랗기 짝이 없는 팔다리.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지 않고 삐걱거렸다. 자세 역시 구부정하니 좋지 않았다. 매일 허리를 구부려 그림만 그리거나, 악기만 줄곧 연구해 대니 자세마저 좋지 않았다.

하물며 예악에 한번 푹 빠지면, 식사도 거르는 게 일상이었으니 영양 상태도 무척이나 안 좋았다.

‘최악이야. 차라리 절맥이 나을 정도야.’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절맥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더 심각하게 느껴질 몸 상태였다.

절맥이라면 차라리 검신이 아는 방식으로 치료라도 할 수 있지.

이 상태라면 안 된다.

아무리 내공이 무공의 위력에 큰 중요도를 끼친다고 하더라도,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

가공할 내력이 있다 한들, 육체가 준비되어야 한다.

무공의 위력을 능히 발휘하려면 타고난 근골이 있어야만 한다.

근골, 근골 하는데 천무백의 기준은 한없이 높다.

한데 지금의 몸 상태라면…….

결국, 가장 시급한 건 기초체력이었다.

기초체력과 더불어 육신을 정비해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정도의 굳건한 육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사람다운, 사내다운 육신으로 갈고 닦아야 하지 않겠는가.

“점박아.”

“네, 도련님.”

“잠시 밖에 나가서 아무도 방안에 들이지 못하게 하거라.”

“네? 하면 식사는……?”

“내가 부를 때까진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천무백의 목소리가 다소 딱딱해지자 점박이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점박이를 내보낸 천무맥은 조용히 가부좌를 틀었다.

“염병할.”

자신의 몸을 한차례 관조한 천무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대로라면 수련해 봤자 몸만 축난다.”

무작정 몸을 단련한다고 강해지는 건 아니다.

허약하다 못해 좀만 건들면 끊길 정도의 터무니없이 약한 근맥.

여기에 무리한 운동이 가해졌다간, 오히려 장애를 평생 앓고 갈지도 모른다. 그만큼 천무백의 기본 근골과 근맥, 체질까지 모조리 엉망이었다. 이 상태에서 무작정 단련한다고 해봤자 오히려 몸만 축날 뿐이다.

천무백은 샅샅이 자신의 몸을 관찰했다. 근육의 움직임, 반응 속도까지.

수없이 무의 길을 걸어온 천무백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참 몸을 관조한 천무백은 결심했다.

‘우선 내공을 조금이라도 쌓아 놔야 해.’

그러니까 일단 몸을 보호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단련으로 인해 끊어질 근맥을 보호할 힘.

그게 바로 내공이다.

하나 아무것도 없는 몸에 내공을 쌓는다고 근골과 체질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끙.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근골이 형편없긴 해도, 아예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상단전이 완벽하게 열려 있다.”

일반적인 내공심법은 하단전에 축기한다.

그리고 중단전과 상단전에도 축기하는 심법도 많다.

한데 하단전에 축기하는 무공이 강호의 구 할을 차지하는 건, 그만큼 하단전의 개발이 쉽단 얘기기도 했다.

즉, 그 말은 중단전과 상단전은 애당초 활용하기 어려운,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빠지기 쉬운 위험성을 내포했다.

한데 천무백의 몸뚱이는 기이하게도 상단전이 열려 있었다.

과거 전생 중에 상단전을 활용한 내공을 가진 초절정 고수를 본 적 있었다.

내심 놀랬지만, 그땐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상단전 활용을 더 발전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천무백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상단전이라.

이거, 예상치 못한 수확이다.

천무백의 머릿속엔 수많은 심공과 무공이 떠돌아다닌다.

하나같이 강호를 진동시킬 신공절학.

정파의 모든 무학과, 멸문되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각종 희귀한 무학들까지.

그중엔 천하를 오시하는 심공도 있었고, 몇 번이고 천무백을 강호의 최강자로 군림케 했던 무공도 있었다.

단순히 빼어나다고 표현하기 힘든 여러 무공을 설명만 해도 하루가 족히 걸리리라.

그 많은 무공 중에서 천무백은 고민할 게 없었다.

선천적으로 약해빠진 근골의 약점을 이겨 내고, 상단전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는 무공.

“경천혼공.”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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