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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화 (2/318)

<검신재생 2화>

2. 천무백

“도련님, 도련님 괜찮으세요?”

“…….”

점박이는 그가 몸종으로써 모시는 천무백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눈물 흘렸다.

텅 빈 동공에 절로 가슴이 무너졌다.

“무려 달포 만에 깨어나셨어요! 도련님, 기억나세요? 달포 전에 피리 부르시다가 갑자기 혼절하셨잖아요!”

그런가.

천무백은 쉬이 입술을 떼지 못했다.

말이 튀어나오지 않는 건 머릿속이 너무 뒤죽박죽이어서다.

수백 년간 압축된 전생의 기억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오고, 본래 천무백의 기억까지 섞이니 아주 엉망이었다.

불현 듯 천무백이 입을 열었다.

“검신이 죽은 지 얼마나 됐지?”

“네?”

점박이는 갑작스런 질문에 눈물을 닦았다.

평소 강호의 이야기는커녕, 집안일에도 관심 없던 막내 도련님이 아닌가?

자기가 좋아하는 악기 연주며, 그림에만 시간을 보내던 양반이 갑자기 검신 이야기를 꺼내지?

“검신 말입니까요?”

“그래. 모르느냐?”

왠지 말투도 살짝 바뀐 거 같은데.

점박이는 뒷머리를 긁으며 떠듬떠듬 기억을 떠올렸다.

“그, 40년 전에 천마를 패퇴시키고 우화등선한 검신 말입니까?”

그 순간, 천무백의 창백한 얼굴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우화등선? 우화아아아…… 등선?”

“…….”

“검신이 우화등선했대? 어? 염병! 우화등선은 개뿔!”

점박이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달포 동안 열병을 앓았던 청성표국의 막내도련님이…… 아무래도 열병을 못 이겨 실성했나 보다.

의원이 다녀갔다.

아직 후유증이 심한 상태이나, 회복은 되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청성표국의 사람들이 모두 환호작약했다.

다만 점박이는 눈앞에서 심술난 노인네처럼 표정을 구긴 천무백의 눈치를 봤다.

“개썅! 표국이라면서? 표국이면 강호에 한발 걸쳐 있는 게 중원의 섭리지. 근데 이 자식은 강호의 지식 따위는 전무해?”

혼자 화를 내고, 한숨 쉬고, 갑자기 평소엔 절대 입에도 담지 않았던 저속한 욕설까지.

‘진짜 실성한 거 아니야?’

점박이는 그런 의심이 들었다. 하나 의원도 단지 후유증이 심하다니 그렇다고 여길 따름이다.

“좋아, 검신이 죽은 지 40년이 지났고. 나는 청성표국의 막내아들 천무백이다, 이거지.”

천무백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살폈다.

한쪽에 놓인 금(琴), 비파, 대금, 몽고에서 들어온 얼후까지.

기루에서나 볼 법한 악기들이 잘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그림이 가득했다.

뿐이랴.

한쪽 책상에는 그리다 만 듯한 그림 몇 점이 놓여 있었다.

“……썅.”

천무백은 생각을 정리하다 다시 퉁명스러운 욕설을 내뱉었다.

기억을 정리하고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이것도 빠르다.

머릿속엔 그간 살아온 역경과 고난, 수많은 이야기가 생생한 기억으로 존재했다.

뿐인가.

하남성 ‘청성표국’의 막내아들 ‘천무백’이 살아온 16년의 기억까지 혼재했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전생을 떠올리면 안 되나.’

지금이야 익숙하다.

처음 전생 때는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눈 떠보니 머릿속에선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하고 있었으니까.

환생이든 빙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천천히 상황을 정리해 보니 다 천무백 본인이었다.

16살 때까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평범한 삶을 산다. 16살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병명을 알 수 없는 지독한 열병을 앓는다. 이후에 거짓말처럼 모든 전생을 기억한다.

이 과정을 편하게 각성이라 칭했다.

지금도 그렇다.

무려 달포 동안 쓰러져 있었다.

이전보다 더 길어졌다. 전생을 거듭할수록, 전생을 받아들이는 각성의 기간이 더 길어졌다.

태어났을 때부터 전생을 떠올리면 안 되나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갓난아기의 작고 연약한 뇌로 수백 년에 걸친 기억의 파도를 버티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열여섯이 되면 전생이 떠오르게 정해진 것일지도 모르지.

잠깐, 정해져?

‘끙. 그 개 같은 달걀 새끼.’

늘 저승길을 막아서는 달걀 얼굴.

그놈을 꺾지 못하면, 천무백은 이렇게 다시 환생했다.

빌어먹을 놈. 이것도 그놈이 정해 놓은 건가?

단순히 저승차사가 아니고, 저승시왕이라도 되는 건가?

‘그를 꺾어야 저승길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꺾으려면…… 검극!’

눈이 번쩍 뜨였다.

틀림없다. 달걀은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천무백을 시험하고 있다.

무려 수십, 수백 반복되는 전생 동안.

처음으로 달걀이 입을 열었다. 검극에 도달하면 꺾을 수 있다고.

검신이란 건 허명이었나.

‘검신이었지만, 검의 끝엔 가지 못했다. 내가 끝이라고 여겼던 건, 아직 끝이 아니었어.’

그 말은,더 나아갈 길이 있다는 의미.

순간 가슴이 뛰었다.

무수히 많은 전생을 살며 검을 잡았다.

아직도 나아갈 길이 있다.

그건 아마도 아무도 가 보지 못한 처녀봉이리라.

좋아. 검을 잡자.

이 손으로.

다시 검을 잡고 휘두르며, 그 끝에 가자.

이 손으로…… 엉?

이불을 걷어내며 들어 올린 새하얀 양손.

의욕을 불태우던 천무백의 두 눈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도련님, 이제 괜찮으십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점박이가 황급히 다가왔다.

“……도련님?”

걱정이 한가득한 시선이 쏟아졌지만, 천무백은 무시하고 이불을 다 걷어냈다.

편하게 입은 옷 아래 드러나는 가느다란 팔목과 허벅지, 종아리, 작은 발. 마치 섬섬옥수 같은 새하얀 손…….

“이런…… 개썅!”

***

‘계집은 아니니 다행이구나.’

천무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착각했다.

분명 천무백이고, 막내아들인 걸 잘 아는 데도 가느다란 손과 발, 고생이라곤 한 번도 안 해 본 것 같은 손발에 머릿속에 혼란이 왔다.

“약해 빠졌구나. 약해 빠졌어. 도대체 이게 어딜 봐서 사내 몸이야?”

“아이고, 도련님. 왜 갑자기 자학하십니까. 물론 도련님이 사내답진 않긴 하지만 그래도 부국주님 닮아서 얼마나 아름다우…… 흠.”

천무백이 한차례 노려보자 얼굴에 큰 점이 있는 점박이는 꼬리를 말았다.

사실 천무백이란 정체성은 많이 약해진 상태다. 어쩔 수 없다. 천무백으로서의 기억은 고작 16년. 그에 반해 검신의 모든 기억은 수백 년이 넘는다.

하물며 그것들은 검성이니, 검선이니, 검신에 이른 압도적인 정신력이다.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천무백의 정체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본래 천무백이 그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가 났다.

“도대체 이 자식은 아는 게 뭐야?”

천무백의 16년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애당초 강호에 대한 기억이 있으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여기 청성표국의 현황 같은 기억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 머릿속에 오로지 그림, 악기 연주, 이딴 것밖에 없지?”

“그야 도련님이 늘 예악에만 관심 가졌으니까요.”

“늘?”

“아이고, 도련님. 국주님이 도련님을 너무 이뻐하셔서 그렇지. 방안에 틀어박혀서 악기나 연주하고 그림만 그리시면 어떡합니까. 네? 밖에 나가서 친우도 사귀고…….”

“그래. 늘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지.”

소름 돋았다.

머릿속 기억이 놀라울 정도로 편향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鄭州)에 나간 기억이 가장 큰 세상을 본 거다.

심지어 가서 그림만 구경하다가 왔다.

……허.

“어떻게 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지?”

“도련님 갑자기 왜 자기반성입니까? 그야 국주님이 도련님만 보면 아주 오구오구, 오냐오냐. 해 달라는 건 다 들어줘서죠!”

“…….”

“그래서 부국주님이 도련님 좀 나아지셨으면 어여 모시고 오랍니다.”

“부국주님? 누님이?”

“네. 떠올리기만 해도 겁이 나죠? 부국주님은 국주님이랑 다르게 엄하시잖아요.”

부국주는 다름 아닌 천무백의 누이인 천유하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국주인 아버님을 도와 현재 부국주였다.

그녀를 떠올리자 몸이 떨렸다.

본래 천무백은 천유하를 무서워했다. 해 달라는 거 다 들어주는 막내바보인 아버지와는 다르게 엄한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음.

“제가 도련님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전해 드릴까요? 뭐, 그것도 사실인 거 같은데…….”

“됐다. 가자.”

“네?”

“누님한테 가자고.”

“……지금 가면 엄청나게 혼날 텐데요?”

순간 몸이 움찔했다.

……흥. 그깟 어린 계집아이.

뭐가 무섭다고.

***

‘무섭다!’

천무백도 작은 체구지만, 천유하는 더 작은 체구였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와 꼿꼿이 핀 허리.

비스듬하게 바라보는 시선.

거기에는 분명 혈육에 대한 정과 걱정이 한가득했지만…… 이해 못 할 압박감이 짓눌렀다.

천무백의 정체성이 약해졌다고?

아니, 그럴 리가.

몸이 기억했다. 천유하가 무섭다는 걸.

하지만 그걸 떠나서 천유하가 어떤 인물인지 느낄 수 있었다.

천무백보다 고작 6살 많으니 이제 스물두 살이건만.

타고난 기세가 있었다.

‘여장부구나. 무공을 익혔으면 여류 무사 중에 능히 최고가 될 만했겠어.’

얼마간의 정적이 이어졌을까.

천유하가 한숨을 폭 내쉬면서 물었다.

“몸은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네가 쓰러지고 하남성의 모든 의원이란 의원들이 다 다녀갔다.”

“…….”

“하나같이 말하더구나. 어떤 병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그래서 호북의 천양신의를 모셔오기로 했었지만, 그전에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네.”

“후우. 무백아.”

“네, 누님.”

“의원들이 다 공통으로 한 말이 무엇인지 알아?”

알 거 같다.

의원이 아니라 세상 누가 와도 딱 보면 알겠다.

“몸이 약해 빠졌다는 것이겠죠.”

“……알고 있긴 하네.”

“동경에 비춰 보면 누구나 알 당연한 사실입니다.”

방안에만 틀어박혀 햇빛을 보지 못한 탓에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팔과 다리에는 근육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마 눈앞의 천유하보다 더 가늘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천유하가 굵은 게 아니었다. 천무백이 터무니없이 가늘었다.

천유하의 시선이 묘해졌다.

“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어?”

“물론이죠. 허약한 몸뚱이에 운동이라고 전혀 하지 않았으니…….”

“그걸 알면서도, 지금까지 누님 말 다 무시했던 거야?”

천유하가 서슬 퍼런 음성으로 쏘아댔다.

“말했지. 넌 어머니를 닮았다고.”

맞다.

아버지가 ‘막내바보’인 이유가 애처가였던 탓이 컸다. 부인을 엄청나게 사랑했고, 천무백은 어머니를 똑 닮다 못해 똑같았으니까.

“넌 어머니를 닮아 나와는 달리 늘 잔병치레하며 살아왔지. 그때마다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천무백의 철없던 과거 기억이 떠올랐다.

유전인지 모르겠지만 그 역시 가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나 그냥 아픈 와중에도 그림 그리거나 피리를 불고 있었다.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몰랐던 건지, 원래 성격이 그랬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거 다른 의미로 대단한 놈이었네.

“이제 열여섯이다. 벌써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쓰러질 정도로 몸이 허약한데. 아버지가 달포 동안 곡기마저 끊으실 정도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제 절대 네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놔주지 않을 거야. 네가 좋아하는 악기며 그림이며 모조리!”

서슬이 퍼렇다 못해 냉기가 가득한 한마디, 한마디다. 하나 겉으로는 저리해도, 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붉게 변한 눈동자.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다.

천무백은 마음 한쪽이 요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본래 천무백이 느끼던 감정.

철부지였지만, 그래도 가족의 정을 느끼던 본래의 감정에 전생을 모두 떠올린 노회한 검신은 다소 난처했다.

가족이라.

그렇게 익숙한 감정은 아니다.

‘골치 아프구나.’

천무백의 정체성을 억눌렀던 본래 검신의 정신력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게 쉽지 않았다.

불과 16년의 기억.

그 천무백의 정체성이 지금만큼은 아홉 번의 전생을 거친 검신의 정체성을 위협했다.

천무백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천유하를 바라봤다.

‘철부지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가족만큼은 소중하게 생각했군.’

천무백은 속으로 실소했다.

하면 뭐가 문제겠는가.

검신이 천무백이고, 곧 천무백이 검신이 아닌가.

‘그래. 내 검의 끝에 올라, 이 가족을 지키면 되는 거 아니겠나.’

천무백은 미소지었다.

순간 천무백이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짓자, 당황한 건 천유하였다. 천유하는 혹여 동생이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할까 싶어 역정을 내려 했다.

그전에, 천무백의 단호하고도 뚜렷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저도 느낀 게 많습니다.”

“……?”

“이번에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이대로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습니다.”

“……!”

천유하의 눈썹이 씰룩였다.

천무백은 단정히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제 몸을 지킬 수 있게 신체를 단련하겠습니다.”

“뭐라고?”

“저희 표국에서 가장 강한 분이, 장 총표두님이시죠. 그분께 배우겠습니다.”

“지금 차라리 무공을 배우겠다는 거야?”

천무백이 이리 말할 줄은 몰랐던 터인지, 천유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강해져야만, 누님과 우리 표국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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