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화>
1. 아직은 올 때가 되지 않았다
세상을 여러 번 살다보니 깨닫는 바가 있다.
누구나 죽음은 피해갈 수 없다는 점.
육신의 노쇠는 어떤 고강한 무공과 내공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스승님…….”
제자 놈의 얼굴에 떠오르는 건 지독한 슬픔이었다.
녀석의 머리칼에도 슬쩍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걸 보니 나도 참 오래 살았구나 싶다.
코찔찔이 녀석이었는데.
난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냐?”
“스승님. 더 사셔야죠. 더 살다가 천마 놈을 확실히 죽이고, 당당하게 선계로 등선해야지요.”
“천마 놈을 십만대산으로 처박아 놓은 것만으로도 스승의 몫은 끝났다. 나머지는 네가 하거라. 언제까지 늙은 스승을 부려먹으려고?”
“암, 부려먹어야지요. 검신을 부려먹어서라도 강호의 평화를 지켜야지요.”
“에잉, 못난 놈! 그 마교 잡놈은 네놈이 알아서 처리하거라.”
“스승님…….”
“슬퍼하지 마라.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법이잖느냐. 물론 나는 아니기 하다만…….”
“네?”
동그랗게 뜬 눈에서 시선을 거둬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는 그만 죽고 싶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 진심이다. 이젠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단 말이다.”
“대체 무슨…….”
혼란스러워하는 제자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놈이 세상에서 검존이라 불리며 뭇 강호의 존경을 받는다니.
내가 떠난다니 울상이지만, 어쩌겠는가.
난 진심으로 끝내고 싶은데.
더는 환생이라는 지독한 윤회의 삶에 또다시 빠지고 싶지 않다.
저승으로 가고 싶다.
“제자야! 내 반드시 저승에 가겠다!”
“스승님? 대체……!”
“내가 저승에 가길 기도해 주어라. 그것이 이 스승의 유언이다.”
“어찌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어허! 시끄럽고! 기도나 해, 욘 녀석아! 네놈의 기도가 실패하면 난 다시 돌아와서 네놈 엉덩이를 아주 발로 차 줄 테니까!”
“…….”
그래.
이제 죽자.
진짜로.
* * *
‘이런 염병할! 또!’
푸른 하늘이 일시에 검게 물든다.
단순히 밤이 찾아오는 것과는 다르다. 먹물을 부은 것처럼 세상이 검게 칠해졌다. 하늘, 산, 땅, 강, 나무까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처음 본다면 깜짝 놀랄 괴현상이지만, 나는 심드렁할 뿐이다.
역시나 또.
오로지 검게 물든 세상.
내 앞에서 찬란한 빛으로 무장한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거. 이쯤 되면 서로 통성명할 때도 되지 않았나?”
묵묵부답.
하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다.
사내는 늘 그랬듯이 검을 뽑았다.
스륵.
“대답 대신 칼을 뽑는 버릇 좀 고치는 게 낫지 않소? 옛날엔 그게 먹혔어도, 요즘 강호에선 안 그래.”
여전히 답이 없다.
“하. 그래. 만만히 보이겠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졌으니까. 매번 이기니까 지겹지? 이번엔 좀 색다를 거요.”
오른손은 뒷짐을 진 채, 왼손에 들린 검.
그가 검을 서서히 들어 올리자 전신이 긴장감으로 터져나갈 듯 꽉 쪼여왔다.
“옘병, 빌어먹을 달걀 얼굴.”
결국, 내 입에서도 좋은 소리는 나오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얼굴.
이목구비가 싹 사라진 그저 얼굴의 형체.
표정도, 눈빛도 읽을 수 없다.
불리하다.
검과 검의 대결에서는, 상대의 호흡, 표정, 눈빛, 동공의 움직임, 얼굴 근육의 경련.
그 모든 걸 읽어야 한다.
한데 사내는 얼굴이 없다.
“쩝. 빌어먹을 사신 양반! 그냥 선계고 나발이고, 나 저승 간다니까? 왜 막는 거야?”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지만 사실 입을 열기도 힘들었다.
압도적인 존재감. 칠흑 같은 검은 무복의 사내는 이질적이었다.
스륵.
사내가 칼끝을 나에게 겨누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번번이 내 앞길을 막던 저 검끝.
단지 겨눈 것만으로도 풍기는 위험한 냄새.
“솔직히 말해보쇼. 왜 내 저승길을 막는 거요?”
사내는 끝까지 답이 없었다.
“염병할 새끼. 내 그 얼굴에 칼집을 내서 입을 만들어 주리다. 반드시 이유를 들어야겠소!”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저번 만남 땐 난 그저 검왕에, 그리고 검성에 불과했지만, 지금 강호동도들은 날 검신으로 부르고 있다오. 이번에야말로 저승으로 가겠소.”
조금 웃긴 이야기가 아닌가.
상대를 저승으로 보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저승으로 가겠다는 얘기니까.
지금까지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전생을 살아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윤회. 저승의 문턱조차 밟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지금이다.
죽고 나면 우화등선해 선계든, 저승이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매번 죽음에 이르는 순간마다 눈앞의 괴물이 막아섰다.
마치 저승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래. 이 지긋지긋한 윤회의 삶을 끝내고 싶었다. 세상사 모든 걸 달관하고 저승에 가고 싶었다. 이승을 모두 잊고 말이다.
하나 눈앞의 사내는 허락지 않았다.
“빌어먹을. 그래. 칼 든 놈들끼리 뭔 대화가 필요하겠어.”
내가 저승에 가는 방법은 오로지 사내를 꺾어야만 하는 것.
간혹 사람들은 말한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를 수가 있느냐고.
머릿속에서 연산 되는 과정보다, 움직임이 더 빠를 수가 있냐고.
답한다.
수천 번, 수만 번, 수억 번.
근육이 녹고 또 녹아, 죽고, 다음 생에서도 또 검을 휘두른다면.
육신이 검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검로를 기억하게 된다고.
그러하면, 생각의 속도보다 검의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 놈이 고개를 모로 꺾으며 대답했었지.
‘그래서 내가 검신이 아니겠느냐.’
단 일생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경지.
수도 없이 여러 전생을 살아오며 검을 잡았다.
지금에야 오른 검신이란 지고한 경지.
반드시 사내를 죽이고, 저승으로 가리라.
꽈르르릉!
벽력이 몰아쳤다.
흡사 내리치는 벼락에 가공할 굉음과 파괴력이 이는 것처럼.
허공을 꿰뚫는 검격에 공간이 압축되고 찌그러졌다.
터져 나오는 굉음과 함께 사내의 심장 부근을 찌르는 단 일격의 검로.
“……허.”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결과를 보고 내 입에선 허탈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사내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아니,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검을 세로로 들어 심장부근에서 정확히 검끝을 막아 낸 완벽한 방어.
절로 허탈해졌다.
“두 손 다 쓸 수 있는 거였소?”
늘 뒷짐 지고 있던 오른손이 어느새 검을 꽉 쥐고 있었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수없이 봐 왔던 당대의 최고수들.
아니, 전대, 전전대, 내가 살아온 수백 년의 전생을 통틀어 최고수라해도 이 사내 앞에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모든 전생의 삶, 수백 년을 통틀어 최고수가 바로 나였으니까.
강호동도들이 태산마저 부순다는 찌르기였건만, 우습게도 사내의 검조차 깨지 못했다.
순간 사내가 움직였다.
정직하고도 깨끗한 움직임. 뒤로 빠졌다가 쭉 앞으로 곧게 뻗어 나가는 검로.
그 검로를 지켜보며 무언가 느껴졌다.
‘빌어먹을 정도로 굳건하구나!’
단 조금의 미세한 떨림도 없는 검로.
그에 반해서 나는?
‘아직 멀었었군. 멀었어, 썅.’
속으로 실소했다. 수백 년간 검을 잡았건만, 상대의 검로와 비교하면 난 흔들림이 있다. 마음이 흔들리면 신체가 흔들리는 법이다.
그렇다면, 난 아직도 멀었군.
“…….”
그렇다 하더라도.
상대가 나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막는다!’
상대도 막았는데, 나라고 못 막을 게 뭐 있겠는가.
그 순간 상대의 검이 확장되듯이 커졌다.
압도적인 속도.
너무 빨라서 순간적으로 커진 것처럼 보일 정도.
하나 막았다.
검을 비스듬히 세워 흘러 내면서.
단숨에 손목을…….
차앙!
검이 무참하게 깨져나갔다.
몸을 파고드는 검의 차가운 느낌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조금 전, 내 검을 깨뜨리는 단 한 번의 일격.
머릿속을 뒤흔드는 둔중한 충격이었다.
‘흔들림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제야 상대의 검과 내 검이 무엇이 다른지 보였다.
‘오히려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밖은 멈춘 것처럼 흔들림이 없으나, 그 속에서 수없이 진동하고 또 진동하여 검의 위력이 커진 것이었구나.’
고통은 없다.
내 피육은 이미 저 밑에 제자 놈이 엉엉 울면서 붙잡고 있으니까.
이미 난 죽은 몸이니까.
고통보다 더 큰 건 허무였다.
“이봐. 이번 삶에서 사람들이 날 뭐라고 불렀는지 알아? 검신이야. 검신. 검으로서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이쯤 되면 솔직히 끝날 줄 알았어. 당신 꺾고, 이제 이 빌어먹을 윤회의 굴레 따위는 벗어 던질 줄 알았다고. 엉? 나도 저승 가서 염라대왕 만나서 왜 나한테만 이 지랄이었냐고 따지려고 했다고! 근데 도대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다.
이대로 정신을 잃고, 또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라 생각했으니까.
하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 깊은 무저갱에서나 들릴 법한 소름 끼치는 지독한 울음.
감정의 고저도 없는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이다. 두 손을 다 쓴 것이.”
봤다.
사내의 양손이 충격으로 파르르 떨리는 장면을.
아무것도 없던 사내의 얼굴에서 시퍼런 귀화가 타올랐다.
마치 나를 똑바로 바라보듯이.
“하지만, 아직은 올 때가 되지 않았다.”
순간 사내의 광채가 나를 휘감았다.
익숙하다.
“날 꺾고, 그대가 진정한 검극에 도달한 순간. 여기를 넘어갈 수 있으리라.”
검극(劍極). 검의 극의.
그런 경지가 있었는가.
이번 삶에서 나는 내 전생을 통틀어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다.
사람들이 검신이라 찬양해 마지않는 절대적인 무위.
하나…….
‘허. 염병할. 허명이었나.’
사람들이 검신이라 부른다고 해도, 실제로 나는 검의 끝에 이르렀는가?
수없이 살아 왔던 수백 년 전생의 삶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일생(一生) 검을 보고 검에 반해 검을 쥐었다.
이생(二生) 스승을 만나 검도(劍道)에 뜻을 두었고.
삼생(三生) 무인이 되어 강호에 나가 일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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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생(現生).
새 삶을 시작한다.
‘검의 끝, 검극을 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