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파죽지세(破竹之勢) (2)
“총군사,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소!”
사천혈사(四川血史) 이후 무림맹을 발칵 뒤집혔다.
당연하다.
오대세가의 하나인 사천당가가 반파되었다.
허나 더 큰 이유는 바로 독선의 죽음과 무존의 등장 때문이다.
사천당가도 사천당가지만, 우내오존의 독선이 노환도 아닌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게다가 그런 그를 죽인 자가 무존(武尊)이라니.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충격은 무존이 신궁의 궁주가 아니란 점이다.
우내오존의 무존이 부궁주라면 궁주는 얼마나 더한 괴물이란 말인가.
“사천… 이후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맹주님.”
제갈중경은 차마 사천혈사라고 입에 담을 수 없었는지, 말끝을 흐려버렸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회의장에는 빈자리가 제법 많았다.
신궁의 거친 행보에 위기감을 느낀, 장로나 호법들이 각자의 사문으로 돌아가 버린 탓이다.
사문을 대표로 무림맹에 나와 있는 자로서는 무책임한 행동일 수 있지만, 누구도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역시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개방과 비각의 눈을 이리 오랫동안 피하는 게 가능하단 말이오!”
“…….”
개방의 장로는 이를 악물었다.
맹주의 저 말이 개방을 질책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궁에 놀아났던 전적까지 있으니, 그로서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광서에서 물러난 이들은 여전히 전(前) 사도련 총단에서 움직임이 없어 예측이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총군사를 책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사천삼세에서 그칠 자들이 아니니…….”
사천혈사는 사천당가의 사건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독선을 죽인 이후 그들은 물러났다.
반파된 사천당가는 그들을 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기 무섭게 청성산과 아미산에 불길이 치솟았다.
사천당가와 함께 사천삼세(四川三勢) 혹은 사천삼천(四川三天)이라 불리는 청성파와 아미파 역시 피로 물들었다.
그로 인해 사천 십이대고수의 절반이 죽고, 사천무림의 힘이 반 이하로 뚝 떨어지게 되었다.
신궁을 상대함에 있어서 사천무림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안 되겠소! 맹주령을 발동할 터이니, 각파는 관할 일대를 샅샅이…….”
신궁의 움직임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이렇게 각개격파 당하는 걸 보고만 있게 된다.
그럴 바에는 맹주령이라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그들의 움직임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검제가 맹주령을 발동시키려고 할 때,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때 사색이 된 제갈중경이 벌떡 일어났다.
“매, 맹주님!”
“무슨… 아니, 말하시오!”
차분히 대답을 들을 때가 아니라 느낀 검제는 바로 설명을 종용했다.
천하의 제갈중경이 신색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무존이 발견되었습니다!”
“오! 그게 어디요!!”
검제는 무존의 행방을 찾아냈다는 말에 반색했다.
우내오존인 그의 신위는 인정하지만, 독선을 상대로 멀쩡할 리 없다.
그가 부상을 회복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행방을 찾아낸 건 무척이나 다행히 아닐 수 없다.
헌데 이를 밝히는 제갈중경의 신색이 여전히 좋지 못했다.
무존의 행방을 찾아낸 사실에 흥분해 검제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게…….”
“왜 말을 하지 못하시오?”
검제의 채근에 제갈중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까지도 검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지옥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서입니다.”
“바, 방금 뭐라… 했소?”
검제는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허나 그의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회의장 안에 사색이 된 자가 몇몇 있었다.
그중에는 검제와 함께 화산에서 온 장로도 있었고, 종남의 장로 역시 있었다.
“섬서(陝西)에 나타났습니다. 무존과… 당가에 나타났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 * *
“커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황색 도의(道衣)를 입은 도사가 쓰러졌다.
그만이 아니다.
주변에는 죽은 도사의 시체가 수십은 되어 보였다.
“이거이거 화산을 정리하기 전에 몸풀기라 생각했지만, 뭐 이리 허약해?”
“킥! 종남이지 않나.”
불청객의 등장에 종남파는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 수는 고작 열하나.
헌데 벌써 수십이 죽거나 다쳤다.
그중에는 종남의 자랑, 천하검수(天下劍手)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다고 할 저항도 못 한 채 죽어갔다.
썩어도 준치라고 구파일방의 종남파가 약할 리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된 이유는 불청객의 무위가 하나같이 고강한 탓이다.
“이놈들! 어찌 청정한 도량에서 살겁을 벌이더냐!!”
호통과 함께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같이 나이가 지긋한 노진인(老眞人)들이었다.
종남의 장문인 천하검절(天下劍絶) 태현진인과 장로들이었다.
검제를 배출한 화산에 가려졌지만, 종남이 아직까지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흐흐, 이제 좀 손맛을 보겠군.”
“빨리 끝내고 화산으로 넘어가자고.”
종남의 기라성 같은 노고수들이 나타났음에도 불청객들은 두려워하긴커녕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는 종남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니, 종남파에 와 살겁을 벌였을 때부터 안중에도 없었으니 참으로 무례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무례가 아닌 강자의 여유라고 보여질 힘이 있었다.
“이이! 무례한 것들!”
“이런! 태령 사제!”
태현진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청객들의 무례함이 분노한 종남의 장로 한 명이 뛰쳐나가 버렸다.
종남의 장로인 태령진인 역시 보통 고수가 아니다.
비록 초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했지만, 태진강기(太眞罡氣)로 펼치는 그의 벽운천강수(碧雲天剛手)는 초절정고수도 부럽지 않은 위력을 자랑한다.
그렇기에 그가 무례한 불청객을 묵사발로 만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그 믿음은 배신당하고 말았다.
“흐흐, 종남의 구린 무공으로는 무리라고!”
달려드는 태령진인을 보며 비웃는 사내의 손에 붉은 불꽃이 일렁거렸다.
한눈에 범상치 않았으나 종남의 절학인 벽운천강수가 밀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쾅!!
“태, 태령 사제!!”
“진정하게! 태하 사제!”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태령진인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단숨에 절명하고 말았다.
그런 그와 평소 가깝게 지내던 태하진인은 이성을 잃고 달려드려는 걸, 장문인이 간신히 말렸다.
그 역시 태령진인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성급하게 움직였다간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 자명한 탓이다.
“실전되었다는 적양신장(赤陽神掌)이라니…….”
“흐흐흐, 그럼 너희가 오늘 죽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겠지.”
비아냥거림으로 끝나지 않을 정도로 적양신장은 무림일절로 불렸던 절학이다.
태현진인은 종남의 장문답게 무시무시한 기운을 드러냈다.
“종남이 어찌 종남인지… 알려주마!”
* * *
“쿨럭… 종남… 따위… 에…게…….”
이순(耳順)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곤 그대로 절명했다.
십대신군 중 세 손가락에 꼽히는 혼천신군(混天神君)의 죽음은, 천하검절이 종남의 전설임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허나 그런 천하검절도 멀쩡하진 못했다.
“종남…을… 무시하지… 마라!”
“허허, 화산도 아니고 종남에게 신군(神君)을 셋이나 잃다니. 궁주님을 뵐 면목이 없군.”
십대신군에게 맡긴 채 뒤에 물러나 있던 무존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구파일방이라도 천하검절뿐이라고 불리는 종남이기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피해가 너무 막심했다.
사천당가에서조차 부상을 있을지언정 십대신군 중 어느 한 명 잃지 않았다.
헌데 간신히 구파일방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다는 종남을 상대로 셋이나 잃을 줄이야.
무존으로서는 한숨만 나왔다.
그런 그의 시선은 천하검절이 아닌 또 다른 노진인에게 향했다.
“잊고 있었군, 종남마검(終南魔劍)을…. 본좌가 직접 상대해주지, 영광으로 알게나.”
“무…존인가.”
천하검절이 십대신군의 한 명을 벨 동안, 둘을 벤 자가 있었다.
바로 태백진인이다.
그런 그는 소름이 돋았다.
상대는 전설의 우내오존.
무존의 상대로 검을 휘두른다는 건 영광이다.
만약 적으로 만난 상황이 아니라면.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 역시 인간이야. 그리고 독선(毒仙), 그분을 상대로 멀쩡할 리 없어.’
태백진인은 흥분을 누르며, 무존을 직시했다.
종남이 오늘 살아남기 위해선 그를 베어야 한다.
그런다면 적의 사기를 꺾고, 무찌를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비웃듯 무존이 단호히 말했다.
“선수를 양보하지. 자네에게 기회는 한 번뿐일 테니…….”
“…거절하지 않겠소.”
참으로 오만한 말이지만, 그걸 입에 담은 자가 무존이라면 오만 따위로 치부할 수 없다.
그걸 알기에 태백진인은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태백진인에게서 여섯 가지 기운을 흘러나오더니, 어느덧 강성한 하나의 기운이 되었다.
육합귀진신공(六合歸眞神功).
태을신공, 현청건곤강기, 태진강기, 천단신공, 칠음진기, 구양신공.
여섯 가지 신공을 완성해야만 비로소 익힐 수 있는 종남의 전설.
태백진인은 무존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천! 하! 무! 궁!”
육합귀진신공으로 펼치는 천하삼십육검의 마지막 초식 천하무궁(天下無窮).
종남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검이 태백진인을 통해 세상에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무존이라고 벨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공한 기세였다.
자신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쇄도하는 검을 향해 무존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는 신비한 백광이 어려 있었다.
콰직! 콰지직!!
태백진인의 검과 무존의 손 사이 공간이 일그러졌다.
실제로 공간이 일그러진 건지, 일그러졌다 착각을 불러일으킨 건지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일 합을 겨룬 건 사실이다.
‘무량…수불…….’
태백진인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무존과의 일전(一戰). 정확히는 일합(一合)을 통해 그간 막혔던 벽이 부서졌다.
한계를 깨부수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기분.
이 깨달음을 수습한다면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르게 된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에겐 그러한 기회가 없다.
“축하하네. 하지만…….”
콰직!
일그러진 공간이 갈리며 무존의 손에 태백진인의 검을 부셨다.
그것으로 부족해 그의 가슴을 갈랐다.
서걱!!
태백진인은 그렇게 절명하고 말았다.
그런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화경을 맛보았다는 희열이 죽음조차 달관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사, 사형!”
“아, 안 돼!!”
여기저기서 절규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법.
일개 초절정고수가 아닌 화경에 막 들어선 태백진인을 죽인 탓에 무리했는지, 무존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이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삼목신군(三目神君)이 외쳤다.
“그만 죽어라! 본궁의 영광을 위해!”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