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종장(終章)
“금수 따위… 우웩!!”
분노를 표출하던 신궁주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현경에 오른 신궁주는 강했다.
복수를 위해 3년간 섶 위에서 잠을 잔(臥薪) 부차, 쓸개를 씹으며(嘗膽) 20년간 치욕을 되새긴 구천.
헌데 신궁주는 무려 백 년이다.
백 년이란 기나긴 시간 동안 복수를 꿈꾸었지만, 원수인 원(元)은 이미 명(明)에 의해 무너졌다.
그럼에도 신궁주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에겐 제국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한 발을 앞두고 있다.
헌데 예상치 못하게 방해를 받았다.
그것도 하찮은 미물. 금수를 부리는 자에게.
이백은 설군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금수(禽獸) 따위, 금수(禽獸) 따위라 하지 마라. 야욕 때문에 수많은 이들을 불행에 밀어 넣은 넌, 이 아이들만 못하니까.”
이백은 단호히 말했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금수이나 사랑을 받으면 그에 보답할 줄 안다.
허나 인간은 다르다.
은혜는 곧 잊고 탐욕만 일으킨다.
그리고 그걸 위해 주변이 파멸된다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수많은 권력자가 그래왔고, 눈앞의 신궁주 역시 그걸 당연시했다.
“감히 짐을 능멸하는 것이더냐!!”
신궁주는 이백을 죽일 듯 노려왔다.
그의 살기에 반응하든 설군 역시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신궁주는 또다시 자존심이 상했다.
송(宋)의 마지막 황제이자, 새로운 제국의 주인이 될 자신이다.
미물 따위에게 능멸을 당한다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순간, 거대한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龍)의 형상을 한 심검(心劍)은 이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용없어.”
“크아아앙!!”
이백이 나설 것도 없었다.
곁에 있던 설군이 포효했다.
단순히 덩치만 큰 짐승이 아니다.
신수(神獸) 백호로서 신격은 물론 신기까지 회복한 설군에게 심검은 위협적인 힘이 아니다.
오히려 설군의 포효에 용은 흩어지고 말았다.
“쿨럭… 우웩!!”
강제로 심검을 해제당한 탓에 신궁주는 기의 역류로, 내상이 더 심각해졌다.
누가 봐도 승패는 갈렸다.
그럼에도 신궁주는 포기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폐, 폐하!!”
폐하라는 외침에 황제는 목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 외침은 황제에게 향한 게 아니다.
신궁주를 향한 외침이었고, 외친 자는 제독동창에게 발이 묶였던 삼공의 태공(太公)이었다.
허나 태공은 다시 한번 발이 묶였다.
거대한 흑마가 그를 가로막은 탓이다.
“히이잉!!”
“비켜라!!”
태공은 수강(手罡)이 어린 손을 휘저었다.
허나 그는 마음이 급해 깨닫지 못한 게 있었다.
눈앞의 흑마는 평범한 말(馬)이 아니다.
신수 흑기린(黑麒麟).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없으나 누구보다 빠르고, 강한 다리를 가지고 있다.
야군은 태공의 수강을 가볍게 피한 후 앞발로 내리찍었다.
“히이잉!!”
“크윽!!”
너무도 빠른 야군이기에 당사자인 태공조차 어떻게 당한 것인지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심복인 태공 역시 금수에 치욕을 당한 모습에 신궁주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를 이백은 차가운 얼굴로 내려보았다.
“아직도 어리석은 생각이 바뀌지 않았나.”
“닥…쳐라! 짐은… 짐은…….”
백 년의 염원이 어찌 쉬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이백은 그를 죽여 분란을 없애려 했다.
하지만 멈칫했다.
과거에는 알 수 없었지만, 현경에 오른 후에 업(業)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수양이 깊은 고승이나 진인이 속세를 벗어나 은거하는 것 역시 그와 같은 이유다.
한 명을 죽여 더 큰 분란을 없애는 것도 위대한 일이지만. 업, 그것도 살업을 자신이 쌓는 게 내키지 않았다.
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신궁주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그 순간, 손가락만 한 작은 용이 튀어나왔다.
용은 순식간에 신궁주에게 날아갔다.
신궁주는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았다.
“큭! 네놈 죽여! 어… 어…….”
분노하던 신궁주는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벌어진 게 이백에 의한 것임을 깨달은 신궁주는 그에게 소리쳤다.
“지, 짐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심검을 심었으니, 더 이상 허튼수작은 부리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무공을 사용할 수 없고.”
신궁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럴 리 없다면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허나 내공이 반응하긴커녕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크윽! 으윽!!”
“의심도 참 많군…. 돌아가라. 그리고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마라.”
이백은 신궁주를 죽이는 대신 강제로 은거시킬 생각이었다.
그의 말에 신궁주는 황당하다는 듯 벙찐 표정을 지었다.
허나 이백은 그런 그를 무시한 채, 야군의 발길질에 가슴이 으깨진 태공에게 말했다.
“데려가라. 그리고 경고한다. 경고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고맙소.”
태공은 분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주군을 살려준 이백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허나 신궁주는 달랐다.
백 년의 인고(忍苦)를 버텨낸 대가의 끝이 이미 허무하단 걸 받아들일 수 없던 탓이다.
“닥쳐! 짐은 천하의 주인이다! 이대로…….”
“폐하… 용서하시옵소서…….”
이백의 심기를 건드려 주군의 목숨이 위협을 받게 할 수 없었기에 무례하지만 신궁주를 점혈했다.
그를 안아 든 태공은 씁쓸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때 뒤에서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저 망령된 자를 살려 보내더냐! 당장 잡아 와, 짐 앞에 꿇려라!”
“폐, 폐하…….”
노기 어린 목소리로 명을 내린 자는 황궁의 주인, 황제였다.
그의 고압적인 태도에 곁에 있던 황후는 당황하고 말았다.
허나 그녀는 감히 황제를 만류할 권한이 없었다.
“역시 황제 따윈 죽게 놔뒀어야 했나.”
“짐을 능멸하는 것이더냐!”
이백의 중얼거림에 황제는 노기를 드러냈다.
곁에 있던 황후나 황실고수들은 사색이 되었다.
이백의 태도를 봐선 단순한 위협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 탓이다.
“가지가지 하는군.”
“감히… 헉!”
이백은 황제를 향해 검지를 겨누었다.
당황한 황실고수들인 황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백의 검지에선 손가락만 한 작은 용이 튀어나왔다.
황실고수는 용을 베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허나 심검을 칼로 벨 수 있을 리 없다.
용은 황실고수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부릅떴다.
“크으윽! 윽!!”
허나 죽음을 직감한 것과 달리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그때 뒤에서 들린 신음에 황실고수는 당황해 뒤를 돌아보니, 황제가 심장을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용이 황실고수를 통과해 원래 목적지인 황제의 심장에 안착한 것이다.
신궁주에게 그래왔듯이.
신궁주와 달리 황제에게까지 이런 제재를 가할 필요는 없지만, 기찰국(譏察局)과 얽혀 피눈물을 흘린 이들이 떠올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황실고수들은 당황해 이백을 향해 도검을 겨누었다.
허나 다른 선택을 한 자가 있었다.
“부디 폐하를… 용서해주시오. 차라리 신첩을 대신 죽이시고 폐하를… 용서하옵소서.”
“폐하를 용서해주옵소서!”
황후가 부복한 채 이백에게 황제를 용서해달라 청했다.
그것을 본 황실고수들은 당황했지만, 그녈 따라 부복했다.
그 모습을 본 황제는 참을 수 없는 분을 느꼈다.
“황후! 체통을 지키시오! 짐이 죽는다고 한들… 으윽!!”
“폐하!! 제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이백에게 구걸하는 황후에게 화를 내던 황제는 다시 가슴을 부여잡으며 괴로워했다.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보던 이백이 나직이 말했다.
“마음 같아선 죽이고 싶으나… 목숨을 거두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백의 말에 황후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녀는 황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걸 느낀 이백은 내색하지 않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찰국을 거둬라. 중원을 감시하고 조종하려 하지 마라. 그럼 네 심장에 깃든 심검이 반응할 일은 없을 것이다.”
“부, 부디 폐하의 심검을…….”
“되었네, 황후.”
황제는 황제인가.
제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신색을 회복했다.
오히려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이백을 감탄하게 했다.
“약조하지. 허나 더 이상 짐을 능멸하지 마라.”
“폐하…….”
황후는 여전히 두려웠다.
무후(武后)의 맥을 이었다지만, 이백으로부터 황제를 지킬 수 없다.
헌데 황제가 그의 심기를 건드는 말을 서슴지 않으니 어찌 두렵지 않은가.
허나 정작 이백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피식거리곤 신수들과 사라졌다.
그제야 황후와 황실고수들은 안도했다.
“짐은 천자다. 헌데 힘이 없어서 이리 능멸을 당하는구나. 짐의 아우 무왕(武王)이었어도 이리 무력했을까.”
“폐, 폐하…….”
황제는 한순간 늙어버렸다.
그 모습에 황후와 황실고수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낀 탓이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었다.
“황좌를 무왕에게 선위(禪位)하겠노라.”
“폐, 폐하 부디 통촉하옵소서!”
“통촉하옵소서!!”
황제는 황좌에서 물러나겠다 선언했다.
그것도 황태자가 아닌 아우인 무왕에게.
황태자의 어미로서, 그리고 황제의 아내로서 이 결정을 만류하고 싶었다.
허나 황제의 눈을 마주한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황후, 짐의 뜻을 따라주시오. 부탁하오.”
“폐하… 신첩은… 폐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고맙소, 황후.”
황제의 이런 결정은 의외로 큰 잡음 없이 진행되었다.
황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권력을 스스로 제한했을 뿐, 무왕은 새로운 황제로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게다가 강한 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만큼 선위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세상은 언제 두려움에 떨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갔다.
* * *
“현아! 현이 이 녀석 어디에 있는 게냐!”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도 방령(芳齡)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미부(美婦)가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십 대의 장한이 다가왔다.
“사모님, 무슨 일이십니까?”
“혁아, 현이를 못 봤느냐.”
“예? 사제가 또 사라졌습니까? 설군이랑 함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느새 장성한 강우혁은 크게 놀란 기색은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미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차라리 그럼 다행인데, 그렇지 않더구나.”
“그럼 큰일이군요! 본문의 제자들에게 찾으라 하겠습니다!”
매일 같이 어른들의 눈을 피해 사라지긴 했지만, 신수(神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위험한 일이 없다.
그렇기에 말없이 사라진다고 한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헌데 이번에는 신수들 없이 홀로 사라졌다고 하니, 강우혁은 기겁했다.
만수문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이 부리는 금수들을 움직인다면 넓은 무란(茂蘭)이지만, 곧 아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수문의 제자들을 소집하려고 할 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강우혁은 설마하는 얼굴로 사색이 되어 장원 밖으로 뛰쳐나갔다.
푸른 새가 무란 일대를 날아다녔다.
그 크기가 일반 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많은 금수와 함께하는 만수문에서조차 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 식솔들이 놀라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허나 식솔들이 놀라는 이유는 단순히 새가 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히히~! 청군(靑君)아! 빨리 더 빨리!!”
놀랍게도 새의 위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것도 고작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아이를 본 강우혁은 이마를 짚었다.
“저 말썽꾸러기…….”
한숨을 푸욱 쉬었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따스함이 어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태생이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강우혁만이 아니라 만수문 모두에게 사랑받을 정도였다.
소란을 들었는지, 미부가 나타났다.
“현이 너! 빨리 안 내려와! 문주께 말씀드려, 호되게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릴 거지 너!”
“어, 엄마! 안 돼요! 아빠한테 이르지 마요!!”
신나게 놀던 아이는 깜짝 놀라 새와 함께 빠르게 하강했다.
새가 바닥에 착지하자, 아이는 폴짝 뛰어내렸다.
제 키보다 높은 반장(半丈:1.5m)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에 미부는 기겁해 달렸다.
미부는 쏜살같이 달렸다.
칠금행(七錦行). 검모궁의 독문 경공이자 무림 십대경공에 꼽히는 절세공부다.
그럼에도 아이가 땅에 닿기 전에 낚아채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요녀석, 엄마 걱정 끼치지 말라니까.”
“헤헤~ 아빠, 현이는 그런 적 없는걸요?”
사내는 품에 안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이는 사내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배실베실 웃었다.
그 모습에 미부 교정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오셨어요. 피곤하실 텐데…. 내려와, 아빠 피곤하셔.”
“싫어요!”
아이는 사내의 품에 더 찰싹 달라붙었다.
아비를 한창 좋아할 나이였다.
그 모습에 미부를 섭섭한 표정이었다.
사내는 다른 팔로 그녈 안아주었다.
교정정의 얼굴에 홍조가 피며, 부자(父子)에게 섭섭한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사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문주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내는 바로 만수문주(萬獸門主) 이백이었다.
그가 돌아온 걸 알아차렸는지, 신수들이 이백의 곁에 모여들었다.
이백의 부탁으로 만수문의 식구들을 지키고 있었지만, 역시 그가 제일 좋았다.
이백은 장제자 강우혁과 여러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이 말썽쟁이 빼곤 다들 잘 지낸 거 같구나. 그리고 소성주가 혁이 네가 안 와 섭섭해하더구나.”
“하, 하하…….”
이백의 말에 강우혁은 머쓱한 표정이었다.
수년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많은 변화를 주었다.
십 대의 소년소녀가 어엿한 어른이 되게 만들었고, 무림은 세대교체를 맞이했다.
그중 한 곳이 패왕성이다.
패황은 화경에 간신히 오른 아들에게 성주의 자리를 떠넘기고 물러났다.
이백은 그 자리에 초대받아 다녀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는 틱틱거리던 하후지희는 강우혁을 마음에 둔 듯싶었고, 그 역시 싫은 거 같지 않았다.
“들어가. 성주가 챙겨준 것도 있고, 오는 길에 당가에 들렀더니 령이 챙겨준 게 있다.”
사천당가는 최초로 여가주가 탄생했다.
오 년의 폐관 끝에 독존암제의 진전을 이은 당령은, 화경에 오르지 못했지만 화경고수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녀가 가주의 자리에 오를 때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천당가가 과거의 위세를 서서히 회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고금제일고수라 불리는 만수조종(萬獸祖宗) 이백의 조카라는 칭호(?)는 무척이나 강력하게 사용되었다.
‘이게 행복이지, 사랑하는 아들과 부인. 잘 커 준 제자들이 있는 이런 삶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